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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7

        

         허공을 떠돌던 모래먼지가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앉거나 위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인테리어와 마감이 말끔하게 안됐다뿐이지, 매립형 환기 시스템이나 전열 교환기 등은 멀쩡히 존재하는지 생각보다 금세 장소가 정돈되었다.

         

         …거창하게 표현하긴 했어도. 결국 과제물인 자료 금고가 박살 나지 않은 채로 바닥에 안착하고 그거에 맞아 죽은 희생자가 없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여기서 평생 살 셈인가? 헷갈릴 만한 차례도 아니지 않나? 1번과 떨거지들, 이만 나오도록…!!”

         

         “…….”

         

         슬슬 각자 주어진 번호를 확인하던, 동업자끼리 상의를 하던. 그것도 아니면 금고의 외형을 구경하며 견적내는 것도 끝났을 거라 여긴 레오나르가 좌중을 재촉했다.

         

         시험을 진행하는 것에 열심이라거나 업무에 책임감을 느낀다 하기보단, 그저 빨리빨리 순서가 돌지 않으면 이 짓거리도 끝나지 않는 다는 걸 명확하게 인지한 직장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거에 딱히 불만을 가진 사람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적어도 일이 끝나고 그가 소비자 민원에 시달릴 걱정은 없어 보였다.

         

         “우리 귀염둥이 아가씨? 175번 맞아? 그야 내가 174번이고 우리가 마지막이었으니까 틀림없겠지만 이런 건 확실히 해 둬야지.”

         

         “…맞긴 한데. 우리 제대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어? 호칭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긍정하는 부분까지만 듣고는 후다닥 몸을 돌려 켄의 번호를 확인하느라 바쁜 마리나를 흘겨봤다.

         

         하악 거리는 켄은 또 ‘부끄럼쟁이 도련님’이라 부르는 걸 보면 일종의 버릇 같은 건가 본데… 무슨 사연인지 원.

         

         아무튼. 투덜거리는 사이 레오나르의 호령에 따라 일련의 무리들이 광장 중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수가 넷, 다섯, 여섯… 일곱…? …대단한데.

         

         “뭐여 시발.”

         “야 이, 졸렬한 새끼들아…! 그렇게 많이 달라붙으면 인건비는 나오냐?!”

         “왜 아예 씨~발, 몇 십 명 더 구해다가 회사라도 차리시지 그래?”

         

         무슨 일인지 대강 파악하자마자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첫 타자부터 대규모 팀 업이 나타나서 반응이 뜨거운 건 알겠으나… 크게 관심이 가진 않았다.

         

         특별히 자신감이 흘러 넘쳐서 그런 건 아니고.

         지금 내가 더 궁금한 쪽은, 참가자들의 호승심과 귀찮음을 동시에 드러내게 한 자료 금고(Data Vault)인지 데우스 불트(Deus Vult)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니까.

         

         “음….”

         

         수근거리는 마리나와 켄을 곁눈질했다.

         

         ……주변이 전문가 천지인걸로도 모자라 모르는 걸 슬쩍 찔러볼 수 있는 팀원도 두 명이나 있지만 이제 와서 그랬다가는 괜한 신뢰도 이슈가 생길 수도 있으니, 여기서는 첫 팀이 테스트를 치르는 동안 재빨리 독학하도록 하자.

         

         먼저 두 눈을 감아서 사이버웨어의 정보가 출력되는 배경을 깔끔한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작동시키는 통신 보조 프로그램은… 네트워크 브라우저.

         

         [ 재방문을 환영합니다 아나스타샤 소비자님! ]

         [ 마지막 이용으로부터 4시간 23분 14초가 지나셨습니다! 전에 살펴보시던 ‘아동을 빨리 재우는 법’에 관한 검색 결과를 이어서 표시할까요? ]

         

         손발은커녕 눈꺼풀조차 움직일 필요가 없다.

         사이버웨어는 그저 앉거나 선 자리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으니까.

         

         그야 물론 급형 임플란트이기에 비싼 물건에 비하면 뇌파 피드백(Feedback; 출력에 따라 입력 값을 변화시키는 것) 속도가 몇 밀리초(millisecond; 천 분의 1초) 정도 느리기는 하나, 난 그런 차이에 거품무는 중독자가 아니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더럽게 조심하는 쪽이었지.

         

         전에 보던 자료를 이어서 표시하겠다는 창들을 전부 옆으로 치워버렸다.

         

         새로이 탐색하는 건 당연히 기발할 정도로 튼튼하고, 열릴 만한 문짝도 따로 보이지 않는 금고에 대한 정보와 상식.

         주제를 정함과 거의 동시에 표시된 결과창을 훑었….

         

         [ 연결이 고르지 않아……. ]

         

         아, 이런 염병.

         

         “제로, 안테나만 좀 살짝 펼쳐 줄래?”

         

         – 분부대로. –

         

         그의 등에서 막대기가 몰래 뻗어 나오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정신을 가상세계로 되돌렸다.

         사실 키는 와중에도 공공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걸 방해하는 묘한 감각이 느껴져서, 경유하는 게이트웨이를 블랙마켓 것처럼 위장하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이러다니?

         

         정말 사람 몇 증발하더라도 추적하기 어려울지도….

         

         [ 자료 금고를 포함하는 약 17,800,000개의 게시글 및 페이지가 검색되었습니다. ]

         [ 제시어와 일치하는 제목의 문서가 마스터 위키에 존재합니다. 해당 자료를 열람할까요? ]

         

         ‘웃기시네.’

         

         일단 뒤따라 올라온 제안은 바로 칼같이 삭제했다.

         

         왜냐고? 저건 시발 놀랍게도 광고가 되시겠다.

         아니, 정확히는 자세한 정보를 보기 좋게 정리한 자료화면을 보여주는 건 사실인데. 마스터 위키 자체가 유료 서비스라 펼쳐보는 순간 계좌에서 크레딧이 빠져나간다.

         

         초창기에 뭣도 모르고 피 같은 생활비를 한 번 쪽 빨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서 속이 울렁거렸다. …벼룩의 간도 빼먹는 나쁜 새끼들 같으니라고.

         

         하여간 그래서 신뢰도 99.99%의 마스터 위키 대신, 99.98%의 네트워크 지박령들이 관리-상주-하는 유저 위키.

         그 중에서도 이번 건에 한해서는 높은 전문성을 보여줄 게 분명한 사이버 엔지니어링 관련 홈페이지들의 정보를 따라갔다.

         

         [ 자료 금고는 극성맞은 넷 해커들의 공격이나, 적대 세력의 스파이 행위로부터 중요 정보를 보호, 보관하기 위해 개발된 독립형 보관소이자 패러독스 엔지니어링에서 제작하는 맞춤형 제품입니다. ]

         

         [ 인쇄물에 출력해서 실물 상태로 금고에 보관하는 게 가장 원거리 공격에 노출되기 어려운 방식이라는 건 다년간의 기업 전쟁에서 증명되었으나, 부피 대비 떨어지는 자료 적재 효율 및 훼손과 변조. 그리고 보관된 자료 검증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탄생했습니다. ]

         

         [ 백 년 단위로 데이터 휘발을 방지할 수 있는 내장 동력원, 가열 혹은 절단시에 내부 자료를 자동 폐기하는 감지 모듈, 온도와 충격에 의한 변조를 최소화하기 위해 외골격 프레임에 첨가된 형상기억합금 등 다양한 첨단 기술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

         

         ‘…결국 더럽게 비싼 상자라는 거네. 그럼 미궁이란 건 뭐야?’

         

         [ 자료 금고의 보안 등급(Security Level)을 뜻하는 등급 중 하나로. 위에서부터

         미스터리(Mystery; 불가사의)

         라비린스(Labyrinth; 미궁)

         딜레마(Dilemma; 난제)

         리들(Riddle; 수수께끼)의 4가지 클래스로 구분됩니다. 가정용 상품에 해당하는 수수께끼 등급 금고조차 평균적인 넷 해커의 공세에 약 30분간 자력 저항할 수 있는 보안성으로 유명합니다. ]

         

         ‘오….’

         

         대충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니까 평가 기준점으로 삼을 만큼 빡센 물건이고, 거기서도 꽤 알아주는 레벨의 골칫거리라는 거다.

         

         비록 ‘평균적인 넷 해커’라는 문구가 살짝 거슬리기는 하나, 그런 경우라면 나도 적당히 다른 사람들이 해결하는 걸 보고 따라하면 이상성을 들키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럼 블랙 박스랑은 다른 건가?’

         

         예전에. 관문의 통제구역에서 무심한듯 시크하게 자료를 빼돌렸던 철덩어리를 떠올렸다.

         그때야 제대로 된 인증 후, 자료 교환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몰래 끼어들었던 경우라 비교하기가 애매했지만… 어쩌면 그것도 생김새가 다른 금고가 아니었을까 했는데.

         

         [ 블랙 박스는 내부 자료의 완벽한 보존보다는, 사고 발생시 검증과 경위 조사를 위한 EDR(Event Data Recorder)에 가깝습니다. 접근허가의 수정이 자유로운 블랙 박스와는 달리, 자료 금고는 최초 가동시에 설정된 인증자만이 정상적으로 열람할 수 있으며. 모든 접속이 끊어지는 즉시 다시 봉인됩니다. ]

         

         ‘…오케이.’

         

         완벽히 이해했다고는 농담 삼아서도 못하겠지만 대강은 알겠다.

         침입자가 마구 때려도 손떼면 원상 복구되는 고난이도 퍼즐. 정말 해커들을 위한 애증의 존재라고. 으음….

         

         “좋아. 이제 안테나 치워도 돼. 땡큐.”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키며 제로의 팔을 두들겨주었다.

         

         칭찬하는 김에 아까 날 감싸느라 뒤집어쓴 먼지도 털어줄까 했는데, 얼마전만 해도 관절에 모래가 바가지로 들어가도 신경 안 쓰던 애가 최근 집안일 좀 했다고 잠깐 웹 서핑하는 사이에 스스로 장갑을 닦은 모습을 보니 새삼 대견함이….

         

         – 원하시던 정보는 얻으셨습니까? –

         

         “어…… 글쎄에…?”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끙끙거려도 봐도 더 나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보안 시스템 자체에 대한 내용은 공공연하게 떠도는 게 없어서, 애쓴 것치고는 배운 게 그다지….

         

         아, 하지만 다소 뜬금없는 결론일 수 있으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역시 이 세상 웹 서핑은 지나치게 편하고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

         

         영원한 거미줄(Web)처럼 정말 끝도 없이 뻗은 정보망의 연결고리를 계속 더듬어 나가기만 해도 관련된 지식들을 손쉽게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내 하드웨어-몸-이 더할 나위없이 고성능인지라 분명 유리한 측면도 있겠지만… 이러니까 자꾸 넷 정키가 양산되는 게 아닐까요.

         

         뭐,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깊게 몰두한 인간들이 오는 곳이 여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갈 것도 없긴 했다.

         

         ……그나저나 라비린스 급이라고 하더니. 아직도 첫 공략이 아직도 안 끝났나?

         

         “…….”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시연을 볼 예정이라 다소 무관심하게 대했던 첫 팀의 작업을 비로소 유심히 살펴봤다.

         

         바닥과 천장을 향한 면을 제외한 나머지 사면에 한 명씩 달라붙은 상태에. 각자의 뒤에 여분 인원들이 무슨 굵직한 와이어로 개조한 목덜미나 손목, 혹은 단말기를 연결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

         

         입이 끊임없이 뻐끔거리는 걸 보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바쁜 것 같은데 밖으로 새어 나오는 말은 전혀 없는 게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게다가 그 중 몇몇은 눈가와 인중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고요한 작업에 진중함을 더해주었고.

         

         …가끔 일하다가 코피 터지는 게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고 하면 너무 속 보이려나?

         

       

       

         철컹!!

         

       

       

         “와…! 꽤 빠른데? 다들 저런 속도라면 오늘 하루만에 끝날지도 모르겠네!”

         “…뭐?”

         

         겁나 불길한 소리를 늘어놓는 마리나는 그렇다 치고.

         

         묵직한 개방음과 함께, 봉인 상태를 시각적으로 알리던 금고의 붉은 광원들이 차례차례 선명한 녹색으로 바뀌는 광경을 전원이 목도하자 숨막힐 듯한 침묵이 깨지고 여기저기서 엇갈린 반응이 튀어나왔다.

         

         “제법…?”

         “제법은 지랄! 여덟 명이 달려들었으면 우리 엄마도 진작 풀었겠다야!”

         

         누군가는 감탄, 일부는 납득, 또 다른 소수는 비웃음.

         

         모인 사람들 사이에 확연한 실력차가, 혹은 비대한 자존감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거나 말거나.

         그저 묵묵히-솔직히 말하면, 화면에 있던 가면조차 어느새 사라져서 그대로 잠든 줄 알았지만 어쨌거나- 걸린 시간을 측정한 레오나르 경은 결과를 통지했다.

         

         “1번과… 그 외 기타 등등 녀석들은 총 32분 14초가 걸렸다. 그러니… 9번! 곧바로 시작하도록!”

         

         철컹!!

         

         그렇게, 8인의 드림팀이 물러나자마자 다시 굉음을 내며 붉게 잠긴 상자를 향해 누가 보더라도 같은 편임을 알 수 있는 둘이 자신 넘치는 발걸음으로 접근했다.

         

         분명 무슨 쌍둥이라고 했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 닮은 이인조 해커가 보무도 당당하게. 중앙 단상에서 금고를 집고는 삐딱하게 서더니 그에게는 질문을, 난데없이 우리 팀을 향해서는 시비를 내던졌으니.

         

         “담당자 씨? 미안한데 혹시 지금이라도 밖에 있는 장비들 좀 가져와도 되나? 저기 그쪽이랑 같이 온 꼬맹이들은 준비한 게 유달리 많아 보여서… 이거 무슨 부정행위 아니야?”

         

         “….”

         

         ……정정하겠다. 존나 무례하고 재수없는 밥맛 쌍둥이로.

         

         너 이 새끼 방금 뭐라 했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런가?

    EDR은 사실 기기명칭이라기 보단 블랙 박스 종류 중 하나로. 보통 자동차에 들어가는 그 친구입니다.

    그리고 워바홀 님이 재밌게 보셨다며 엄청난 279코인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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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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