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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7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침대에 누워 끙끙대는 소녀를 보며 마을 사람들 모두가 비통에 잠겼다.

     

    페니는 착한 아이였다.

    제국령이긴 해도 워낙 촌구석인 작은 마을이다. 조용한 시골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꺄르르 웃는 활력소 같은 아이였다.

     

    “하필 페니가 열병에 걸리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치유사는커녕 변변한 민간요법도 없는 이 마을에서는 부상자가 생기면 지금처럼 마을 사람이 다 같이 기도를 올리는 게 전부다.

     

    그나마 그들이 지닌 미약한 신성력으로 치유될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정도가 심한 병은 가망이 없었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합시다.”

     

    촌장이 소녀의 부모를 유도리 있게 설득하는 찰나, 주민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다들 나와보쇼!”

     

    “뭔데 그리 호들갑이야?”

     

    “의사 선생님이 왔어, 의사가! 이따시 만한 모험가도 데리고 있구만!”

     

    “의사라면 분명 치유사 같은 분 아닌가?”

     

    “맞어. 제도에서는 치유사가 아니라 의사가 황제를 고친다지.”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회관에서 몰려나가 방문객을 맞이했다.

     

    첫 인상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온몸을 덮는 긴 코트를 입고 긴 코가 튀어나온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심지어 호위로 보이는 덩치 큰 모험가도 풀 헬름을 썼다.

     

    누구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믿기 힘든 법이다.

     

    “의, 의사시라굽쇼.”

     

    촌장이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거운 분위기라 여긴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게, 역병가면의 의사가 단숨에 걸어와 촌장의 손을 덥썩 잡아 악수해왔다.

     

    “허허, 반갑소이다. 내 옆 마을에서 오는 길이오. 홍역이 유행하더라고. 이 동네도 감염자가 있을 줄 알았지.”

     

    “호, 홍역이요? 열병 말씀입니까?”

     

    “환자부터 보지. 아, 혹시 빵 남으면 내 호위에게 좀 나눠주시오. 아까부터 칭얼대서 귀찮아 죽겠거든.”

     

    “제가 숙녀도 아니고 칭얼대진 않습니다. 웅얼댔죠.”

     

    “알았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브루피노.”

     

    역병의사는 벙찐 마을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만만하게 회관으로 들어가 즉시 소녀를 진찰했다.

     

    “진단. 어디, 증상은 똑같고.”

     

    약을 처방하니 소녀의 열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숨소리가 한결 편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감탄했다.

     

    “오오,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의사라고 하셨지요. 제도에서 오셨습니까요?”

     

    밀려드는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역병의사가 껄껄대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비국가 의사회’라고 하오.”

     

    “의사회 말입니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의사가 대륙 전역을 돌며 진찰을 다니지. 벌써 삼백 년은 됐소. 누구, 들어본 적 없소?”

     

    “그렇게나 오래 됐습니까?”

     

    “아, 그렇고말고. 꼭 기억해 놨다가 소문내시오? 여기 민간의학서 놓고 갈 테니 다들 한 번씩 읽어보시오.”

     

    “예! 다른 마을에도 알려주겠습니다!”

     

    “그럼 환자도 고쳤으니 한 가지만 받아갈까 하오만.”

     

    대가 이야기에 마을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치유사는 전문직이다. 치유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건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역병의사가 그림을 한 장 꺼냈다.

     

    “이렇게 생긴 꽃이 필요하오. 주변에 서식지가 있다고 아오만.”

     

    “으음? 이건 그냥 잡초 아닙니까? 이게 필요하십니까?”

     

    “하하, 그렇소. 한 포대 따다 주면 되겠소.”

     

    “저, 정말 그걸로 충분하십니까? 돈은…”

     

    “필요 없소. 이 꽃이면 충분하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그가 요구한 꽃은 농사에 방해만 될 뿐인, 이 지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풀이었다.

     

    환자도 고쳐주고 대가도 사실상 받지 않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마을 사람들은 귀인이 내려왔다 여겼다.

     

     

    역병의사는 회관을 나서며 한숨을 쉬었다.

     

    ‘고루한 말투도 지겨워 죽겠네. 팔켄하인이나 앰브로시아는 어떻게 맨날 이러고 다닌다냐.’

     

    역병의사, 라스는 속으로 불평하며 회중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어디, 업무 시간까지 돌아가려면 빠듯하겠는데.’

     

    그가 가면 때문에 가려워진 옆머리를 긁으며 생각했다.

     

    의학서와 소문을 가능한 널리 퍼트리면서 양귀비도 찾아야 했기에 꽤 멀리까지 출장 나온 참이었다.

     

    휴가도 썼고 모험가 마법사를 섭외해 텔레포트까지 써서 겨우 동선을 맞췄다. 다른 월광궁 치유사들도 기밀로 똑같은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이렇게 실체 없는 의사회가 탄생했구만.’

     

    내의원 회의만 통과하면 의사 양성도 쉬워지니 실제로 파견 의사도 만들어진다.

     

    서순의 차이지 어차피 할 일을 미리 할 뿐이다. 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사회 활동을 한 지도 한 달째, 벌써 제국 5할 이상의 귀족령에 한 번씩은 소문을 퍼트렸다.

     

    소문이 퍼지면서 와전되고 살이 붙으면 근원이나 시기를 측정할 수 없게 된다.

     

    1주일 전에 있었던 일도 몇 년 전의 일처럼 들리기 마련.

     

    ‘내의원이 찾아왔을 때는 의사회가 실체 있는 조직처럼 보이겠지.’

     

    라스는 내의원의 동선도 파악해서 미리 선수를 치고 있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

     

     

     

    “여기 말씀하신 꽃입니다.”

     

    “확실히 받았소. 이만 돌아가지, 브루피노.”

     

    나는 포대 가득 담긴 양귀비를 확인하고 마을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브루노에게 다가갔다.

     

    “…….”

     

    내 호위를 맡기 위해 모험가 분장을 한 브루노는 마을 사람들에게 얻은 감자를 입안에 잔뜩 쑤셔넣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신났구만.

     

    “얼굴 가려 임마.”

     

    “……옙.”

     

    브루노가 헬름 턱받침을 올려 덥수룩한 수염을 숨겼다.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모험가들의 합류 포인트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여기에 의사가 있다고 들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났다.

     

    ‘이 촌구석에 웬 기사야?’

     

    브루노가 바로 경계태세를 취했다.

     

    나는 그를 제지했다. 세 명의 기사 중 한 명이 부상자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그대인가! 치료가 필요하다!”

     

    명령조인 기사의 태도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내 신분을 모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의사요. 환자 상태는?”

     

    “마물에 당하셨다. 살릴 수 있겠나?”

     

    기사는 절박해 보였다.

     

    갈색 장발의 부상자는 수염이 얼굴을 다 덮을 정도였고, 온몸에 때가 잔뜩 껴서 꼬질꼬질한 행색이다.

     

    높여 부른 걸 보면 의외로 귀족인가?

     

    “봐야 알 수 있소. 촌장, 남는 집 있소?”

     

    “예에, 제 집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진단에 들어간다.

     

    약간의 출혈이 있었지만 멎었다. 상처는 이미 아무는 상태. 파상풍이나 감염… 없고.

     

    마기에 당한 흔적… 없고.

     

    멀쩡한데?

     

    오히려 남자가 정신을 잃은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영양 부족이네.’

     

    단순히 며칠 굶었다.

     

    기사들을 다시 확인하니 행색이 비슷하니 얘들도 며칠 굶었다. 기합으로 버티나 보다.

     

    주인을 잘못 만났구만.

     

    우선 기력 회복을 위해 가볍게 치유주문을 불어넣었다.

     

    “허억!”

     

    남자가 충혈된 눈을 뜨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상처 난 복부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아프진 않을 텐데, 엄살 부리기는. 어지간히 귀한 집 자제인 모양이었다.

     

    “잠깐 가만히 있으시오.”

     

    연고와 빨간약을 바르고 대형 밴드를 붙여 마무리한다.

     

    “영양이 부족하오. 괴혈병 등 비타민이 부족해서 보이는 현상이 많소. 이걸 드시오.”

     

    “너, 너는 누구냐.”

     

    “비국가 의사회요.”

     

    “의, 의사. 지금 내 목숨을 구한 것이냐?”

     

    “그렇소만.”

     

    “하, 하하… 의사라니. 고트베르크 말고도 의사가 있던 데다 그 덕에 살아나다니.”

     

    남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잠깐, 지금 내 성을 말했는데?

     

    나는 다시 환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기도 잠시, 그가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것은 내 과거일 뿐 지금과는 관계없다. 선생, 감사를 전하겠소. 이 길가의 거렁뱅이의 목숨을 아무 대가 없이 건져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때가 껴서 갈색 머리로 보일 뿐, 금발이다.

     

    날카로운 눈매는 잘 아는 황녀님을 연상시킨다.

     

     

    게오르크였다.

     

     

    얘 여기서 뭐 해?

     

    “경의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소이까.”

     

    “어… 파우스트요.”

     

    “의사 파우스트 경. 내 황실로 돌아가면 반드시 찾아 보은하리다.”

     

    일이 귀찮아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 파우스트 경 말고도 이 대륙에 의사가 많이 있소이까?”

     

    “…그렇소이만.”

     

    “과연. 혹시 고트베르크라는 의사를 아시오이까?”

     

    “…내 수제자요.”

     

    “오오, 어찌 이런 인연이! 파우스트 경, 놀라지 마시오. 나도 고트베르크와는 아주 깊은 인연이 있소.”

     

    게오르크는 신이 나서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아셀라에게 패배해 황실에서 쫓겨났지만 얼마든지 재기할 자신이 있었소. 어느 귀족가든 찾아가서 3년 정도 사업을 계속하다 돌아가면 그만이었지. 그런데 그것부터 문제였소. 귀족가를 찾아갈 차비가 없지 않겠소.”

     

    실수였다. 굶어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무작정 마차를 타니 무전취식범으로 몰려 도망치고,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옥새가 없으니 계약서를 작성할 수도 없고. 밑바닥에 떨어져서 생각했소. 나를 떨어트린 이가 누구인가? 처음엔 아셀라라고 생각했소.”

     

    게오르크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투재판의 조건을 내걸었던 건 고트베르크, 그 주치의였소. 유능한 자요. 심지어 결투장에서 나를 직접 쓰러트렸지. 처음엔 분노했소. 그가 증오스러웠지.”

     

    게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서 다시 생존해 올라오며 많은 걸 깨달았소. 나를 패배하게 한 건 나의 오만이었소. 차기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짐이라는 호칭을 쓰고 다른 이를 깔보던 오만. 고트베르크가 아니었으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 것이오. 나는 그와 재회하면 감사를 전할 것이오.”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러고 보면 게오르크가 쫓겨난 지 2년도 더 됐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그동안 열혈 생존기를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토진궁은 카밀라의 흑마술과 아셀라의 빙결 마법으로 개작살이 난 상태다.

     

    흉물을 황궁에 그대로 둘 수도 없어서 철거가 결정됐는데, 게오르크가 돌아와서 보면 꽤 기뻐하겠네.

     

    “파우스트 경, 자애로운 그대와 만나니 고트베르크가 어떤 스승 덕에 그리 우수한지 이제 이해가 가오. 그런 인재를 손에 넣다니 아셀라는 아주 운이 좋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군.”

     

    “하하하하! 지나가던 노숙인의 헛소리로 치부해 주시오. 내 얼마 전에 그만 강도떼를 만나서 또 모든 걸 잃고 말았거든. 충성스런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목숨도 잃었지.”

     

    “저희는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황자 전하!!”

     

    손을 마주잡으며 자기들끼리 감동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게오르크와 기사들이었다.

     

    흠… 그래.

     

    나는 늦기도 했고, 남정네들끼리 우정을 나누는 장면도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빨리 자리를 뜨기로 했다.

     

    게오르크가 돌아올 때쯤엔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겠어.

     

     

     

    ***

     

     

     

    의학이 내의원에 기초제로 채용됐다.

     

    황명으로 의학이 제국에 채용된 것도 함께 이뤄졌다.

     

    덕분에 가문에 투자자가 줄을 섰다고 네리아가 편지를 보내왔다.

     

    특허권은 내지 말라고 했다. 선점한 정도면 충분하다. 의학이 널리 퍼지는 게 우선이다.

     

    “선생님.”

     

    그때 즈음, 휴고가 나를 급히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알아냈습니다.”

     

    휴고가 미소 짓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셀라 황녀님의 저주, 분석 끝냈습니다.”

     

    나는 브리핑을 받기 위해 즉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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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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