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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7

       탑에서 아직 소유권이 정해지지 않은 장소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만약 그곳이 공역, 혹은 불야성처럼 특별한 규칙이 존재하는 공간도 아니라면 그때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세계선은 증명의 층으로 가는 주요 관문이기에 거의 모든 학파가 신경전을 벌이며 때때로 무력충돌이 일어나곤 했다.

        정보 2과의 투입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원탁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지금껏 시련이 완전히 개방된 사례는 없어. 정령의 회랑도 정령학파에서 일부 구역의 ‘관리’를 맡고 있을 뿐이거든. 세계선은 일주일간 머물면 보물이 쏟아지는 재화의 산이니 학파를 불문하고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고위 마법사들이 죄다 하층에 내려와 있다고?”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그래. 조만간 더 심한 충돌이 생기겠지.”

       

        시엔은 허리에 묶은 벨트를 조였다.

        평범한 튜닉 아래 받쳐입은 검은 타이즈 덕에 몸의 굴곡이 평소보다 도드라졌다.

        통기성을 위해서인지 군데군데 살결이 드러나는 구멍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복사뼈 부근은 철저히 막혀 있었다.

        잘라내도 좋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평소보다 배로 진지한 시엔의 말을 끊을 수가 없어 입맛만 다셨다.

       

        “문제는 세계선의 결계가 완전히 파괴된 탓에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게 됐다는 거야. 사실상 탑 중간에 구멍이 뚫린 거지.”

       

        정보 2과의 담당 업무는 그곳으로 넘어오는 세력들을 미리 파악해 제거하는 것.

        그러나 추가적으로, 시엔을 포함한 극소수의 관계자들만 알고 있는 진짜 임무가 따로 있었다.

       

        “안에서 주요 인사를 만나기로 했어.”

        “누군데?”

        “악의의 층에서 만났던 비아지오 기억해? 그 사람을 견제할 만한 유일한 마법사야.”

        “비아지오라면 칠현자의 직계잖아? 그렇다면…….”

        “시잇! 이건 극비 중의 극비니까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정보가 새어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까.”

       

        정보부가 대놓고 세계선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다른 학파 소속으로 위장해야 했다.

        침대 밑 상자에서 꺼낸 로브에는 점성학파의 분파 중 하나인 ‘아스트로’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세계선에 올라가 하늘을 관찰하는 게 주요 관심사인 소규모 학파라서 시비 걸릴 일이 없다나.

        새 로브에 인형과 마가렛에게 받은 포션 등 소지품을 옮기고 밖으로 나가자 마차가 여럿 대기 중이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마차에 가방을 짐칸에 실으려던 내게 시엔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식저해 마법은 걸지 마. 어차피 통하지도 않겠지만, 일단은 예의가 아니니까.”

        “누구한테?”

        “안에 탄 분께.”

        “뭐야, 동행이 있었어? 누군데?”

       

        또 시잇-! 하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댄다.

        평소 부하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주의를 주는 걸까?

        위엄은 커녕 입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귀엽기만 했지만 뒤따라 오던 정보부 요원들은 바짝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엔은 까치발을 들며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넌 모르겠지만 아주 높은 사람이야.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전반적으로 협력받기로 했어.”

        “정말?”

        “그러니까 절대로 실례되는 행동하지 말고 내릴 때까지만 조용히 있어. 알겠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엔은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는 뜻밖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늦어, 난 그리 한가하지 않거든?”

        “죄송해요 리브라 님. 실프 공략대 사건을 처리하느라 점성학파 쪽 전갈을 늦게 확인해서…….”

        “됐으니까 빨리 들어와서 문 닫아. 신발은 벗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에 새하얀 원피스.

        은은한 분홍빛이 감도는 물빛 눈동자에 무표정한 얼굴은 성신제 때 만났던 내 사생팬 1호였다.

        분명 아이디가 천문대 묘지기였지.

        순혈 마법사인 건 알고 있었는데 시엔이 쩔쩔 맬 정도로 높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

       

        지난 번과 비슷하게 마차 바닥에는 마치 화단처럼 꽃들이 잔뜩 피어나 있었다.

        시엔이 그것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신발을 벗는 사이, 리브라와 눈이 마주쳤다.

       

        “…….”

        “저번에 열차에서 봤던 걔네? 결국 잡혔구나?”

       

        주딱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을 여기서 보다니.

        가면을 쓰고 만나긴 했지만, 운명의 실이니 별의 흐름이니 하는 점성학파 특유의 마법을 쓴다면 정체를 들키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러나 내심 걱정하던 것과 다르게 그녀가 내게 관심을 둔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리브라는 위치노트를 올려둔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내 눈에 안 띄게 저 끝에 앉아 있어, 피곤하게 말 걸지 말고.”

        “리, 리브라 님……!”

        “그땐 자는 모습만 봤는데 눈 뜨니까 더 멍청하게 생겼네. 그리고 좀 맹한데? 기억도 군데군데 비어있고.”

        “얼마 전에 천변의 방에 다녀와서 그래요. 그 후유증으로…….”

        “흐응~ 어쩐지.”

       

        알 것 같다는 눈으로 시엔을 흘기는 리브라.

        내게 달라붙어올 때와 다르게 살짝 가학적인 미소였다.

       

        “한 방에 가둬놔도 진도 못 나갈 것 같더라니 아픈 애를 비겁한 방법으로 꼬셔서 욕정을 해결한 거였구나? 기억을 되찾게 해줄 포션도 안 먹이고.”

        “요, 욕정 같은 거 안 했어요! 포션은 실수로 깨져서 그런 거고 여기 대려온 것도 어디까지나 치료 목적으로…….”

        “핀잔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이렇게 머리가 말랑한 상태에서는 세뇌되기 좋으니까. 아마 내가 이 자리에서 불륜 관계라고 한다면 홀라당 믿어 버릴걸?”

        “클락이 그럴 리가……!”

       

        어차피 주딱 말곤 관심 없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리를 끌어안은 리브라의 낯이 유독 어두웠다.

       

        이후, 우리를 포함한 정보부 요원들을 태운 마차는 점성학파의 부지 이곳저곳을 오가며 꽤 오랫동안 움직였다.

        정체를 숨기기 위한 나름의 위장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시엔은 긴장한 기색으로 정좌하고 있고, 리브라는 처연한 표정으로 위치노트를 뒤적거렸다.

        이따금 눈을 감을 때마다 마력이 휘몰아치며 천장에 새겨진 별자리가 빛나는 걸로 보아 끊임없이 마법을 쓰는 듯했다.

       

        악질 사생팬답게 내 거취를 캐기라도 하는 거겠지.

        실제로 갤러리에도 이상한 글을 쓰고 있었다.

       

        ====

        천문대묘지기

        [천칭으로 알아낸 주딱을 되살리기 위한 방법.recipe]

       

        실낙원의 영혼 2만 개

        대가를 얹는 천칭의 한쪽 추

        버튼과 버튼을 누르기 위한 50억 포인트

        처녀의 싱싱한 복사뼈 140만개

        명계의 마지막 문

       

        일단 버튼을 다시 열기 위해 파딱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다들 하나씩 모아봐요

       

        — ??

        — 님아?

        — 누가 얘좀 정신병원 데려가라

        — ㄹㅇ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

       

        “발 조심해.”

        “네?”

        “바닥 밟지 말라고. 꽃들 시드니까.”

       

        리브라가 항상 애지중지하는 꽃들은 실낙원에 남아있는 영혼들이었다.

        제국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해 성불하지 못한 자들.

        아마 마리엘의 아버지와 홀크로프트 백작가의 일원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한때 나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마(魔)와 싸워왔던 자들.

        그들의 위에 발을 올리는 것이 찜찜해 불편하게 무릎을 세우자 옆에서 시엔이 화들짝 놀라 똑같이 다리를 접었다.

       

        “아, 너는 괜찮아.”

        “아뇨! 리브라 님이 소중히 키우신 꽃이니까요. 제가 밟을 수는…….”

        “얘들이 좋다니까 상관없어.”

        “예?”

        “성신제 이후였나? 그때쯤부터 들리기 시작하더라고. 자신들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맨발로 밟혀야 한대. 특히 네가 밟아줬으면 한다는 애들도 있어.”

        “…….”

       

        이 새끼들, 성불 안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 같은데.

       

        겉으로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들 처럼 보였지만 실상을 파고 보면 녀석들 하나하나가 시엔의 복사뼈를 향해 사악한 마수를 뻗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타이즈는 발바닥까지 감싸는 형태라 녀석들은 기껏해야 꽃가루 정도밖에 묻히지 못했다.

        마차가 덜컹이는 틈을 타 몇 차례 실수인 척 꽃들을 밟고 나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스트로 학파의 관측대는 한때 내가 메릴린과 번개 구슬을 찾았던 능선에 지어져 있었다.

       

        “준비가 끝나면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 테니 며칠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정보부가 여기 온 목적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되도록 다른 학파와 마찰은 일으키지 마.”

        “알고 있습니다. 마무리되기 전까지 칼레이도스 학파 쪽과는…….”

        “내 말을 이해 못했구나. 거기뿐 아니라 다른 곳들과도 최대한 접촉을 피해야 해.”

       

        리브라가 하늘을 향해 손짓하자 구름이 걷혔다.

        드러난 밤하늘의 별들 중 유독 환하게 빛나는 것들이 세 개 있었다.

       

        “지금 여기에는 너희 생각보다 많은 신비의 주인들이 와 있어. 그리고 다들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야.”

        “설마 칠현자가…… 어째서죠?”

        “다들 누구를 찾고 있는 중인데, 너한테 말해도 의미가 없겠네. 그러니까 조심하는 편이 좋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맥 위로 펼쳐진 검은 바다에서 샛노란 번개가 꽃을 피웠다.

       

        — 쿠르르릉!!

       

        리브라는 뒤이어 몰려올 소리가 시끄럽다는 듯 안개로 하늘을 덮으며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애들은 진짜 성격이 나쁘거든.”

       

       

       

        *

       

        리브라가 훌쩍 사라진 뒤, 우리는 정보부 요원들과 함께 아스트로 학파의 마법사들의 안내를 받아 관측대 건물로 향했다.

        대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학파의 전초기지 치고는 허술해 보이는 막사였다.

        무기보다 관측 장비가 더 많아보일 정도.

        간이로 세워놓은 장벽 위에서는 보초를 서야 할 마법사들이 쌍안경을 들고 별을 보고 있었다.

       

        “세계선 안에서 보이는 별자리들은 30층의 시련을 거쳐간 마법사들의 족적을 나타내거든요. 점성학파가 아닌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이건 굉장한 연구가치가…….”

        “…….”

        “크흠, 실례. 오늘 합류하신 분들은 모두 점성학파셨죠. 짐은 안쪽에 두시죠. 숙소와 식당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관측대장 엘리오는 점잖은 학자처럼 보였지만 설명하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나와 시엔이 신혼 여행을 왔다고 하자 그는 신이 나서 침대가 하나밖에 없는 창이 커다란 방을 내어주었다.

       

        “저기 서쪽에 뜬 별자리가 보이시나요? 다름 아닌 ‘은발미소녀자리’인데 사랑과 화합을 의미한답니다. 분명 이곳을 다녀간 누군가가 새기고 떠난 거겠죠.”

        “아주 고매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을 것 같습니다.”

        “하하, 클락 씨는 말이 잘 통하시는군요. 조만간 저희 관측대에서 저 별자리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진행할 예정인데 혹시 생각이 있으시다면…….”

        “잠깐만 클락, 하늘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때 시엔이 은발미소녀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역시 기감을 활성화하자 오감으로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서쪽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연기.

        그리고 창문을 열자 느껴지는 매캐한 탄내.

        짐을 풀 새도 없이 1층으로 내려가자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장벽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미티어다. 미티어 놈들이야!”

        “벌써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리브라 님께 연락해야 될까?”

        “다들 진정해주심다. 저희가 잘 처리할 테니까 걱정할 것 없슴다.”

        “정말입니까?”

       

        허둥대는 아스트로의 마법사들과 달리 시엔을 위시한 정보부 요원들에게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보부는 마탑의 행정기관.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학파로부터 공격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엔은 당당하게 정문을 열고 앞으로 나갔다.

        나 역시 뒤에서 구경하다 릴리벨이 슬쩍 떠밀어 함께 갔다.

        선두에는 나와 잘 아는, 아니 잘 안다고 주장하는 여인이 서 있었다.

       

        “이 부지는 정보부의 거점으로 사용 중입니다. 학파끼리의 항쟁은 피하고 싶으니 가능하다면 다른 곳을…….”

        “어머, 클락 님?”

        “응?”

        “……아하.”

       

        이자젤이 입을 열자 두 여인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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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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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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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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