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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7

       권력에는 의무가 따른다.

         

       아무리 친구를 믿어도 권력자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크래프트 가주로서 옅어진 복수심과는 별개로 교단에게 복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아카데미의 유일 권력자가 됐다면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물며 테러 같은 흉흉한 사안이라면 더욱더.

         

       “난 엘리를 믿었지만…….”

         

       파스텔은 슬픈 표정이 됐다.

         

       그러다 밝게 외쳤다.

         

       “공무에 사감을 담을 수는 없으니까!”

         

       마음속 뇌물 랭킹이 존재해도 배탈 날 정도로 가리지 않고 받아먹진 않아! 돈을 아무리 준다 해도 테러범과 협력하진 않는다구!

         

       마찬가지로 친구를 좋아한다 해서 다른 친구들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을 무시하진 않아!

         

       나는, 위대한 파스텔 각하니까!

         

       권력을 사랑한다면 그에 맞는 책임도 져야 하니까!

         

       “아…….”

         

       엘리는 영혼 빠진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흐트러졌다. 혼란스러워하는 눈동자가 식은 잔을 내려봤다.

         

       오잉.

         

       그냥 가볍게 사실을 말해준 건데 생각보다 과한 반응.

         

       똑똑한 엘리라면 공무에는 철저한 편인 파스텔이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수족들의 업무를 방해한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물론 재밌어서 날린 건 맞긴 하지만 종종 일하는 책상으로 날려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업무는 잘하는지 슬쩍 확인하는 건 관리자로서 당연하잖아.

         

       감독 당하는 느낌을 안 주기 위해 종이비행기라는 우회적 수단을 쓴 것도 흔하잖아.

         

       시시콜콜한 잡담만 하며 놀기만 하는 것 같은 부장님이 잡담인 척 부서 분위기를 살피고 그러며 아랫사람이 올린 인사고과가 제대로 된 건지 확인한다는 건 상식이잖아?

         

       똑똑한 엘리는 차기 마왕을 찾을 겸 업무 도중에 학생 명부를 본 게 몇 차례 들켰다는 것도 당연히 알았을 테고.

         

       우리 말은 안 해도 암묵적으로 서로 눈 감고 있던 거잖아.

         

       잠입해 본심을 숨겨야 하는 스파이와 친구를 의심해야 하는 권력자의 비극적 관계를 서로 배려하고 있던 거지!

         

       비극 속에서 커지는 우정.

         

       친구니까 이 정도 애달픈 속마음은 알고 있었다구.

         

       에헴.

         

       이것이 인기인 파스텔!

         

       친구가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잘 알아요~.

         

       그런데 사실 왕녀님이면 윗선의 명령에 본심을 억눌러야 하는 안타까운 스파이가 아니라 본인이 결정권자다.

         

       그러면 이젠 서로 안 숨겨도 될 거 같아서 ―야호~!― 속 시원하게 먼저 말해준 건데…….

         

       “엘리?”

         

       파스텔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손바닥을 내밀어 엘리의 눈앞에 흔들었다.

         

       “어디 아파?”

         

       연회가 너무 길긴 했지?

         

       하물며 마계의 철도 부설권을 강탈해 가려는 반마족 연회나 마찬가지였는데 마족으로서 참여했으니.

         

       나도 모르는 마음고생이 심했나 봐. 대놓고 조롱까진 아니라도 비웃는 시선쯤은 당연히 받았던 걸까?

         

       허억, 정말 그랬겠다!

         

       내가 배려가 부족했어……!

         

       파스텔은 급격히 미안해졌다.

         

       “미안!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너무 일 얘기만 했나 봐! 나머지는 학교로 돌아간 뒤 푹 쉬고 나서 얘기하자!”

         

       표정이 해맑아졌다.

         

       “친구로서!”

         

       엘리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불안한 목소리였다.

         

       “조용히 있어 줘, 크래프트.”

         

       엣.

         

       파스텔은 눈이 동그래졌다.

         

       크래프트.

         

       크래프트으.

         

       호칭이 후퇴했어?

         

       으아아?!

         

       파스텔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내가 뭘 했다구우!

         

       친구를 배려 못 한 죄밖에 없어!

         

       억울해애!

         

       엘리가 다 식은 우유 잔을 들었다. 잔이 떨리고 우유가 흔들렸다. 방황하는 시선과 미세한 중얼거림이 흔들림 속에서 뒤섞였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이지. 어디까지가, 어디까지가.”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러는 걸까?

         

       설마 정신적 타격이 심한 건가?

         

       마족을 비웃는 시선을 연회 동안 너무 오래 겪은 나머지 파스텔과의 관계까지 의심할 정도가 돼 버린 걸까?

         

       여태 보여 준 모습이 가식이고 뒤에선 자신을 비웃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든 건 아닐까?

         

       허억.

         

       나 그런 사람 아닌데.

         

       파스텔은 손을 뻗었다. 엘리의 빈손을 잡자 떨림이 느껴졌다. 시선이 마주쳤다.

         

       분홍 눈동자가 부드럽게 접혔다.

         

       “가식은 없어!”

         

       나는 애정 표현이 부담스럽고 제멋대로에 가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친구지만…….

         

       내 마음은, 이 관계는.

         

       “모두 진짜야!”

         

       나는 돈을 좋아하고 권력을 사랑하며 질서를 위반하는 데다가 나쁜 짓에 희열을 느끼는 친구지만…….

         

       내 마음은, 이 관계는.

         

       “모두 진짜야!”

         

       파스텔은 미소 지었다.

         

       “세상은 아름답고, 난 더 매력적이겠지만.”

         

       내 마음은, 이 관계는.

         

       “모두 진짜야!”

         

       의심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나도 모두를 좋아하니까.

         

       내가 모두를 좋아하는 만큼 모두가 널 좋아할 테니까.

         

       잠시 벽걸이 시계의 초침만이 움직였다.

         

       어느새 진정한 엘리가 묘하게 바라봤다. 시선이 붙잡은 손을 내려봤다.

         

       “그리 말한들, 모르겠어. 언어는 가볍고 약속은 물러. 진위는 겪지 않고선 확신할 수 없는 거야.”

         

       똑똑한 발언.

         

       파스텔은 잠시 고민했다.

         

       표정이 밝아지더니 손뼉을 짝 쳤다.

         

       “그렇다면 너와 나의 지성을 믿어 봐!”

       “지성……?”

       “이해타산 위에 앉아 관계를 조명하는 거야! 이 관계가 가식으로 진심을 잃고 뒷담으로 신뢰를 잃어도 되는 관계인지!”

         

       엘리를 척 가리켰다.

         

       “무려 행정 전담자이자 왕녀님이시니까!”

         

       엘리가 다 식은 우유를 내려봤다.

         

       잠시 뒤 흐트러진 옆머리를 정리하더니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역시 그런 거 계산하며 친구 사귀는구나. 어쩐지 주요 친분들이 실리에 너무 얽혀있더라.”

         

       으엣.

         

       파스텔은 멈칫했다.

         

       살짝 정적이 흘렀다.

         

       “그럴 리가!”

         

       전혀 아님!

         

       인기인 파스텔은 친구를 사귈 때 한치의 이해득실도 계산하지 않아!

         

       친구 랭킹도 있고 매번 갱신도 되지만 그게 성의를 주고받는 총량에 따라 랭킹이 변동되기도 한다던가 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멜리사가 1위인 이유는 그냥 남부 군벌의 후계자님이라서 그런 것도 절대 아니니까!

         

       방학 때 멜리사 본가에 놀러 갔다가 집안 가세를 보고 와아! 친하게 지낼 마음 백만 배! 같은 생각이 뿜뿜 든 것도 절대절대 아니니까!

         

       “대답이 느리잖아.”

         

       엘리가 어이없어했다.

         

       “가식 없다면서 바로 거짓말도 하고.”

         

       허억.

         

       바보바보 파스텔은 얼음꽁꽁이 됐다.

         

       엘리가 우유 잔을 내려봤다. 그러다 엘리의 손이 우유 잔을 옆으로 치웠다.

         

       “난 녹차가 좋더라.”

         

       한결 풀린 목소리였다.

         

       “제국에선 멀쩡한 녹차를 두고 왜 홍차를 먹는 건지 모르겠어. 운송 기간이 길어 녹차가 홍차로 변질되던 시절도 아닌데. 바보 같아.”

         

       엘리는 그리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론 학생회실에 녹차도 구비해 둘 거니까 나중에 결재해 줘. 파스텔 넌 차 마실 줄 모르니 관심 없겠지만.”

       “응? 응?”

         

       파스텔은 어리둥절해졌다.

         

       “녹차? 홍차랑 많이 달라?”

         

       엘리가 순간 한심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평소 더스틴을 한심하게 보던 감정의 10% 정도는 되는듯한 반응이었다.

         

       허억.

         

       더스틴의 10%만큼 한심함.

         

       완전 절망적!

         

       “이만 갈게.”

         

       엘리가 몸을 돌려 문가로 향했다.

         

       앗.

         

       “가려고?”

       “이제 자야지. 벌써 새벽이야. 네 말대로 차후 업무는 학교로 돌아간 뒤 상의하자.”

         

       엘리가 떠났다.

         

       파스텔은 맹한 표정이 됐다.

         

       입도 안 댄 엘리의 우유잔을 보다가 울상으로 변했다.

         

       주변을 휙휙 돌아보니 악마님이 거리를 두고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악마님! 녹차로 주셨어야죠!”

         

       반년은 같이 지낸 엘리 취향을 여태 몰랐던 건 아무튼 악마님 때문이야!

         

       악마가 떨떠름해했다.

         

       『마족이니 녹차 취향일 것은 알았지만 이 객실엔 애초에 녹차가 없다. 그렇다고 새벽 시간에 커피를 줄 수는 없으니 따듯한 우유를 대접한 거다.』

       “그럼 허공에서 녹차를 만들어 주셨어야죠! 슈퍼 울트라 마법! 뿅뿅뿅! 이걸 못하시면, 사용인 실격! 대악마 실격!”

       『어디까지 바라는 거냐.』

         

       그냥 평생 제 보호자로 사세요!

         

         

         

       #

         

         

         

       파스텔은 초대받은 매케나스 백작의 별장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매물 설명회는 끝났고 경매 담합을 위한 초대긴 해도 명분상 경매와는 무관한 만남인지라 다른 친구들은 같이 가지 않았다.

         

       “저는 매케나스 백작님을 본 순간 바로 깨달았아요! 이분은 엄청 착하신 분이구나!”

       『호오. 어떤 점을 보고 그랬지?』

         

       악마가 다리를 꼬며 흥미로워했다.

         

       파스텔은 앉은 채 양다리를 흔들었다.

         

       “시그널이 따! 따! 따! 온 거죠! 원래 착한 사람끼리는 서로 아우라가 느껴지는 거거든요! 백작님의 외형은 착한 사람 그 자체여서 본 순간, 아! 착함 레벨 백만 배인 분이시구나! 라는 생각이 빠바밤!”

       『간혹 그런 자가 있긴 하지. 신전에선 신관에게 그런 외적 모습을 관리하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사람을 설득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설득력 있는 외견이니.』

       “맞아요! 맞아요!”

         

       파스텔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하얀 치맛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제가 그래서 정장이 아니라 평소 모습대로 가는 거죠! 분홍분홍 핑크핑크해요~!”

       『치마 들치지 마라.』

       “네에~.”

         

       살짝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흥얼거리며 좌우로 흔드는 몸짓에 쓸데없이 파닥였다.

         

       『한데 그 백작이란 자는 내가 볼 때 전혀 착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더군. 특히 온몸에 걸친 금 장신구는 심성을 알 수 있는 화룡점정이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자와는 깊게 사귀지 않는 게 좋아. 언제고 뒷맛이 씁쓸할 거다.』

       “네에?”

         

       그 패션 센스가 중요한 건데!

         

       “악마님은 가끔 파스텔에게 착하지 않아서 그 감각을 모르시는 거예요! 밤중에 잠 안 자고 노래 부른 걸 야단 내지만 않았어도 알았을 텐데!”

         

       맞아맞아!

         

       『이유가 매우 구차하군.』

         

       반짝반짝 빛나는 금괴~.

         

       깨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워요~.

         

       파스텔은 마차 창문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밖을 열심히 구경했다.

         

       “다 와 가는, 우와악! 별장 완전 넓어어!”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백작의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 대문과 담벼락이 국경선처럼 덩그러니 있고 그 안으로 정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평선을 가득 메우는 넓이였다. 저 끝에 화려하고 거대한 별장 건물이 작게나마 보였다.

         

       대문에서 본관까지 오가는 데 수십 분은 걸릴 거 같다.

         

       아무리 중심지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땅값이 싸다고 해도 별장이 이 정도 규모라니!

         

       “우와앙! 백작님의 착한 심성이 느껴져요!”

         

       마치 나처럼!

         

       파스텔은 감동해 버렸다.

         

       이렇게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나쁠 리 없어!

         

       완전완전 친해져서 선한 영향력을 퍼트려야지!

         

       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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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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