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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6

     [통일력 97년 3월 1일, 오전 7시. 오로솔 아카데미 대강당 ‘태양의 홀’ 대기실.]

     “빨리빨리 움직여! 동선 확인 한 번 더 하고!”

     “식순 제대로 맞는지 확인해! 조금이라도 틀리면 우리 다 죽어!”

     아카데미 교직원 제복,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람을 한 명 세워놓고 강제로 움직이게 하고, 대관식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주변에 직원들이 따라다닌다.

     “하.”

     대기실에서 대강당의 중앙홀, 연단을 바라보는 흑발의 여인- 카르멘 모르가니아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일찍 자라고 했건만.”

     “어떻게 일찍 자나요. 이런 날에.”

     카르멘 왕비의 뒤, 백금의 예복을 입은 노인-윈체스터 대공이 껄껄 웃으며 카르멘 왕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대공.”

     “괜찮소. 요즘 캐롤라인 덕분에 마나는 차고 넘치거든.”

     “활력도 차고 넘치시는 게 아니고요?”

     “크흠.”

     사아아.

     윈체스터 대공의 어깨에서 흘러 내려온 하얀 마력이 카르멘 왕비의 몸에 스며들었다.

     “후우우….”

     카르멘 왕비는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숨을 골랐다.

     

     “이거, 확실히 중독될 것 같기는 하네요. 마스터들은 다 이런 체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마나의 축복인 셈이지요, 왕비.”

     “마나의 축복이라….”

     카르멘 왕비는 탁자에 놓인 포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응? 그거까지 마시려고? 싫어하지 않았소?”

     “하나 마실 때마다 아들한테 용돈 주는 셈이니 자주 마셔야죠. 그 여자는 싫지만.”

     “허허….”

     겉에 ‘캐롤라인’이라는 문구가 화려하게 박힌 포션을 카르멘 왕비는 단숨에 들이켰다.

     “하아아. 입학식이 끝나면 왕궁으로 돌아가서 한숨 자야겠어요. 입학식 때문에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웠는지.”

     “탈락자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지.”

     “대공께서 물리적으로 쫓아내 주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원로원 앞에서 드러누워 있었을걸요?”

     캐롤라인 포션을 쭉 들이킨 카르멘 왕비는 책상 옆에 놓여있는 양피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귀족이라고 다 입학하는 것도 아니고, 영웅의 후손이라고 오로솔에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오로솔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오직, 실력.”

     “네. 실력. 그리고 시대를 보는 눈.”

     카르멘 왕비는 명단의 옆, 또다른 명단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미 1년도 전에 ‘제국어’가 시험 과목 중의 하나가 될 거라고 공표했는데도 불구하고, 제국어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은 멍청이들을 입학시킬 수는 없죠.”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설마 제국어만 과락했다고, 자기네가 탈락할 거라고는.”

     균형 선발 200명.

     연령 제한이 없었기에 생각 이상으로 시험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예상외의 변수-예정된 변수로 탈락한 이들이 정말 많았다.

     “아가리트 백작이 그러더군. 자기 장남이 5과목에서 400점을 맞았는데, 제국어 0점으로 과락 탈락이 말이 되냐고.”

     “제국어는 10살짜리 아이가 제국어 기초책 1년만 공부해도 풀 수 있을 만큼 기초였어요. 미리 책도 제국을 통해 받아서 배부하기도 했고.”

     “제국어 따위를 익힐 수 없다는 노스트럼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은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오?”

     “직접 탈락시키고 도장까지 찍으신 분이 무슨 말씀을.”

     “하하. 그렇지요. 그래서 내가 직접 손수 손을 봐주기는 했지.”

     제국 유학생 단 10명.

     왕도의 변두리라고는 하지만 그 어떤 아카데미보다 가장 크고 웅장하며 화려한 곳에서, 제국어를 모른다고 입학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왕국은 땅만 제공하고 제국이 땅 사들이고 기초부터 다 세웠는데. 쯧쯧. 결국에는 조 단위로 돈이 들어갔다고 해야 말이 쏙 들어가지.”

     “그렇죠. 초기 자본만 수천억이었는데도…하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소리지만, 탈락자들은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됐어요. 아쉬우면 내년에 또 시험 보라고 하죠. 그런 자들의 말 따위에 신경 쓰는 건 시간 낭비니까.”

     “그 또한, 여론이오.”

     “대세는 아니죠. 지금 대세는 왕국내….”

     “친제국파. 혹은 제국주의자.”

     모르가니아의 두 부녀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세이레네 백작은 이미 제국이 보내주는 따뜻한 꿀물 덕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더군.”

     “그래요? 요즘 왕도에서는 지브롤터 욕하는 게 아닌가 다들 말이 많던데.”

     “지브롤터를? 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지브롤터만큼은 이 아카데미에 후계자를 보내선 안 되는 거 아니었느냐.”

     “하ㅡ하ㅡ하ㅡ!!”

     윈체스터 대공의 웃음은 대기실은 물론이거니와, 대강당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쥐새끼들이 어딜 감히!”

     “어머나. 모르가니아 욕하는 것보다 지브롤터 욕하는 거에 더 크게 반응하시는 건가요?”

     “그야 당연하지. 이전의 지브롤터라면 모를까, 지금은 다르지 않소.”

     윈체스터 대공이 씩 미소를 지으며 카르멘 왕비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요즘 영상 마석으로 백작과 그렇게 자주 연락을 한다고?”

     “아, 아이들의 대모가 되어주기로 했을 뿐이에요.”

     “그런 것 치고는 그 여자에 관해서도 나름 불만이 줄어들지 않았소?”

     “…줄어들었다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받아들인 거죠.”

     카르멘 왕비는 비어있는 캐롤라인 병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어렸을 때, 가슴만 좀 컸어도.”

     “…크흠.”

     “됐어요. 이런 게 있는 줄 알았다면 미리 만들지 못한 제 잘못이지.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그야 그렇기도 하지만.”

     윈체스터 대공은 당당히 어깨는 물론이거니와, 흉부를 드러낸 카르멘 왕비의 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뭐, 좋을 대로 하시오.”

     “당연하죠. 아들딸이 17살인데, 왕비가 이런 드레스 정도는 입어줘야 품격이 살잖아요.”

     

     카르멘 왕비가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자기 명치 위, 살짝 드리운 골을 쓱 쓸었다.

     “어떤가요, 아버지. 이 정도면 어머니보다는 좀 더 커졌나요?”

     “…새삼, 이런 걸 만든 손자놈이 대단하다는 생각만 드는군.”

     윈체스터 대공은 비어있는 캐롤라인 병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피로회복제라는 물건이 부작용 덕분에 더 잘 팔리게 될 줄이야. 이것 참.”

     “좋은 손자 둔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사실…후후, 본인이 스스로 손자랑 아들이 되기로 한 거지만.”

     카르멘 왕비는 대기실 유리창 너머, 벽에 걸리는 깃발을 가리켰다.

     “요즘은 샤를로트가 제 남편을 빼앗아 간 것뿐만 아니라, 제 아들까지 빼앗아 간 것 같아서 더 질투가 나는 거 있죠. 간혹, 꿈을 꾸죠.”

     협곡의 수호자를 상징하는 지브롤터의 깃발.

     “크림슨이 제 남편이고, 그레이가 제 아들이고. 저는 지브롤터 백작 부인이 되는 꿈.”

     “……카르멘 왕비. 미안하지만-”

     “알아요. 그렇게 되었다면 무조건 샤를로트가 왕비가 되었을 거고, 음….”

     카르멘 왕비는 볼을 긁적이며 옅게 웃었다.

     “누아르 지오 노스트럼. 걔가 왕자가 되었겠네요. 나리아는 무조건 제 딸이니까.”

     “…….”

     “쌍둥이로 그레이랑 나리아가 지브롤터에서 태어나고, 누아르가 샤를로트의 아들로 태어난다. 음, 나라 망하기 딱 좋긴 한데.”

     “가르치면, 해결될 일이지.”

     “네. 가르치면.”

     카르멘 왕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려고 허가하고 세운 아카데미니까, 부디 아카데미가 미래를 잘 끌어나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니.”

     카르멘 왕비가 드레스를 양옆으로 잡고 예를 갖췄다.

     “잘 부탁드립니다. 윈체스터 총장님.”

     “아아. 물론.”

     이틀 전.

     윈체스터 모르가니아 대공, 재상의 자리에서 하야.

     하루 전.

     윈체스터 모르가니아 대공, 오로솔 아카데미 총장 취임.

     * * *

     어떠한 행사든, 행사를 주관하는 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포인트는 저마다 다르다.

     행사를 즐기는 이들은 행사가 잘 진행되기를 바라며.

     행사를 후원하는 이들은 행사로 막대한 이익을 얻기를 바라며.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행사가 어떤 사고도 없이 안전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로솔 아카데미의 개교 및 입학식은 근 30년 이내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자 위험한 날이 될 수도 있다.

     “새삼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카데미 정문으로 들어가는 마차의 안.

     “제국 황태자가 이렇게 제국의 중역들과 함께 마차에 탄 채, 왕국민들의 구경거리가 될 줄이야.”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황태자는 아카데미 입구로 들어가는 길의 좌우로 늘어선 시민들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구경거리죠. 잘생긴 얼굴을 왕국 여자들에게 보여줘야 다들 황태자 지지하고 그럴 거 아닙니까.”

     황태자의 맞은편에 앉은 정장의 거한, 클레이돌 후작이 마차 밖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답했다.

     “얼굴만 잘생겼다면 무능왕은?”

     “발언을 철회하겠습니다.”

     창에 가려 얼굴만 보일 뿐. 

     마차 내부의 대화는 밖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전하. 따님은 만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다섯 명 중에 누구?”

     “…’황녀’님은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아직은, 황손녀.”

     클레이돌 후작의 옆, 백발적안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비꼬듯 중얼거렸다.

     “우리 후작님, 머리카락 날아갈 때부터 지능도 날아가셨나 봐?”

     “어이. 마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게냐. 응?”

     “어머. 살기 좀 봐. 나 지금 완전 바보가 되어서 당신이 주먹질만 하면 죽어버리거든? 마나 좀 거두어 줄래?”

     “바토리. 빈정거리지 마라.”

     “네이, 네이.”

     백발적안의 마녀, 바토리는 황태자의 중재에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벗겨진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황태자님. 혹시 황제께서 벗겨지셔서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지? 두려운 거야?”

     “설마.”

     “흐흥…. 아, 그래. 모처럼 나 여기에 지내는 김에, 연구 한 번 해봐도 돼?”

     마녀 바토리가 손을 뻗어, 클레이돌 후작의 머리 위에 찰싹 손을 올렸다.

     “너 이…!”

     “머리가 자라는 약!”

     “…….”

     “왜. 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개발만 할 수 있으면 천만금을 주고도 사들이겠다는 사람들 많을걸?”

     “……한 번은 봐주마.”

     클레이돌 후작은 바토리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그래도 괜히 이상한 거 연구하다가 정체 들키거나 하지 마라. 너 죽거나 발각되면 나도, 그리고 전하도 곤란해진다.”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여기 오려고 욕조에 몸 담근 게 3개월이에요, 이 사람아.”

     바토리는 입을 활짝 열며, 두 검지로 입꼬리를 들었다.

     “짠. 어때?”

     “그렇게 웃지 마라. 괜히 네 실체를 모르는 애꿎은 왕국 청년 홀려서 푹 빠져버리거나 하면 어쩌려고?”

     “그러면 영계 잡고 노는 거지.”

     “하….”

     “뭐. 왜. 황태자님도 괜찮다고 하셨거든? 그렇죠, 전하?”

     “아무렴.”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수백 년 동안 독수공방하신 처녀께서 영계 좀 먹어보시겠다는데, 아무렴….”

     “어머나, 무슨 말씀이실까…?”

     바토리의 미소가 짙어진다.

     “저는 올해로 32살인 아카데미 부총장 겸 연금술 교수, 바토리 에르제베트인데요오…?”

     “본인이 다른 건 몰라도, 할 말은 하는 인간이라서.”

     “그래서, 하실 말씀은?”

     “혹시 피를 빼면서 앞에 숫자 하나만 빼먹은 게 아니라, 양심도 같이 빼먹으셨나?”

     “…….”

     클레이돌 후작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왕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입학식.

     제국 내빈.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제국 황태자.

     바르바토스 클레이돌, 제국 후작.

     부총장.

     바토리 에르제베트.

      * * *

     “…장님. 정장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아. 가도록 하지. 로버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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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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