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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6

       “후아아.”

         

       파스텔은 힘없이 걸었다.

         

       야근까지 마치고 달이 태평하게 떠 있을 시간에 퇴근하는 직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안 입던 정장을 입은 상태였으니 큰 차이가 없긴 했다.

         

       “너무 힘들었당.”

         

       매물 설명회 참석을 마치고 의논도 대략 끝낸 뒤 객실로 해산하는 참이다.

         

       공적 상황이 끝나고 사적 관계로 완전히 돌아온 친구들이 같이 걸었다.

         

       멜리사가 살포시 웃었다.

         

       “연회는 원래 체력이 많이 소모돼요. 처음이라면 특히 더요. 설명회에 집중하기 위해 늦게 참석하며 연회에서 빠진 건 전략적으로 잘한 선택이었어요.”

         

       그건 기 싸움이었지만.

         

       파스텔은 힘없이 팔을 휘저었다.

         

       “난 설명회 끝난 뒤 또 연회가 있을 줄 몰랐어.”

         

       다가오는 귀족들 상대한다고 진이 다 빠졌네.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데도 조용한 탐색전 혹은 신경전이 오가니 마냥 즐길 수가 없다.

         

       전부 연장자라 그런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상황인 거지.

         

       뿌뿌.

         

       인기인의 디메리트네. 평소엔 사람들이 많이 다가와서 즐겁지만 일할 때도 많이 다가와서 곤란하다.

         

       사적으론 친구여도 공적으로 만나면 그냥 민원인이라구.

         

       “그건 연회라기보다는 회포를 푸는 간단한 시간이에요. 정식 명칭은 없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는 일정이죠.”

       “뿌우.”

         

       파스텔은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간단한 시간이라기에는 너무 긴 거 아니야?”

         

       복도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올려보니 달이 더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분홍 머리카락을 베일처럼 덮었다.

         

       “후아아.”

         

       진짜 12시 넘었어.

         

       멜리사가 미소 지었다. 어릴 적부터 연회를 겪은 정통 귀족답게 지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주인공이 늦게 왔으니까요. 파스텔 당신과 한 번쯤 얘기해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제야 말을 건 거죠.”

       “그 말을 거는 목적이 탐색전이면 즐겁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어.”

       “그렇긴 하지만요. 그래도 잘 대처했어요. 다들 크래프트 가주의 첫인상을 인상 깊게 보던걸요? 비록 당신은 데뷔탕트를 안 했지만 이 정도면 사교계에 훌륭히 데뷔했다고 자화자찬할 만해요. 첫인상 얘기가 퍼질 테니 다음부턴 이 정도로 오래 걸리진 않겠죠.”

       “아~! 정장 입은 첫인상?”

         

       파스텔은 살짝 빨리 걸어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멜리사, 앨시어, 엘리를 돌아봤다.

         

       해맑은 미소가 나왔다.

         

       “친구들! 이제야 나와의 특별한 관계를 체감할 수 있겠지? 친구 랭킹에 오르는 수준이 돼야 파스텔의 진심을 맛보는 거라구.”

       “그거 공식화하는 건가요. 살짝 사감을 담자면 친구 관계에 랭킹을 메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땡! 땡! 땡! 랭킹 1위가 그런 말 하면 기만이야!”

         

       특히 심심풀이로 랭킹 언급해 줄 때마다 자기는 왜 항상 중위권이냐며 격분하는 레너드 같은 애가 화낼 거야.

         

       “어쨌든! 정장 입은 연기 톤 파스텔로 시작하지 않은 우리 친구들은 이 진실된 관계에 뿌듯함을 느낄 자격이 있어!”

         

       이것이 학창 시절에만 가능하다는 거짓 없는 친분 관계?

         

       박수! 박수!

         

       짝짝짝!

         

       “야호~!”

         

       파스텔은 혼자 박수 쳤다.

         

       “연기하지 않는 진실된 우리 관계!”

         

       연회장에서 본성과는 전혀 다른 흑막 연기를 열심히 한 불쌍한 파스텔을 보고 나니 바로 체감되지?

         

       묘한 시선이 왔다.

         

       오잉.

         

       멜리사가 대표로 살짝 민망해했다.

         

       “아무리 악명이 있다곤 해도 같이 지낸 시간이 있으니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연기를 잘하네요.”

         

       의심하는 건 아니라고 하기엔 앞에 붙은 변명 수식어가 너무 길지 않아?

         

       “난 믿어.”

         

       울상이 되려던 파스텔은 들려온 앨시어의 발언에 눈이 동그래졌다.

         

       역시 앨시어야!

         

       가끔은 멜리사보다 앞서는구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고마워!

         

       앨시어가 말을 덧붙였다.

         

       “연기 실력을.”

         

       으아아!

         

       “그런 걸 왜 믿어……!”

         

       파스텔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건 모두 정장 때문이야! 평소처럼 하늘하늘 흰색 옷차림을 했다면 분홍분홍 흰색흰색 효과로 진실된 마음이 느껴졌을 거라구우!”

         

       멜리사가 다소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그 발언 너무 크래프트답네요. 평소에 그런 걸 신경 쓰나요? 친구를 의심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의심받기 좋은 마음가짐은 객관적으로 자각하는 게 어떨까요.”

       “의심받기 좋은 게 아니라 의심받아도 싼 마음가짐이야.”

       “억울해애!”

         

       파스텔은 울상이 됐다.

         

       정장 괜히 입었어!

         

       애초에 분홍 머리에 정장은 악마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잖아!

         

       선량하고 위대한 파스텔 각하가 악마로 인식되는 건 피했어야 했는데!

         

       “아가씨.”

         

       하녀가 멜리사에게 다가가더니 말을 걸었다. 멜리사가 창밖으로 달을 올려봤다.

         

       “시간이 늦었네요.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푸른 눈동자가 다정하게 응시했다.

         

       “파스텔 당신도 이만 주무세요. 제가 말하긴 했지만 이런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말고요. 사람마다 개성이란 게 있잖아요. 개성 때문에 관계를 의심하진 않으니까요.”

         

       크게 신경 쓰지 마라.

         

       다르게 말하면 신경을 쓰긴 써라.

         

       으아아!

         

       “나도 이만 갈게.”

         

       멜리사와 앨시어가 떠났다.

         

       조용히 있던 엘리도 분위기 따라 스리슬쩍 몸을 돌렸다.

         

       “아, 엘리 잠깐만.”

         

       파스텔은 손을 뻗었다. 마족 소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할 얘기 있지 않아?”

         

       나도 모르던 왕녀니임?

         

       엘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악마님! 코코아 두 잔요! 밤이니까 코코아! 잠 잘 오는 코코아! 설탕 많은 코코아!”

         

       파스텔은 흥얼거렸다.

         

       악마가 잔을 들고 왔다. 하얀 액체가 찰랑였다.

         

       『밤이니까 설탕 없는 우유를 마셔라. 밤중에 설탕만 자꾸 먹으면 이가 상한다.』

         

       허억.

         

       코코아 친구 대신 우유 친구가 당도했어.

         

       파스텔은 의기소침하게 잔을 잡았다.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왔다.

         

       “정장 차림으로 우유 마시기.”

         

       도전~.

         

       꿀꺽.

         

       입가에 하얗게 우유가 묻었다. 혓바닥을 낼름해서 핥아먹었다.

         

       따듯한 우유에 몸도 정신도 편안해지는 게 밤중엔 코코아보다 좋은 듯?

         

       슬쩍 타 있는 마석 가루도 달달하구.

         

       “한잔 더!”

       『그 전에 외투부터 벗어라. 일하던 차림으로 계속 있으면 정신적 피로가 안 풀려.』

       “네에!”

         

       파스텔은 슝 벗어 건네줬다.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 됐다.

         

       “와아! 외투 벗고 나니 평소 패션 톤과 비슷한 색감!”

         

       이 정도면 벚꽃벚꽃은 아니라도 악마에서 직장인으로 이미지 체인지 한 거야!

         

       “그렇지, 엘리?”

         

       엘리가 어색해하며 잔을 매만졌다. 우유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평소와 비슷하긴 해.”

       “으에에? 그 발언 내가 평소에도 딱딱하다는 의미?”

         

       그렇게 받아들인 건가아.

         

       “그건 아니고, 그냥.”

         

       새 우유 잔을 받았다.

         

       파스텔은 악마님이 객실 창문을 단속하러 간 틈을 타 우유에 설탕을 듬뿍 넣었다.

         

       맛있는 건 백만 배~.

         

       티스푼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어떤 호칭으로 부르는 게 좋아? 엘리시타 왕녀님? 아니면 그냥 왕녀님? 혹은 위대한 왕녀 저하?”

       “마지막은 뭐야.”

         

       엘리가 다소 어이없어했다.

         

       “펑소처럼 불러줘.”

       “응응!”

         

       엘리는, 엘리는 왜 나를 속였을까요.

         

       직장 취업 시에는 과거 이력을 모두 적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요~.

         

       파스텔은 흥얼거렸다. 설탕을 다 녹인 티스푼이 이유 없이 우유를 저었다.

         

       엘리의 손이 어색하게 잔을 문질렀다.

         

       “속이려던 건 아니야.”

         

       머뭇거리는 정적이 흘렀다.

         

       “말할 수 없는 공무 때문에 서브 신분을 사용해 입학했는데 그게 여태 유지된 거지.”

       “응응! 그렇구나!”

         

       파스텔은 해맑게 웃었다.

         

       “나도 속은 건 아니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엘리의 뒷조사는 이미 해뒀거든!”

         

       엘리는 몰랐겠지만 학생회 산하가 아닌 별도 감찰부를 만든 이유는 엘리 때문이었어!

         

       세상엔 우연이 많고 나도 맨날 억울하지만…….

         

       우연이 아닐 때도 있는 거지!

         

       “어?”

         

       마족 소녀가 멍해졌다.

         

       “신원, 행적, 접촉 인물을 모두 검토한 결과 스파이 혐의는 의심되지만 테러 혐의까진 없음. 과격한 테러를 진행한 매파와는 별개의 비둘기파 인사로 추정.”

         

       티스푼이 놓였다.

         

       “침입한 이유는 정해진 나이대의 인재가 모이는 공간에서 마왕 후계자를 찾으려는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 증거로 학생 명부와 행적을 열람한 기록이 수상할 정도로 많았다.”

         

       참고로 이 열람 기록은 담당자인 엘리가 세밀하게 조작한 기록과는 다른 거야.

         

       맨날 종이비행기만 날리는 파스텔이 사실 안 놀며 모든 문서의 열람과 반입을 매일 확인하고 작성해 놓은 거거든!

         

       수족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상호기록과 검토는 보안 절차에 효과적이니까. 1학기부터 했던 거야!

         

       본래라면 보안 절차를 공개해 나쁜 마음 자체를 차단하는 게 맞겠지마안.

         

       이곳은 흉흉하고 무서운 검과 마법의 세상이라 나만 알고 함정을 만들어 봤어!

         

       “위대한 파스텔 각하라구~.”

         

       와이셔츠 차림의 소녀는 아하하 웃었다.

         

       “근데 설마 왕녀님인진 몰랐네!”

         

       감찰부는 레너드와 친구친구로 만든 사설 정보단체라 아직 깊은 정계까진 발이 안 닿거든.

         

       혹여 테러 혐의가 있어서 감금 절차부터 진행했다면 외교 사안으로 번질 뻔.

         

       아무리 학생 안전이 걸린 문제라 과격파 스파이였으면 곤란했다곤 해도 왕녀 신분은 조심스럽게 대우해야 하니까.

         

       사실 온건파 마족도 마왕을 추대한다는 점에서 제국 귀족으로서 경계해야겠지만…….

         

       내가 그 차기 마왕님이니까!

         

       안 어울리긴 해도 마왕 예정자예요~!

         

       에헴.

         

       “아?”

         

       마족 소녀가 멍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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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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