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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7

       

       라이덴이 공작저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마하렛은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이불.

       

       얇은 천막의 너머로는 희미한 숨소리만이 아른거렸다.

       

       

       목을 조르는 겨울의 한기 때문이었을까.

       

       소녀의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당신이 여기서 제일 최악이야.

       

       

       고요히 계절에 익사하고 있으면, 귓가에 원망이 닿는다.

       

       지독한 환청이었다.

       

       소녀는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뾰족하게 벼려진 송곳이 심장을 느긋하게 쑤시고 들어온다.

       

       

       -대체… 왜 그렇게 날 미워하는 거야…

       

       

       마하렛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런 저항의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에.

       

       

       소녀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살점을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악몽들의 이빨을.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한마디였다.

       

       그 말대로였다.

       

       아무것도 몰랐다.

       

       피어나는 기억의 다발들은 괴로움을 표상한다.

       

       

       -도망쳐, 라이덴!!

       

       -미안, 해… 우리, 아, 들…

       

       

       몇 자루의 검에 꿰뚫린 채로 웃어보이던 공작 부인.

       

       직후 그녀는 빨갛게 사라진다.

       

       

       참혹한 장면 앞에, 소년은 서있었다.

       

       가여운 뺨에는 튀어오른 핏물이 초라하게 묻어있었다.

       

       그리운 내음이었다.

       

       

       -전부… 전부 나 때문이야.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만 않으셨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외로운 시절을 가졌던 강박.

       

       주변 사람으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었던 소년의 상처는, 조금씩 곪아들고 있었다.

       

       

       -……내가 그대로 죽었어야 했는데.

       

       

       결국 아픔은 노란 고름을 터트리며 문드러진다.

       

       소년은 두려웠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질까봐.

       

       그래서 소년은 주변을 밀어냈다.

       

       

       미련함은 비극을 따라서 흉측한 고통으로 굳어진다.

       

       누군가를 위했던 마음은.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칼날이 되었다.

       

       

       “……라이덴.”

       

       

       마하렛을 가장 비탄하게 했던 것은, 바로 소년의 흉터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곁을 지켜줘야 했는데.

       

       소년이 꾸며낸 배신감에 잠식되어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녀는 미움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자신의 가슴에 남은 자상을 근거로, 마치 합당한 의심이라는 듯이 몰아붙였다.

       

       그렇게 소년은 벼랑 끝에 섰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았잖아.

       

       -너희에게 친절은 바랐던 적도, 거창한 감사 인사를 원했던 적도 없었단 말이야…

       

       

       당신이 소망했던 것은 오직 하나였다.

       

       

       -단지 미움 받지만 않았으면 했는데.

       

       

       하지만 모든 걸 망쳤다.

       

       끈질기게 이어졌던 악연의 매듭은 당신의 목을 우악스럽게 졸랐다.

       

       

       뒤늦게 줄을 잡은 손을 놓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은 부서져 있었다.

       

       

       -대체… 왜, 나를, 왜, 살린 거야…?

       

       -이제는… 정말로 못하겠어.

       

       -전부 끝내고 싶어.

       

       

       속삭이는 소년의 체념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온다.

       

       순백이었던 애착의 한 켠은 잔뜩 난도질 당하여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녀는 그렇게 첫사랑을 잃었다.

       

       애틋함이 아닌 죄책감으로, 소년에 대한 마음은 맺어지는 듯 했다.

       

       마하렛은 헛숨을 토해냈다.

       

       한 떨이의 혼잣말은 입가를 타고 뚝뚝 떨어진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소년에 대한 과거를 전부 알게 되었음에도.

       

       드는 것은 죄스러움 뿐이었다.

       

       자신을 속이고 주변 관계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는 사실에 분노할 법도 했으나.

       

       소녀는 일말의 불씨조차 품지 않았다.

       

       

       어쩌면 남아있는 애정 때문이었을까.

       

       그동안은 증오라고 치부하며 넘어갔던 감정을, 소녀는 이제서야 마주하고 있었다.

       

       

       “저는… 저는 대체…”

       

       

       감정의 이름은 애증이었다.

       

       겉면에는 미움이라는 껍질이 조금씩 달라붙어 있었지만. 

       

       본질은 사랑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랬다.

       

       소녀는 여전히 소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하렛은 그것을 너무 늦게 자각하고 말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나서야, 꽁꽁 숨어있었던 연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아… 하아…”

       

       

       호흡은 거칠게 흔들린다.

       

       마치 한 줌의 공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마하렛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환청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소녀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눈부신 은발은 이미 애처로운 손길을 따라서 잔뜩 흐트러진 상태였다.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소녀는 몸을 머금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리고는 침대를 벗어났다.

       

       당장 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정신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나약한 다리가 바닥을 딛는다.

       

       마하렛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닫혀있던 방문을 열었다.

       

       

       “……”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는 복도.

       

       소녀는 그 위를 가로지른다.

       

       휘청이는 다리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저택 2층에 위치한 테라스였다.

       

       항상 삶이 힘든 순간마다 의지하는 공간.

       

       마하렛은 어김없이 그곳을 찾았다.

       

       

       -휘이이이…

       

       객을 맞이하는 것은 흐르는 겨울바람이었다.

       

       소녀는 급하게 호흡했다.

       

       마치 익사 직전 바다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투박하기 그지 없는 숨결이었다.

       

       

       “하아……”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마하렛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며 눈을 돌렸다.

       

       흐릿한 시야로는 테라스의 전경이 비친다.

       

       

       그리운 자리였다.

       

       모든 것이 좋았던 어린 시절, 라이덴과 함께 추억을 쌓고는 했던 테라스.

       

       이제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버린 밤하늘에서, 소녀는 홀로 입술을 씹었다.

       

       스치는 계절마저 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사색을 삼키고 있으면, 이내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합니다.

       

       

       마하렛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기에.

       

       아무래도 테라스에 선객들이 자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리시트 공자.

       

       -예, 각하.

       

       -나를 원망하는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네와 마하렛의 사이는… 지금보다 나은 모습일 수 있지 않았나.

       

       

       소녀는 급하게 커튼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마하렛의 존재에 대하여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가만히 숨을 죽인다.

       

       마하렛은 쥐 죽은 듯이 고요를 지키며,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었다.

       

       

       -마하렛… 그 아이에게, 우리는 너무 지독한 상처를 주었어.

       

       

       둘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마침 대화는 과거에 있었던 ‘그 사건’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이미 모든 전말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마하렛은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윽, 읏…”

       

       

       아니, 담담하지는 못했다.

       

       소녀는 주먹을 꽉 쥐며 눈물을 참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으나,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잡았다.

       

       

       당사자들이 직접 늘어놓는 푸념을 듣고 있으니, 다시 기분이 이상해진다.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마하렛을 불쌍히 생각해주게. 상처가 많은 아이였으니.

       

       -……노력해보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네.

       

       

       대화가 마무리되고 공작이 테라스를 떠나는 즈음에는.

       

       이미 나지막한 흐느낌이 맴돌았다.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린 입술에는, 서리꽃을 닮은 처연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새까만 배경을 뒤로 소년은 한숨을 뱉었다.

       

       잠깐 하늘을 바라보는 듯 하던 라이덴은, 곧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잔잔한 흑안은 커튼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너머의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잠시, 마하렛은 머뭇거리며 커튼을 나섰다.

       

       

       “……라이덴.”

       

       

       약간의 울음기가 담겨있는 한마디.

       

       슬픔, 두려움, 죄책감.

       

       소녀의 목소리는 다양한 감정들로 요동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소년은 고요를 잃지 않으며 그녀를 맞이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오랜만의 재회였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은은하게 내리는 월광.

       

       서늘한 겨울바람.

       

       그 모든 것의 중심으로 서있는 매혹적인 외모의 소녀.

       

       나름 로맨틱한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는 사이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면 말이다.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애써 털어내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담백한 미소였다.

       

       

       “바쁘신 것이 아니라면… 잠시 곁에 머무르다 가시지요.”

       

       “……”

       

       

       뜬금없는 제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미소 때문이었을까.

       

       붉은색 눈동자 위로 찰나의 당황이 서렸다.

       

       머뭇거리며 우왕좌왕하던 마하렛은, 이내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는 발을 옮겼다.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어둠에 숨어있던 소녀의 낯이 별빛으로 드러난다.

       

       

       어설프게 닦아낸 탓에 진하게 남아있는 눈물 자국.

       

       퉁퉁 부어있는 눈가.

       

       진하게 남아있는 다크서클.

       

       마하렛은 초췌한 몰골로 내 옆에 섰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저는 괜찮아요.”

       

       

       전혀 설득력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냥 넘어가 주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조금 추스리시지요.”

       

       “네…”

       

       

       나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소녀의 마음이 진정되기까지.

       

       허나, 한 번 입덧을 틔워버린 울음은 쉽게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하렛은 악착같이 눈물을 참았다.

       

       상처가 날 정도로 꽉 깨문 입술에서는 핏방울이 몽글거린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고 말았다.

       

       부드럽게 움직인 손가락은 소녀의 입가를 닦아준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손끝에 닿은 소녀의 체온은 추웠다.

       

       마치 오랜 겨울을 지난 사람처럼, 일말의 온기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따스함이었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

       

       

       마하렛은 멍하니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말없이 손바닥에 담긴 체열로, 얼음장 같은 뺨을 데워주었다.

       

       

       그렇게 잠깐을 보내고 있으면.

       

       의문에 물드는 소녀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대체 왜.”

       

       

       대체 왜.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당신이 죽을 만큼 미웠는데, 막상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나를 벼랑으로 몰아세웠던 당신을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나처럼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저는… 단지, 당신이 행복했으면 했습니다.”

       

       

       그런 생각에서 당신을 밀어낸 것이었다.

       

       나의 곁에 남아있으면 모두가 불행해질 것만 같아서, 주변 사람들을 잘라냈다.

       

       나는 그들이 행복했으면 했다.

       

       나의 외로움보다 타인의 안온함을 더 간절히 바랐기에.

       

       

       그리고 그 타인에는 마하렛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비록 나는 당신을 상처 입혔지만.

       

       모든 행동의 바탕에는 당신이 불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당신을 증오합니다.”

       

       

       나에게 지독한 상실감을 안겨주었던 당신을 증오한다.

       

       

       “당신을 애정합니다.”

       

       

       그럼에도,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해주었던 당신을 여전히 애정한다.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감정이었다.

       

       조금 더 복잡하고, 끈적하면서, 눈물과 피로 얼룩져있는 감정.

       

       이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당신을 애증하고 있습니다.”

       

       

       그래, 애증이겠지.

       

       당신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시들어버리도록 방치할 수도 없었다.

       

       

       아마 당신도 이런 마음을 알고 있겠지.

       

       당신은 이미 나의 마음에 얽힌 모든 것들을 알아버린 상황이니까.

       

       

       “……”

       

       

       마하렛은 파악하기 어려운 얼굴을 했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있던 그녀는, 이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기어코 흐르는 빗줄기는 조금씩 더해지며 소나기로 변해갔다.

       

       소녀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했으나, 울음에 잠긴 목은 쉽게 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입술을 더듬거리고 나서야, 마하렛은 온전한 한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직후 소녀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하렛은 조금 더 구를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본래 휴재 예정일을 한참 지나고 나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펑펑 놀다가 늦어버린 것…도 어느 정도 맞습니다만.
    최근 겹치는 행사가 많아서 그런지, 집필시간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사촌 형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조부님 댁에 내려가기도 했고, 대학교 동아리 공연도 코앞인 시점이라서, 이래저래 연습할 것도 준비할 것도 많았습니다…
    바쁘게 지낸 것 같네요.

    사실 변명이죠.
    이건 저만의 사정이고.
    독자님들과의 약속을 위해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연재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연재주기는 4일 안으로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후로는 이전처럼 쭉 일일연재로 가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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