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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6

   EP.116

     

   처음으로 본 광경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다.

     

   흙바닥이 완전히 뒤집어져 적당히 디딜 곳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땅이라든가, 깊게 파인 구덩이에 고꾸라져 꿈틀거리는 플레이어라든가.

     

   그나마 빠르게 기절을 한 사람들은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문제라면 끝까지 놈에게 저항하며 싸웠던 몇몇 소수의 정예 플레이어들.

   청린이나 랜든 같은 플레이어나 박조철 같은 책임감이 강한 스타일의 경우에는 어디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반쯤 시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중상을 입은 경우가 많아 보였다.

     

   “……”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격정적인 감정이 차올랐다.

     

   이것을 분노라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서로 등을 맞대고 함께 사선을 헤치던 동료의 초주검 상태를 보는 것은 잔잔하던 감정의 호수에 꽤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호오…… 조금 전 그 기운은 네놈의 것이었구나.

     

   하지만 조금 전 크레센도에게 마력을 방출한 마왕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낄 뿐.

     

   “너냐?”

     

   그리고 그런 놈을 바라본 나의 내면에 또 다른 동요가 일어났다.

     

   -무슨 말이지?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게 너냐는 말이야.”

     

   나의 물음에 놈이 오히려 반문하며 씨익 웃음을 흘린다.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의 답변.

   하지만 그 애매한 응답은 지금 이 상황을 직면한 나에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확한 답변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답이 되었는가?

   “그래. 충분하군.”

     

   놈이 크레센도가 추락하며 만들어진 구덩이를 슬금슬금 빠져나온다.

   마력의 컨트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공중에 반쯤 떠서 미끄러지듯 나오는 마왕의 신형.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토끼가 나의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게 마왕이에요?”

   “본 적 있지 않아?”

   “봤었죠… 봤고말고요. 근데 저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때도 강하기는 했지만 저런 괴물은 아니었다고요!”

     

   토끼가 말하는 모습이라는 것이 외형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사용한 ‘괴물’이라는 표현은 바로 마왕이 가지고 있는 격.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적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지고한 격이 놈에게서 느껴졌고,

   튜토리얼에서 성좌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느껴본 결과, 지금 놈은 그들과 딱히 뒤처지지 않을 거대한 기운을 몸 안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다.

     

   ‘성좌와 비슷한 수준의 격이라……’

     

   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차이라면 피부색이 심연이 떠오르는 짙은 푸른색이라는 것.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명색의 마왕이라는 놈이 팔이 2개에 다리가 2개 달린 평범한 인간과 신체 구조상으로는 큰 특징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너는 나와 만난 적이 있다는 듯이 말을 하는구나.

   “……하? 내가 기억이 안 난다고?”

     

   내가 놈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때쯤, 마왕이 토끼를 향해 속삭이며 슬쩍 운을 띄웠고 토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놈의 말을 받았다.

     

   -흐음? 글쎄… 나에게 딱히 약한 놈을 기억하는 취미는 없다. 그런 것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놈의 말에 토끼가 분노로 얼굴을 붉힌다.

     

   토끼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함께 했던 모든 동료를 잃고 홀로 탑의 도우미가 되었다는 것쯤은 녀석과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허나, 마왕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나.

     

   -그나저나 나는 네 녀석이 마음에 드는 구나. 충분히 강해. 조금 전에 나에게 달려들던 그 인간도 인상적이었지만 네놈은 뭔가 달라.

     

   마왕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슬쩍 입맛을 다신다.

   그저 한 끼 식사를 앞에 두고 젓가락을 어떻게 놀릴지 고민하는 듯한 가벼운 반응이었지만 나는 놈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가볍게 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너 보다 강하니까.”

   -……뭐라?

     

   나의 말에 놈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기 시작한다.

     

   -……큭, 크큭…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고 마왕 또한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부족해…… 한 수? 두 수? 마력의 양에서도 차이가 나고 그 인간의 몸뚱이가 마왕인 나의 몸보다 튼튼할 것 같지도 않다.

   “근데?”

   -나는 네놈이 보이는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구나.

     

   녀석의 말에 나는 가만히 나의 검을 들어 올렸다.

   튜토리얼에서부터 꾸준히 사용해 왔지만 단 한 번도 깨지거나 이가 나간 적도 없던 흑색 검.

     

   그리고 이 검이 이렇게 깔끔한 외형을 유지한 데에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비결이 있었다.

     

   “곧 알게 될 거다.”

     

   조금 전부터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놈과의 전투가 나의 기억을 스쳐 간다.

     

   팔이 2개에 다리가 2개.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맨손의 격투와 방출형 마법을 사용할 것 같은 놈의 전투방식도.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놈의 외형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림에서 무공을 배우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그 사실 자체가 상당히 큰 메리트로 다가왔다.

     

   -그래 한 번 보자꾸나. 네놈도 마지막에 쓰러진 인간처럼 나를 즐겁게 해줬으면 좋겠군.

   “딱히 재미는 없을 거야.”

     

   팟!

     

   그 말을 끝으로 마왕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

     

   한가민과 서세영, 금린 그리고 성녀를 포함한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몬스터들이 움직임을 멈춤과 동시에 곧장 선발대가 향한 장소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기본적으로 후각과 청각이 뛰어난 어인들을 선두로 남은 인원들이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크고 작은 언덕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왕성은 들판에 가까운 지형.

   덕분에 움직임이 불편할 일은 없었고 그들은 처음 목적했던 바에 따라 전투가 벌어진 지역에 생각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었다.

     

   “저, 저기! 사람들이……!”

     

   앞서 달리던 성기사 중 한 명이 쓰러진 플레이어들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괜찮으십니까?”

   “으윽……! 무, 물 좀……”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전투가 벌어진 반경은 생각보다 넓었다.

   애초에 초인이 된 사람들이 대규모로 전투를 펼친 이유도 있었고 마왕의 공격에 의해 꽤 멀리 튕겨져 날아간 사람들도 있었던지 플레이어들은 들판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다 한 놈이 한 짓이라고요?”

     

   주변을 둘러보던 한가민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감상을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많은 플레이어들이 전투 불능이 된 것은 물론이고 무슨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일대가 초토화된 장소도 있었으니 마왕의 힘이 가늠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성녀님! 랜든 경께서……!”

     

   근방을 탐색하던 성기사 중 하나가 성녀를 다급하게 부르자,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한가민과 서세영이 그가 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으윽…”

     

   그곳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각 좌표의 대표라 불릴 만했던 정예들.

   청린과 랜든. 박조철과 남궁천호가 그곳에 나란히 누워 누군가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우욱! 어우…… 페널티 이거 감당이 안 되네…”

     

   백발…… 정확히는 은발에 가까운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는 여인.

   분명히 이곳으로 오면서 단 한 번도 만난 기억이 없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치료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오! 이제야 왔네! 성녀 씨 빨리 여기 치료 좀 이어서 해 봐요! 나 죽겠어 진짜!”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촐랑거리는 말투와 중상자를 치료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가벼운 제스처.

     

   성녀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곧장 가장 상처가 많은 네 사람을 향해 신성력을 퍼부었다.

     

   뼈마디마디가 부러졌던 듯, 꺾였던 신체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한참이나 구겨져 있던 인상도 점차 평온해지기 시작했고 불규칙적이던 맥박도 점차 안정되기 시작하니, 은발의 여인은 이제야 살겠다는 듯 뒤로 쓰러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그런데 누구세요?”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자, 한가민은 넷을 치료하고 있던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그녀는 박조철과 남궁천호를 치료한 나름대로의 은인.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탑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기에 경계가 되었던 탓이었다.

     

   “어? 한가민 씨 나 알잖아요?”

   “네? 제가요?”

   “응.”

     

   알고 있다고 말하니 괜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하지만 한가민은 이렇게 예쁜 사람과 친분을 쌓은 기억은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고 때마침 들려온 굉음에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쩌어어어엉!!!

     

   들판을 시원하게 울리는 충격파.

     

   “으악!”

   “이, 이게 무슨!”

   “저기! 저기에 누가 있습니다!”

     

   그 소리 뒤로 누군가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장소를 향해 손짓하는 플레이어 한 명. 그리고 한가민은 그곳에서 대치하고 있던 두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저씨?”

     

   백색 로브를 휘날리며 특유의 흑색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의 앞에 푸른 피부를 가진 남자 한 명이 가만히 김시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 도와줘야…!”

     

   한가민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옆구리에 있는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정황상 저기 있는 푸른 피부의 남자는 마왕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가 마왕이라면 지금 여기 있는 모든 플레이어를 쓰러뜨린 저 괴물을 김시인 한 명이 부담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덥썩.

     

   “어디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벌러덩 누워 어지럽다고 낑낑대던 은발의 여인이 언제부턴가 한가민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이, 이거 놔요! 아저씨를 도와야죠!”

   “도와?”

     

   한가민의 말에 여인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다.

     

   “누가? 누구를?”

     

   여인의 물음에 기분이 상한 한가민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자신이 김시인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애초에 전투력 면에서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싸움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위험에 처한 그를 외면하기에는 한가민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아아, 미안. 화나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죠……! 음…… 자세히 보실래요?”

     

   그러던 중, 은발의 여인이 한가민을 달래며 말을 이었다.

     

   흥분한 그녀를 조곤조곤하게 설득하는 듯한 어조.

   그리고 여인의 말에 한가민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왕과 김시인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

     

   콰아앙!!! 콰광!

   쿠과과광!!!

     

   두 사람이 맞부딪치자 무수한 굉음과 동시에 크고 작은 풍압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그 와중.

     

   -젠장! 왜! 왜 닿지를 않는 것이냐?!

   “벌써 재미없으면 안 되는데.”

     

   미친 듯이 퍼부어졌던 마왕의 공격은,

   단 한 차례도 김시인에게 닿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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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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