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17

       “제게 뭘 원하죠?”

       ㅡ별 건 아냐. 그냥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면 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구체적인 부탁의 내용을 알고 싶은데요.”

       ㅡ잔뜩 경계하고 있군.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끼치는 류의 부탁은 아닐 테니.

       “제가 당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면, 당신은…”

       ㅡ너를 여정의 첫날로 회귀시켜주마. 유감이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ㅡ다행이군. 다회차 플레이는 이미 질리도록 우려먹어서 말이지.

       “확인차 묻는 거지만, 회귀 후에 인위적인 개입을 할 의도는ㅡ”

       ㅡ단언컨대 없다. 악마는 말장난은 칠지언정, 계약에 있어 거짓말은 하지 않지. 마에 몸 담은 존재들에게 계약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너도 명색이 마왕이니 잘 알고 있을 텐데?

       “……”

       ㅡ이런, 실언을 해버렸군.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어차피 과거만 바꾸면 더 이상 연연할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닌가?

       

       

       ***

       

       

       “교주님.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음? 무엇이냐.]

       

       15분 가량의 항행 동안, 나는 교주님과 함께 읽던 소설을 마저 읽고 있었다. 본래 같으면 교주님에게 있어, 현대를 배경으로 한 아포칼립스 회귀물은 매우 생소한 장르이며 설정이었겠지만. 어차피 교주님게선 내 머릿속을 실시간으로 읽으며 사고를 공유하고 계시기에, 소설의 이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즐거운 독서의 시간을 가지던 도중이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궁금한 점을 교주님께 여쭤보았다.

       

       “이 회귀라는 거 있잖아요, 서로 다른 세계의 시간축은 어떻게 작용하는 걸까요?”

       [그게 무슨 뜻이더냐?]

       “그러니까, 작중에서는 지구가 멸망하고 나서 처음 시점으로 다시 돌아갔잖아요. 적어도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면 말이죠.”

       [그렇지.]

       “그럼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작중 지구를 비롯한 전 차원이 다 같이 되감기는 건지, 아니면 지구만 뒤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그대로인지 좀 궁금해서요.”

       

       내 질문에, 교주님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야 글 쓴 놈이 설정한 대로가 아니겠느냐?]

       “그?런가?”

       

       나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교주님도 내가 정말로 소설의 설정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아마 눈치채셨을 거다. 어차피 옆에서 실시간으로 생각을 읽고 계시는 중이고.

       

       하지만 솔직히 이건 생각을 좀 해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만약에 페러그린이 과거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았다 치고, 그러면 설마 나머지 세상도 다 같이 과거로 돌아가나? 그럼 페러그린이 종말 후에 갤러리에 입장하고, 주딱을 맡고, 나랑 만났던 것도 전부 없었던 사실이 되는 건가?

       

       어, 생각해보니 이거 진지하게 좀 위험한 거 아닌가? 그럼 지난번에 은하정부한테 잡힐 뻔했을 때 나는 그냥 꼼짝없이 잡혀가든 질식사하든 둘 중에 하나라는 거 아냐. 이거 어떡하지? 맘 편하게 지르라고 부추겨놓고선 이제 와서 뜯어말려야 하는 거야? 너 없으면 나 죽어!! 이러면서?

       

       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더니, 교주님이 내 볼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느니라.]

       “네?”

       [적어도 네 신변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보일 테니 말이다.]

       

       아니, 하지만 시간축이 되돌아가면 제아무리 교주님이라 해도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교주님이 싸늘하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상관없다. 어제 밤에 대략적인 감각은 기억해뒀으니 말이다. 이젠 몇 번을 되돌리든 안 통한다.]

       

       아니, 대체 뭘 기억하신 건데요. 그러나 어째서일까, 자세한 원리는 몰라도 교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묘하게 마음이 풀렸다. 단순한 위로라기보다는, 정말로 무슨 일이 닥치든 별 문제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하여 교주님의 손길에 뺨을 맡기곤 그저 허허로이 웃다가, 다음 순간 깨달았다.

       

       아니, 근데. 만약에 반대로 페러그린네 세계는 롤백되고 이쪽 시간축은 그대로라고 가정하면, 지금 화성에 꽂혀있는 성검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대로 사라지는 건가?

       

       “……”

       

       차마 성검 아까우니까 가지 말라는 소리는 할 수가 없고, 이거 성검 복사 버그라도 나오길 빌어야 되나.

       

       

       ***

       

       

       피츠버그의 겨울 날씨는 상상 이상으로 혹독하다. 암만 실내라곤 해도 한겨울의 추위는 그냥 버틸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가스와 전기가 끊긴 마당에 평범한 난방이 될 리도 없고, 하여 올가는 가정용 소형 발전기에 기름 보일러로 어찌저찌 난방을 때우고 있었다.

       

       총화기라면 몰라도 그 외 기계류에는 한없이 약한 그녀였지만, 그쪽 방면에 능한 갤럼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이런저런 사용법 따위를 알려줬기에 다행히도 지금껏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다만 이 든든한 보일러와 발전기 세트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기본적으로 내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우렁차게 덜덜거리는 소음은 주변의 감염자들을 끌어모으는 부작용이 있었기에, 그녀는 어지간히 날이 추워지지 않으면 그냥 찬물로 씻고 대충 이불이나 덮고 살았다. 다행히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러시아인의 피는 그녀를 추위에 극도로 강하게 해주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배를 완전히 깐 가볍기 그지없는 복장 위에 외투만 적당히 걸치고 다니지 않았던가. 이건 그녀가 딱히 추위도 불사하고 헐벗고 다니고픈 치녀라 그런 게 아니라, 최대한 기민하게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감염자들은 기본적으로 빠르고, 끈질기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간격을 유지하며 여차하면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괜히 온몸을 둘둘 둘러싸기보단 정말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몸에 걸치는 게 맞다. 안 그래도 총기를 포함해 들고 다닐 게 많은 입장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불시에 팔다리를 물리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그럴 상황에 안 놓이는 게 베스트 아니겠는가.

       

       아무튼, 의식의 흐름은 집어치우고 결론만 말하자면. 난방을 켰는데도 찬바람이 꽤나 강했다. 뺨을 살살 때려오는 바람에, 올가는 이마를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하암.”

       

       보일러의 소음? 그것도 주변에 감염자가 남아있어야 문제가 되는 법이다. 안 그래도 인근의 감염자들은 눈에 띌 때마다 유인해서 죽인지 오래였고, 도심에 도사린 놈들은 그저께 찾아온 천마가 한 발짝으로 지워 없애버렸다. 최소한 피츠버그 안에선 감염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터.

       

       안 그래도 겨울에 감염자들의 활동이 극도로 적어지는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안전적인 면에선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는 셈이었다. 사실 그러고도 조금 불안해서 주변에 적당히 트랩을 깔아두긴 했지만, 어쨌든 이 짓거리도 벌써 3년 넘게 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따금 악몽을 꾸는 걸 제외하면, 물리적으로 감염자들에게 위협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제 와서 좀비들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끼기엔 그녀는 너무 고여버리고 말았다. 좀비가 인간을 습격하고, 인간도 인간을 습격하는 무저갱 같은 아비규환도 항상 살아서 빠져나왔던 그녀였다. 감염자들이 이제와서 괴상한 변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생존에 큰 지장은 없으리라.

       

       오히려 실재하는 감염자보단 ‘자는 새에, 방심한 새에 물릴지도 모른다’ 같은 원초적인 공포나, 지구에 홀로 남고 말았다는 외로움이 몇백 배는 더 강한 적수가 된 것이다. 평소 같으면 오늘도 뒤숭숭한 꿈자리에 몸서리를 치며 화들짝 일어났겠지마는.

       

       “……♪”

       

       어제, 그리고 오늘 새벽. 그녀는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겨우 한 번, 단 한 번 방문객들을 맞았을 뿐인데. 고작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실로 오랜만에 색채를 되찾았다. 죽어버린 도시의 회색, 타고 남은 잿더미의 회색, 우중충한 먹구름의 회색, 이따금 한 개비씩 피고 뱉는 담배 연기의 회색. 그리고 지긋지긋한 걷는 시체들의 회색 낯짝까지.

       

       회색 일색이던 무채색의 세상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난방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도무지 떨쳐낼 수 없던 지독한 추위가 씻은 듯이 가셨다. 실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아니, 마법 같은 게 아니라 마법 그 자체였다. 마법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마법이 그녀에게 찾아온 것이다. 감염자들에게 끌려가 놈들과 한 패가 되든, 혼자 쓸쓸히 늙어죽든. 한 점 빛조차 안 보이던 이 끝나버린 종말 후의 세상에, 키다리 마법사는 그녀를 찾아 와주었다.

       

       단 한 번의 달콤한 꿈으로 끝나지 않을, 매일의 행복을 선사하리라 약속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기뻐서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어제는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못 왔지만, 오늘은 분명ㅡ

       

       그리 생각하며 몸을 깨끗이 씻고 말리고 잠옷을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때마침 저 멀리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고도의 에너지가 차원의 벽을 찢어가르는 소리. 그토록 기다리던 손님들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본래라면 귀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어야 할 그 소음이, 지금은 그저 반갑게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리 거지꼴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수송기의 엔진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괜히 머릿결이나 복장 따위가 신경 쓰였다. 저도 모르게 쫄래쫄래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를 좀 만지작거리고, 거울을 비춰보며 옷차림을 확인해본다.

       

       평상시엔 혼자 살다 보니 멋부리기 따윈 신경도 안 썼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사시에 바로 임전 태세에 돌입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실용적으로 옷을 갖춰 입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거, 상당히 노출도가 있는 복장 아닌가? 지, 지금이라도 갈아입어야 하나?

       

       그러나 이미 손님이 코앞까지 다가온 마당에, 이제 와서 옷을 다시 갈아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갈아입을 옷이라 해봐야 그녀 취향의 포근한 분홍빛 잠옷밖에 없었고, 그건 그것대로 쪽팔리기 그지없을 터. 하여 그녀는 결국 안절부절 못한 끝에 얌전히 현관 앞으로 돌아왔다.

       

       자꾸만 헤실헤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잡아내리고, 쑥스러움에 발갛게 달아오르려는 뺨과 귀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식힌다. 지난번엔 첫 만남이라 잔뜩 긴장해서 차라리 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어색한 긴장감이 없어지자 이젠 그 대신 묘하게 상대를 의식하게 된다.

       

       이 한겨울에 배며 목덜미며, 어깨며 겨드랑이며 다 드러낸 제 남사스런 몰골이 못내 신경쓰인다. 아니, 지난번에는 같은 옷 입고 잘만 어울려 놀았으면서 왜 굳이 지금 의식하는 거야. 이건 작업복이야, 작업복…! 하나도 이상할 거 없어. 어차피 그 사람도 내 빈약한 몸뚱아리 따윈 별로 의식 안 할 테고… 아니, 그건 그것대로 또 뭔가 기분 나쁜데…

       

       그렇게 스스로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던 그때, 똑똑ㅡ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기다려 마지않던 남자의 목소리도.

       

       “택배 왔습니다, 문좀 열어주십셔ㅡ”

       

       올가는 화들짝 놀라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쪼르르 달려가 현관문을 열면, 자신보다 머리 한두개는 더 큰 키다리 마법사가 문 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다. 그 얄미운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왜 어제는 안 왔냐, 직업 의식이 없는 거 아니냐, 영업 이틀만에 벌써부터 빠진 거 아니냐ㅡ 그런 작은 투정도 어디론가 쏙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어서 와.”

       

       푸른 눈에 한가득 반가움을 담아, 올가는 아침 손님을 맞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말 많은 악마 때문에 내심 질색 중인 페러그린
    그리고 캡틴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좀붕이
    좀붕이는 오늘 아직 갤러리를 안 봤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그저 해맑다

    이광상님, 임신야스언제함님 후원 감사합니다!!! 임신은 몰라도 야스 자체는 그리 멀지 않은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 겁니닷…!!!

    그리고 핀치님, 에이피셸님, lumen님 팬아트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정성 어린 팬아트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헤으응… 너무 행복해요…

    다음화 보기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