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17

    차창 밖으로 비치는 햇빛은 아직 따사롭다.

    하늘은 샛노랗게 물들어 곧 완전히 어둠에 뒤덮일 듯이 보였고, 덕분에 길게 늘어진 가로수의 그림자들이 다이튼과 예르나의 얼굴에 반쯤 걸쳐진다.

    잠시간의 신호대기 상태에 예르나는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을 살핀다.

    루크와 디아나가 손을 꼭 잡고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어린이인 디아나야 말할것도 없고, 키메라의 육체인 루크에게도 동물원은 사실 꽤 피곤한 공간이었다.

    드래곤피어의 조절은 아직 초보적인데다, 피어를 거두면 온갖 동물들이 죄다 달려들 기세로 들떴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감정소모가 꽤 심했다.

    루크도 대마법사인만큼 감정을 절제함은 익숙하지만 일부러 감정을 담아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탓에, 루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분좋게 자고있는 루크를 일부러 깨우고싶지 않았던 예르나는 조수석에 앉은 다이튼에게 조용히 말했다.

    “많이 지쳤나봐.”

    “그러게.”

    다이튼은 멈칫, 하면서 백미러를 통해 비춰져 마주쳐진 예르나의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피해냈다.

    “아무래도 루크먼저 집에 내려다주고, 나만 너희 집에 가서 짐을 챙겨야겠다.”

    돌아가는길은 예르나의 아파트에 걸쳐있었고, 다이튼의 집에서 루크의 짐들을 받아서 돌아오는동안 계속 차 안에 두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 해.”

    대답을 건네는 다이튼의 낯빛은 묘하게 붉어져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빛의 조명이 자신의 붉은 표정을 가려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하는지, 그의 얼굴은 그의 손으로 반쯤 가려진 채 팔꿈치를 창가에 기대고 눈동자를 굴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예르나는 툭 던지듯 내뱉는다.

    “동물원에서의 일,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거야?”

    “어?”

    다이튼은 화들짝 놀라서 자세를 다잡았다.

    동물원에서의 일이라.

    동물원에서 하도 많은 일이 있었기에 다 떠올릴 수야 없을 정도다만.

    정확히 예르나가 말하는 ‘그 일’이란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 하나뿐이었다.

    러브레터를 쓴 이유에 대한 것이리라.

    밝히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론 무서워서 밝히기 싫었던, 깊은 속마음.

    ‘사실은, 너한테 쓰고 있었어.’라고 남자답게 그 자리에서 대답할 수 있었다면야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실 겁쟁이니까.

    머릿속에선 멋진 모습으로 예르나에게 고백하는 자신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반대로 도저히 스스로 그 행동을 취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원래 처음은 다들 미숙한 법이라지만, 다이튼은 그 미숙함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예르나는 엘프고, 자신은 인간이다. 평균수명에서 거의 두배이상 차이가 나는 이종.

    요즘 아무리 타종족과의 혼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라곤 해도, 엘프인 예르나에게도 쉽지않은 결정일 것이다.

    당장 자신이 오래 살아서 100살이 되어 일생의 황혼기에 접어들 순간에, 예르나는 그때서야 125살정도. 

    인간으로따지면 50대.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것이다.

    그 순간을 예르나에게 감당시키기엔 또 너무나 미안하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예르나가 자신을 남자로 보고있기나 한지가 의문이고.

    아마 그냥 편한 직장동료쯤으로만 보고 있는 것 아닐까?

    이 문제에 대해선 매일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해야 예르나가 자신을 이성으로 자각할 수 있으려나.

    정말 고백밖에 답이 없는 걸까?

    하지만 갑자기 고백을 해서 거절당하면, 그 후로 어색해진 사이를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상상만으로도 답답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지 않나.

    그래서, 결국 다이튼이 선택한 것은 시간벌기였었다.

    ‘러브레터라니, 그건 누구한테 쓰려고 한거야?’

    ‘그, 그건…….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아, 그런 거였어? 그렇구나.’

    다행히 예르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지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뭐?’

    ‘그렇잖아, 러브레터라면서? 여자의 의견도 들어가면 좋지 않겠어? 도와줄게. 괜히 이상한 오해한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 그럴 것 까지는…….’

    ‘부끄러워서 그래? 괜찮아, 누군지는 안 물어볼테니까. 누구한테 말하거나 하지도 않아. 나, 입도 무거운 편이거든.’

    ‘…….’

    러브레터를 받을 당사자가 검수하는 러브레터라.

    그럼 확실히 취향은 맞출 수 있겠네, 그렇지만 너무 부끄럽지 않나.

    다이튼은 창밖 저 멀리에 산처럼 우뚝 솟은 인공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눈을 둘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딱히 러브레터가 아니래도 내 여성으로서의 의견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담없이 말해줘, 알겠지?”

    “어? 어어…….”

    ‘여성으로서의 의견이라니.’

    예르나, 너도 경험이 없기는 나랑 마찬가지잖아.

    ———-

    루크가 다이튼의 집으로 오면서 챙긴 물건들은 대략 교복을 포함한 옷가지와 학용품과 노트, 그리고 칫솔등의 위생용품들.

    다이튼은 미리 챙겨둔 그것들을 예르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루크가 가져온 짐은 이게 전부야. 혹시 나중에 뭐 놓고간게 있으면 또 찾으러 오라고 해줘.”

    “아, 챙겨줘서 고마워.”

    예르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짐들을 받아들이자, 다이튼은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다가 묻는다.

    “그럼, 이제 ‘그건’ 더이상 안하는거지?”

    그것이라하면, 루크의 과거를 청산하기위한 조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예르나는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가 깊게 내뱉으며 루크의 짐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뭐, 그러려고. 당분간은, 루크랑 있어줘야겠지.”

    루크도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싶어할테니까.

    하지만 기억을 떠올려보면, 응석을 부린 쪽은 언제나 자신이었지만.

    ‘후우……. 면목없네.’

    “…….”

    그리고 이어진 어색한 침묵.

    예르나는 그 침묵에 별다른 생각을 품지는 않았지만, 다이튼은 그 어색함을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그, 예르나?”

    “응? 왜?”

    “호, 혹시……. 이번주 일요일에 시간 있어?”

    “시간이야 있지만. 왜?”

    “그, 그때쯤 편지를 검수받고 싶어서.”

    “음? 알겠어. 그때 시간 비워둘게.”

    “그래, 고마워!”

    “쉿, 디아나 깨겠다.”

    “괜찮아, 디아나는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

    “그래?”

    예르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다이튼을 뒤로하고 자신의 차로 향하려 했다.

    그러다 다이튼이 집을 둘러보다가 문득 ‘아!’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놓여져있던 공책을 들어 짐들 사이에 끼워준다.

    “그게 뭐야?”

    “루크가 자주 쓰던 공책이야. 맨날 적고 있는걸 보면 아마도 일기장 같아.”

    “그래? 혹시, 안에 봤어?”

    예르나가 장난삼아 눈을 흘기자, 다이튼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여자애 일기장을 훔쳐보는 취민 없어!”

    “뭐, 그럼 됐어.”

    ——–

    “후, 생각보다 짐이 많네.”

    루크가 아무리 힘이 세다지만, 아이의 몸으로 이렇게 많은 짐을 옮긴것은 참 대견한 일이었다.

    아마도 힘이 센 것도 실험의 영향이리라.

    루크는 무려 용과 마수를 섞은 키메라니까. 자신의 주장으론 말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진 모르겠지만서도.

    하지만 확실히, 인간이 아닌 마력패턴이 검출되었기도 한데다, 그 용으로 변한 모습까지 봤으니 루크의 주장엔 꽤 신빙성이 있다.

    그걸보면 얼만큼 기억이 되돌아온건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좋은 기억은 그렇게 많이 돌아오지 않은건지 그리 어두운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녀가 짐을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내려놓자, 짐 사이에서 뭔가 툭 떨어진다.

    집어올려보니 그것은 아까 다이튼이 짐들 사이에 대충 끼워넣어준 공책이었다.

    “흠.”

    일기장이라, 그러고보니 루크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생각해보니 궁금한것이 많았다.

    과연 어떤 것을 써놨을까?

    보지 말라곤 했지만……. 뭐, 조금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예르나는 살짝 기대감에 부풀어 공책을 펼쳤다.

    첫페이지는 단순히 마법식과 주문등이 아무렇게나 적혀있는 모습이다. 음, 일기가 아니라 오답노트였던걸까? 아니면 메모지?

    몇장을 더 넘겨보아도 여전히 그런것들이라 예르나는 조금 실망했다.

    루크는 평소에도 마법에 대한 것밖에 떠올리지 않는걸까, 싶어서.

    그렇게 살짝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던 중, 예르나는 문득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아이스크림, 과자, 초콜릿, 등등.

    루크가 먹어온 음식들과 그것에 대한 설명이 절절히 쓰여진 페이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르나는 가만히 그 페이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달다. 시원하다.

    과자, 짜다, 달다, 바삭하다.

    초콜릿, 달다, 끈적하다.

    바베큐, 짜다. 쫄깃하다. 

    큼직한 글씨로 꾹꾹 눌러쓴 글자들.

    마치 어린이가 글자연습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평소의 루크의 어휘능력을 따져보면 도저히 이런걸 썼을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또 이런걸 보면 되게 아이같아서 재밌다.

    그러는 와중에도 글씨체는 어른못지않게 또박또박한게 또 신기했지만.

    글씨는 안그래도 잘만 쓰면서, 따로 연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걸 갭이라고 하는건가.

    ‘풋, 먹는걸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거야.’

    그 뒤로도 한참을 먹는것으로 페이지가 할애되어 있었다.

    지극히 간략하고 단순한 맛설명과 함께.

    그냥 일기가 아니라 무슨 식단표인걸까.

    그렇게 미소를 머금고 공책을 넘기던 예르나가 한 페이지에서 멈칫한다.

    ‘어제, 그제, 그저께, 엊그제, 엊그저께.’

    ‘내일, 모레, 사흘, 나흘.’

    이전까지의 글자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날림체로 페이지를 채운 시간에 관한 수많은 표현들.

    예르나는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뭐지?”

    미간이 좁혀지는게 느껴졌다.

    설마.

    큼직하게 쓰여진 단어다.

    ‘언제 와?’

    그 밑으로 작게 나열된 글자열.

    ‘내일 와?, 모레 와? 사흘 뒤에 와? 나흘 뒤에 와?’

    예르나는 등을 타고오는 소름에 곧바로 공책을 덮었다.

    ——-

    그 공책을 봐서 그런가, 예르나는 심장의 혈관을 누가 마개로 막아둔게 아닐까 싶은 갑갑함을 자꾸 느끼고 있었다.

    겉보기론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다이튼에게 맡겨뒀으니 괜찮겠지, 하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게 아닐까?

    그럴지도, 녀석은 그래도 남자이고, 여자애의 완벽한 이해자는 될 수 없을거다.

    이건 딱히 다이튼의 잘못은 아니지.

    그리고 디아나는 루크보다 훨씬 어린 아이고, 루크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녀석 말곤 맡길만한 녀석이 없었는걸.

    소르비는 아무래도 문제가 많다. 

    루크를 맡기면 보호하기보단 장난이나 칠 테지.

    다프네나 키르케도 그렇다. 다들 아이엔 서투르니까.

    결국 예르나가 믿을 수 있고, 가장 아이를 잘 돌볼 것 같은 인원은 다이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루크를 맡기기엔 믿을 수 없다. 아무래도 루크가 그냥 보통 아이는 아니니까.

    ‘그런 아이를 몇주나 방치해둔건 내 잘못이야.’

    예르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사고는 아까부터 일기장에 큼직하게 쓰여져있던 ‘언제 와?’를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그 말을 차마 묻지도 못하고 일기장에 반복해서 쓸 정도면…….

    역시,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둔 것이 문제겠지.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을 냈다.

    예르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상념에서 벗어나 집 앞에 설 수 있었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다. 

    ‘루는 잘 자고 있겠지?’

    혹시나 자고있을 루크가 깰라,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루크는 꽤 귀가 밝으니까, 깨우지 않기 위해선 강도높은 숲지기훈련으로 배웠던 기척을 죽이는 스킬까지 사용해야 한다.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문을 닫은 뒤, 발 뒤꿈치를 살짝 들고선 절묘한 보법을 이용해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간다. 

    루크를 재워둔 침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인기척이 들리는 방향은 화장실이었다.

    ‘자다 일어나서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했던걸까?’

    예르나는 이름을 부를까, 싶다가 소리없이 들어와서 갑자기 이름을 부르면 놀랄것 같아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자는 줄 알고 인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들어온 참인데, 갑자기 이름을 부르면 놀라서 볼일도 못 볼테니까.

    ‘어차피 기다리면 금방 나오겠지.’

    하지만 기다려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고 있었다.

    ‘혹시 화장실에서 자는걸까?’

    많이 피곤했으니까, 그럴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또 침대로 옮겨줘야지, 예르나는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펼쳐진 광경은 예르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무언가였다.

    루크가, 욕조에 제 팔을 올려두고 칼을 손목에 긋고 있었으니까.

    “루크 너!?”

    “예, 예르나? 어, 언제, 대체 언제 왔는가?”

    “루, 루크, 너……. 지, 지금 뭐 하는거야?”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아니, 그대가 없는 줄 알고……. 그, 그러니까! 이건 그, 실험일세, 실험! 이상한 생각 하지 말거라!”

    “거짓말 하지 마.”

    대체 자기 손목을 긋는 실험이 어딨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예르나시점으로 보니까 미칠거같네요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