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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6

       

       

       

       

       

       116화. 순위전 ( 9 )

       

       

       

       

       

       ‘여기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이스칼은 눈을 떴다.

       부유감, 나른함, 물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끔찍한 고통이 가득했던 몸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얇게 뜬 눈 틈 사이로 빛이 아른거리며 비춰온다.

       머리의 바로 위가 수면인 걸까. 어쩐지 물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는다. 버클러를 차고 프리가 공녀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몰려오는 괴수떼에 맞서 싸웠다. 

       

       그를 덮쳐왔던 괴수의 해일. 날카로운 송곳니, 살점을 탐하는 아가리와 폐를 찢어발기는 발톱. 마지막까지 죽을힘을 다해 괴수의 아가리를 찢었던 것이 기억난다.

       

       

       ‘죽은 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예상했다. 각오했던 일이고, 충분히 알 수 있었던 미래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진정 죽음이 두려웠다면, 진작에 뒤돌아 도망쳤을 테지.

       

       허나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못내 아쉬운 미련들이 이스칼의 마음 한 켠을 괴롭혔다. 

       

       부그르르- 

       

       공기 방울이 올라가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스칼은 가만히 누워서 그의 마음을 관조했다.

       

       깊고 조용하게.

       스스로의 마음에 묻고, 마음이 대답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무엇이 그리 아쉬운가.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공녀님은 살았을지도 몰라.’

       

       미련하고 우둔한, 어리석은 만약의 희망.

       

       ‘…그렇겠지.’

       

       

       이스칼은 쓰게 웃음 지었다. 결국에는 이 모양이다. 

       

       그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공녀님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자신은 괴수떼와 맞서 싸우다가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

       

       부그르르-

       

       헤엄치는 공기 방울이 속삭인다.

       

       

       《수호자야, 미숙하고 어설픈 수호자야.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방패 뒤에 있는 것들의 무게를 아는가?》

       

       

       감히 이스칼이 어떻게 말하겠는가. 죽어가는 동료의 무게도 한없이 무거웠다.

       

       모든 창자가 흘러내려 몸이 텅 비어도, 뜨거운 피를 한가득 흘려 핏줄이 메말라도.

       이스칼은 죽어가는 동료의 무게만으로도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서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방패 뒤에 있는 것들의 무게는 그가 재단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무거울 뿐입니다.”

       

       

       그것들은 한없이 무겁고 또 무거우니, 이스칼은 그저 묵묵히 버티는 수밖에.

       

       

       《방패를 들고 드높은 벽이 되어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들을 수호하라.》

       

       《하늘을 찌르는 산도 가장 작은 아이보다 가벼우리라. 깊고 깊은 바다도 나이 많은 노인보다 얕으리라.》

       

       《이스칼. 그대는 가장 무겁고 감히 재단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방패를 들어야 하니.》

       

       《그대는 뒤에 있는 것들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방패를 든다는 것의 의미를. 동료들의 앞에 선다는 것의 무게를. 그의 방패 뒤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허나 너무나 늦었다.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 깨달아버렸다.

       

       

       “너무 늦었습니다… 모든 게 끝났어요. 저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푸그르르ㅡ

       

       다시금 공기 방울이 이스칼을 간지럽히며 올라갔다. 기분 탓인지 공기 방울 속에서 여자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대는 눈을 가린 안개를 걷어내고, 눈을 뜨라.》

       

       “…예?”

       

       《시련은 여기까지다.》

       

       “시…련이요?”

       

       《아직 그대에게 이곳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스칼, 그대는ㅡ》

       

       푸그르릅ㅡ!

       

       “우와악!”

       

       

       강력한 힘이 이스칼의 몸을 어디론가 빨아들였다. 아니, 뱉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팔다리를 정신없이 휘저었다.

       

       공기 방울이 이스칼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쩌면 그의 영혼을 통해 속삭였을지도.

       

       

       《합격이다.》

       

       

       이스칼, 수호의 시련.

       

       통과.

       

       

       

       

       

              * * * * *

       

       

       

       

       

       “…”

       

       “…”

       

       

       관중들은 침묵을 지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무수한 괴물에 홀로 맞서 싸운 이스칼.

       그의 치열하고 장렬한 전투.

       그리고 최후의 전투에서 그를 덮친 괴수의 해일.

       

       홀로 서 있는 이스칼을 덮쳐오는 괴수들을 끝으로 거울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뒷내용을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이스칼은 마지막 숨을 뱉는 그 순간까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으리라.

       

       죽어가는 동료를 위해, 몰려오는 죽음을 향해 싸우는 이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그들은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이 얇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깨져서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공녀님.”

       

       “…”

       

       

       프리가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스칼을 바라봤다. 케니스가 조심스레 불러봤지만 듣지 못한 것인지 대답하지 않으려는 건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투장 한 가운데에 고요하게 누워있는 이스칼.

       

       프리가는 그를 바라봤다.

       

       

       ‘저 녀석…’

       

       

       의외였다. 방패술이 기가 막힌 녀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대련하면서 감탄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녀석은 맹탕이었다. 먼저 나서서 싸우지도 않고 시켜야 앞으로 나와서 방패를 든다. 싸움을 두려워하고 다치는 것을 싫어한다.

       

       프리가가 싫어하는 전형적인 겁쟁이의 모습. 그것이 이스칼이었다.

       

       

       “하!”

       

       

       그런데 방금 저 거울에서 나온 모습은 뭐란 말인가. 신이라는 작자가 제대로 보여줬다면, 저것은 아마 이스칼이 겪은 시련을 비추는 것일 터. 

       

       치열한 전장에서 이스칼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었다. 누군가 시키는 이도 없었는데, 자진해서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것도 죽어가는 그녀를 위해서!

       

       프리가의 입꼬리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뭘까 이 기분은? 

       

       호승심? 그것보다는 좀 더 차분하다.

       승부욕? 진다고 해도 분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고양감? 그렇게 붕 뜨는 기분은 아니다.

       

       

       ‘도대체 뭘까…’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며 옥좌를 흘겨본 프리가는 씩 웃었다.

       

       그녀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으로 나온 것은 상당히 괘씸했지만, 꽤 좋는 걸 봤으니 뭐.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 만했다.

       

       움찔-

       

       누워있던 이스칼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부스스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다.

       

       

       “으음. 아….? 나, 나는 분명…? 어어ㅡ?”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흐리멍텅한 표정을 보니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는 모양. 프리가는 피식 웃었다.

       

       

       “야!”

       

       차악-!

       

       냅다 달려가서 이스칼의 등짝을 시원하게 한 대 후려친다. 시원한 소리가 결투장에 울렸다. 

       

       

       “끄하아악!! 으악!! 어, 으어 공녀님?! 어떻게? 분명 피를 막 흘리면서… 어?”

       

       “이 새끼 이거, 어? 내가 죽은 게 그렇게나 충격이었냐? 어?”

       

       “예? 아니, 아니! 잠깐! 지금 그러니까…”

       

       

       이스칼이 차근차근 상황을 파악해나간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프리가, 흠집 하나 없는 그의 방패, 여기는 결투장이고 자신은 분명 시련을 치르던 중에…

       

       

       “전부… 전부 꿈이었던…?”

       

       

       이스칼이 떨리는 눈으로 프리가를 바라봤다.

       멍청한 눈빛.

       

       어쩐지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기분에 프리가는 한 번 더 이스칼의 등짝을 후려쳤다.

       

       차아악-!

       

       “끄하악!! 왜, 왜 때리십니까!”

       

       “야, 내가 너 때릴 때 이유가 있어야 돼? 그냥 때리고 싶게 생겼어 너는.”

       

       

       이스칼은 등을 만지다가 멍하니 프리가를 바라봤다.

       

       저 터무니없는 대답. 진짜 프리가 공녀다.

       

       

       “진짜… 진짜 공녀님이시군요!! 공녀님!!”

       

       와락!

       

       이스칼은 프리가를 덥석 껴안았다. 대담한 이스칼의 행동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죽어가는 연인을 위해 파멸적인 괴수떼와 맞서 싸우다가, 죽음에서 돌아온 전사의 이야기! 이 얼마나 뜨겁고 정열적인 사랑인지, 관중들 사이에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휘ㅡ휘익!

       

       “와ㅡ!! 이스칼! 이스칼! 이스칼!!”

       

       “수호자 이스칼! 그는 진정한 수호자인가?!”

       

       “엄마!! 나는 커서 방패병이 될래요!!”

       

       

       이스칼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프리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흰 눈이 쌓인 설원에 붉은 꽃망울이 수줍게 피어나듯이.

       

       화아악-

       

       “너, 너 임마!!”

       

       “우와아악!”

       

       

       강하게 이스칼을 밀쳐낸 프리가. 도리어 밀쳐놓고서는 그녀가 당황했다. 뭐지? 뭐였지?

       

       따뜻하게 열이 오른 두 뺨을 손으로 가린 프리가가 이스칼에게 외쳤다.

       

       

       “너, 너너너 이 새끼!!! 아직 한참 일러!! 알아?!”

       

       “예? 아니, 공녀님? 예?”

       

       

       프리가는 쏜살같이 달려 결투장을 빠져나갔다. 흙먼지가 꼬리처럼 남아 그 흔적만을 남겼다. 혼자 남은 이스칼은 어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휘이익ㅡ!

       

       “이스칼! 이스칼! 이스칼!! 이스칼!!”

       

       “멋있다아ㅡ!! 휘익ㅡ!!”

       

       “잘생겨 보여요!! 오빠아악ㅡ!!”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환호하고 있다. 결투장을 쭉 둘러본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 키가 큰 청년, 미망인, 딸과 온 아빠, 사이좋은 노부부… 그들 모두가 보인다. 

       

       그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스칼이 짊어지고 견뎌야 할 무게.

       

       이스칼은 새삼 그들의 환호성이 자신을 조금 짓누르고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뒤에는 그의 이름을 외치는 저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밑 바닥에 기생하는 악마, 꿈틀거리며 심연의 바닥을 기어다니는 괴물들, 어둠의 저편에 도사리는 삿된 것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이스칼이 방패를 들어야 한다.

       가장 무겁고 감히 재단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꾸욱ㅡ

       

       손에 든 방패의 무게가 조금 더 늘어났다고 느꼈다. 아마 착각이겠지만…

       

       견딜만했다. 무게가 조금 늘어난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버티는 것에는 자신 있었다.

       

       처억-!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린다. 수호자의 방패가 태양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났다. 

       

       와아아아ㅡ!!!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이스칼은 씩 웃어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그의 이름을 외치는 환호성은 짜릿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댓글은 작가의 마음을 춤추게 합니다!!

    – ‘Drive’님!!! 1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여백의 미라고 하던가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과 응원의 글로 가득한 것이 저에게는 보입니다!! 마치 어린왕자의 염소처럼!! 저도 사랑합니다!!!

    – ‘후루루’님!!! 225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우선 그랜절부터 박고 시작하겠습니다!!! 저도 집에 가서 열심히 글을 두들겼지만… 작가의 능이버섯화에 따른 이슈와 퀄리티의 하락…!!!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도 매일 2연참 하고 싶어요…ㅠ

    – ‘신선우’님!! 4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성녀의 응?원?? 은 저도 잘 몰???루??? 아니, 진짜로 몰루요… 그런 망측한 응원이라뇻!!

    – ‘갓승’님!! 1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고 노력해서, 더욱 재밌는 글로 독자님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글쟁이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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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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