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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6

       마치 심연이 귀를 기울인 듯 정적과 긴장으로 가득한 전장의 한복판.

         

       프란체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구체에서 새까만 어둠이 힘차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슈와악─!

         

       곳곳에 생겨난 그림자의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올라오더니, 이내 마수들의 형태로 변모해 지면에 발을 디뎠다.

         

       시커먼 안개를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수들.

         

       “공녀님, 이건?”

       “그 마법서에서 배운 거란다.”

         

       사령 마법. 게임의 보스로 등장했던 프란체가 잘 사용하던 거다. 게임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이걸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지금부터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딱! 프란체가 손가락을 튕기자 멈춰있던 흑색의 마수들이 움직였다.

         

       -키에에엑!

       -크라라락!

       -우어어!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검은 안개를 흩뿌리며 달려드는 프란체의 병사들과 마수들이 격돌한다.

         

       쾅! 우직! 콰득!

         

       날고기처럼 생생한 야생의 싸움. 서로 맹렬하게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 펼쳐졌다.

         

       난장판이다 못해 개판이었다.

         

       마수 병사들이 죽어 어둠으로 되돌아가 줄어든 숫자는 다른 마수들의 사체를 다시 일으키면 그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전투 방식이군.”

       “저는 좀 소름 끼치네요…….”

         

       어깨를 부르르 떠는 라데아와 헛웃음을 지으며 이 광경을 바라보는 케일.

         

       나 같은 초월자에겐 별거 아닌 능력이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면 압도적인 힘이다.

         

       혼자 군단을 거느리는 거잖나.

         

       “깨어나렴.”

         

       프란체는 쉴 틈 없이 마력으로 마수들의 사체를 집어삼켰다. 계속해서 충당되는 마수 병사들이 광견처럼 달려들어 쉬지 않고 싸움을 이어나간다.

         

       재앙의 파도에서 쏟아져 나온 마수들은 프란체의 병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가?”

         

       케일이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물었다. 할 게 없어서 심심해 보인다.

         

       “아니, 이제 내가 보여줄 건 보여줬으니 빨리 정리하자. 이건 어디까지나 저들에게 내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니까.”

         

       그제야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케일. 라데아도 곧장 칼자루를 고쳐잡았다.

         

       “다들 검을 들어!”

       “네!”

       “그러지.”

         

       파지지직─!

         

       케일의 오러가 해방되며 전류가 폭발했다. 쾅─! 그대로 진각을 밟아 전방으로 쇄도하며 마수들을 베어낸다.

         

       “하압!”

         

       기합 찬 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라데아. 마치 명망 높은 화가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아름다운 검격이었다.

         

       “진? 이제 힘 조절할 필요 없단다.”

       “예.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나는 검날을 세우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일단 지면에 오러를 처박아서 일대를 날려버리는 건 안 되고.

         

       ‘그냥 평범하게 검격으로 해치우는 수밖에 없나.’

         

       나는 고개를 돌려 프란체에게 물었다.

         

       “공녀님, 호위는 필요 없으시죠?”

       “그래. 혼자서도 몸은 지킬 수 있단다.”

         

       우리가 죽인 마수들을 또 소환하면 되니까 병력에는 문제없겠고.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목청에 오러를 담아 케일과 라데아를 향해서 크게 소리쳤다.

         

       “케일, 라데아! 지금부터 공녀님의 호위를 멈추고 마수를 베어내는 거에만 집중해라!”

         

       케일과 라데아 또한 목청에 오러를 담아 대답했다.

         

       “알겠다!”

       “네!”

         

       기합 좋고.

         

       ‘이제 시작할까.’

         

       지척에서 빈틈없이 쏟아지는 마수들의 중앙에서 검을 높게 들었다. 이대로 오러를 모은다.

         

       우웅…!

         

       들숨과 함께 전신의 오러를 해방한다. 혈류가 세차게 돌며 몸이 가열되고,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온다.

         

       우우웅─!

         

       거대한 진동과 함께 중압감이 생기며 주변 마수들이 짓눌리고, 푸른 오러가 일렁이며 초신성처럼 빛났다.

         

       “흐읍!”

         

       콰과과과──!

         

       굉음이 터지며 오러를 담은 검격이 폭풍처럼 몰려가 닿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킨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평야 너머에 존재하던 수천의 마수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끝나겠네.’

         

       그간 전선을 유지하며 마수를 상대했던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위력.

         

       ‘이래서 국가를 상대로 견제할 수 있는 괴물, 초월자겠지.’

         

       뭐, 아무튼.

         

       그간 준비했던 계획과 일은 끝났으니 빨리 정리해야지.

         

         

       * * *

         

         

       데카르트 전선 최후방의 지휘관 막사.

         

       프란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앙의 파도를 정리하는데 하루면 충분했네. 처음부터 내가 지휘할 걸 그랬어.”

         

       거만한 태도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 그녀에겐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에서 등장한 영웅이었으니.

         

       “공녀님을 의심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기사단장이 허리를 푹 숙이며 깍듯이 사죄를 구했다. 저래도 일자리는 잃을 텐데.

         

       “그러니? 예전에도 이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기사단장?”

         

       고개를 들기는커녕 숙였던 허리도 일으키지 못하는 기사단장.

         

       “너희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차별하고, 얕잡아봤던 내가 데카르트 전선을 지켜냈구나.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않니?”

       

       프란체는 픽 웃으며 부채로 허리 숙인 기사단장의 정수리를 콕콕 찔렀다.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뻣뻣이 들고 기사단장을 굽어보는 프란체.

         

       ‘그러게 양심은 챙기면서 살았어야지.’

         

       데카르트의 일원부터 시작해 사용인과 기사단까지. 그 누구도 그간 프란체를 존중하기는커녕 무시까지 했다.

         

       공작가의 막내딸, 공녀님인데도 말이다.

         

       ‘다 업보로 돌아오는 거야.’

         

       프란체는 부채로 허리 숙인 기사단장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돌아갈 거야. 뒷정리는 맡겨도 되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전선을 정비하고 남은 잔챙이들은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목소리에 불안함이 가득한 기사단장. 프란체는 고개를 주억이며 부채를 거뒀다.

         

       “그래, 그럼 뒷정리는 맡길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탓인 거 알지? 너는 나를 무시했던 기사단장이잖아.”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취하기 위해 결박하는 것처럼 가슴을 옥죄여오는 압박감. 기사단장의 앞머리 끝에서 식은땀이 떨어졌다.

         

       “데카르트 공작가의 위신이 달린 문제니까… 책임은 목숨이겠네…?”

         

       기사단장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대답이 없구나.”

       “예, 예!”

       “맡겨도 되지?”

       “맡겨만 주십시오!”

         

       기합이 들어간 대답. 그러나 프란체는 여기서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라, 근데 이상하네? 분명 혹한의 망령이라는 설화 속의 마수가 등장해서 후퇴한 다음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그랬는데…?”

         

       잔인하다. 나조차도 입안이 마를 정도로.

         

       “그 혹한의 망령이 다시 출몰하면 어쩌려고 맡겨만 달라는 거지? 데카르트 공작가의 위신이 가벼워 보이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야?”

         

       무섭다. 원래 프란체가 이런 걸 잘했나? 아니면 이때를 위해서 나 몰래 연습했나? 분위기가 삼엄하다…….

         

       “아, 아닙니다! 시정 하겠습니다!”

       “시정? 어떻게 하려고? 들어나 보자.”

         

       프란체는 부채로 기사단장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것이… 일단 정찰병을 풀어 동태를 살피고… 문제가 있다면…….”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문제가 있다면?”하고 되묻는 프란체.

         

       “그, 그것이…….”

       “우리가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맞습니다…….”

       “정말 무능하네.”

         

       하아,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란체.

         

       “어쩔 수 없겠구나. 멍청하고 무능한 기사단장을 대신해서 내가 계속 살피고 있는 수밖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뜬금없이 부단장에게 간 질문.

         

       “그, 그것이…….”

         

       눈동자를 굴려 허리 숙인 기사단장을 힐끔 바라본다.

         

       “응? 기사단장의 눈치를 보는 거니? 내 말은 무시하고?”

         

       와, 이건 좀 쉽지 않은데.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나는 조용히 프란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희열, 후련함, 카타르시스, 비웃음이 섞여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자, 부단장. 빨리 말 해봐. 멍청하고 무능한 기사단장을 대신해 내가 전선을 지켜봐야겠지?”

         

       바짝 경직된 상태로 침을 꿀꺽 삼키는 부단장.

         

       “마, 맞습니다…!”

         

       푸훗, 프란체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너와 몇 년을 동고동락한 기사단장을 무시한 거야? 웃기네.”

         

       보는 나까지 멘탈이 흔들린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걸까.

         

       “됐어. 너희 둘 다 직위 해임이니까. 이만 돌아가렴.”

         

       기사단장이 허리를 번쩍 일으켜 프란체를 바라봤다. 휘둥그레진 눈. 옆에 있던 부단장도 다른 바 없었다.

         

       “고, 공녀님! 해임이라니요!”

       “저희는…!”

         

       프란체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의 말을 끊었다.

         

       “너희들이 한 행동을 알려줄까? 그간 나를 무시했으니 대귀족 모욕죄가 있고, 내가 지휘권을 갖는다니까 반발했으니 상관 명령 불복종에, 직무수행능력 부족까지.”

         

       명예가 있는 기사에게 있어 치명적인 삼신기다.

         

       “이런 이유로 해임되었으니 기사 작위가 몰수될 수도 있겠네. 나는 그래도 마음이 넓으니 작위 몰수까진 하지 않을게. 다만, 다시는 누군가의 기사로 선임되지 못하겠지?”

         

       기사단장과 부단장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입술을 머금었다. 당장이라도 울분을 토하고 싶은 얼굴이다.

         

       “그래도 검은 잘 쓰니 용병으로 살아가면 되겠구나. 내 호위기사도 용병 출신이라 길드는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어떠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부들부들 떠는 기사단장과 부단장.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

         

       저들은 기사들이 프란체를 모욕하고 무시할 때, 제지하기는커녕 동조하고 방관했던 쓰레기들이다.

         

       다른 두 이유는 내가 에덴 쥐어패느라 보지 못 했으니 모르겠다마는.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사단장과 부단장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나가려던 찰나.

         

       “아, 갑옷과 말은 반납하렴.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공작가의 재산이니까.”

         

       막타까지 쳐버렸다.

         

       “…….”

       “…….”

         

       그들의 눈빛에 지금 심정이 담겨있다. 당혹감, 불안감, 원망, 절망. 참으로 다채로운 감정이다.

         

       “이제 나가보렴.”

         

       그제야 프란체의 얘기가 끝나고 기사단장과 부단장이 나갔다.

         

       “후아, 속 시원하네.”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팔을 쭉 뻗으며 상쾌함을 내뿜는 프란체. 나는 픽 웃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뭐가?”

       “보고 있던 제가 다 떨리더군요.”

       “아아 그거?”

         

       프란체는 피식 웃었다.

         

       “항상 생각했거든. 내가 만약에 복수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하고.”

         

       오랜 시간 외로이 반복되어 숙련된 갈구기였던 건가. 어쩐지 심상치 않더라. 라데아가 물었다.

         

       “그런데 저러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가요? 북부에서 갑옷이랑 말도 뺏긴 거면…….”

         

       거, 쓸데없는 걱정을 하네.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래. 저런 대답이 나와야지.

         

       “아…….”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라데아. 하긴, 쟤는 프란체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까.

         

       ‘나중에 알려줘야지.’

         

       괜히 프란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한 악덕 사장으로 보이면 곤란하잖나.

         

       “아무튼, 황실과 페르시아의 소식이 들려올 때까진 적당히 자리만 지키고 있자. 다들 하고 싶은 거 하러 가도 좋아.”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라데아와 케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오랜만에 눈밭에서 굴러다녀야지.”

       “찝찝했는데 잘 됐군. 검날을 다듬어야겠어.”

         

       그리 말하곤 신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데카르트의 주인이 되는 일만 남았네.”

       “맞습니다. 돌아가서 할 일이 더 있긴 하지만요.”

         

       여정의 끝이 다가와 후련한 얼굴의 프란체와는 달리,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정말 우리의 이야기에 마침표가 찍힐 시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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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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