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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8

       추앙받는 건 즐겁다.

         

       그게 돈으로 고용한 추앙이라면 다소 아쉬운 감이 있긴 하겠지만 남의 돈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짜릿한 느낌이었다.

         

       매케나스 백작의 별장에 들어서자 늘어선 하녀들에게 일사불란한 인사를 받게 된 지금처럼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으헹.”

         

       파스텔은 입꼬리가 풀린 채 몸을 떨었다. 양팔로 몸을 감싸고 비비 꼬다가 살짝 힘 풀린 다리 상태로 변했다.

         

       “아! 나는 아직 따라잡지 못한 범접할 수 없는 자본의 힘. 그런 상대가 이런 대우를 해주며언. 파스텔은, 파스텔은…….”

         

       비틀거리다가 슬쩍 악마님에게 툭 기댔다.

         

       “권력에 취하는 기분.”

         

       악마가 당혹스러워하며 몸을 부축해줬다.

         

       『이상한데 취하지 마라. 요즘 어째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는군.』

       “점점 보라색이 되는 거예요.”

         

       완전 악마 타락.

         

       이게 대악마의 봉인을 푼 대가일까?

         

       “무서워어.”

         

       장난기 어린 말과 함께 정장에 볼을 비볐다.

         

       이러다 보라보라가 되겠어.

         

       악마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럼 분홍 물감이라도 풀어라.』

       “푸핫!”

         

       이게 무슨 말?

         

       파스텔은 악마를 올려봤다. 분홍 눈동자가 둥글게 접혔다.

         

       “유치해! 악마님! 품위를 유지하세요! 정장 입고 그런 말을 하면 뿌뿌 하다구요~!”

         

       악마가 떨떠름해했다. 살짝 자존심 상한 표정이었다.

         

       『수준에 맞춰줘도 불만이군. 애초에 뿌뿌 하다는 게 무슨 소리냐. 제대로 된 언어로 소통해라. 대화는 상호존중이다.』

         

       으에에.

         

       “뿌뿌 하다는 의미를 모르시면 수준에 맞춰주신 게 아니죠! 두 배로 유치해! 파스텔 수준에 맞춰준 것도 아닌데 유치한 발언을 한 악마님은 두 배로 유치유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밀치듯 악마의 품을 벗어났다.

         

       “정말이지. 악마님 수준엔 나밖에 맞춰줄 수 없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무슨 소리를 당당히 하는 거냐. 내가 맞춰주는 거다.』

       “땡땡땡!”

         

       어이없어하는 악마에게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분홍 눈동자로 흘겨봤다.

         

       “그러니까 엄마에게 차인 거예요.”

       『아니.』

         

       악마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다 한숨을 쉬더니 애한테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저것이 실연당한 짝사랑남의 표정?

         

       뿌뿌~.

         

       정말이지.

         

       악마님 수준엔 나밖에 맞춰줄 수 없다니까.

         

       “헤헤.”

         

       이것이 대악마조차 회개시키는 위대한 파스텔 각하의 포용력!

         

       파스텔은 몸을 비비 꼬았다.

         

       나는 완전 위대해!

         

       “크래프트 후작 각하.”

         

       오잉.

         

       돌아보자 존재를 깜빡했던 집사가 슬쩍 다가왔다. 파스텔이 둘만의 세상에 빠졌다가 혼자만의 세상으로까지 진입하려 하자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거는 모양새였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으아! 죄송해요!”

         

       파스텔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분홍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집사는 물론이고 계속 나열한 채 눈치를 보던 하녀들이 안도했다.

         

       으아아.

         

       의전을 너무 당연스럽게 받아들였어.

         

       이게 권력의 부작용?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허억.

         

       갑자기 너무 양심 찔리는 명언을 생각해 버림.

         

       파스텔은 그대로 응접실로 안내됐다.

         

       “백작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넹.”

         

       집사가 고개 숙여 인사하곤 나갔다.

         

       파스텔은 심각한 표정이 됐다. 금실이 수놓아진 소파에 앉은 채 악마님이 자주 하던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악마님. 어쩌죠? 인생이 너무 즐거워요.”

         

       아빠 때문에 마음고생했던 과거가 살짝 잊힐 정도로.

         

       오이잉.

         

       이거 권력으로의 도피 아닌가?

         

       사랑은 위대하다는 발언으로 자식을 내팽개치는 아빠의 당당함에 정신이 혼란해서 생각을 포기한……?

         

       그치마안.

         

       도대체 그 사랑이 뭔지 이해해 보려고 연애를 시작하려 했더니 구체적 동기까진 짐작 못 한 악마님이 결사반대를 했다.

         

       허억.

         

       갑자기 연애를 두 배로 하고 싶은 기분.

         

       하지만 그 결사반대 덕분에 살짝 이성을 되찾고 고심해 보니까 인기인 파스텔이 연애를 시작하는 건 썩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연애 감정과 친분 감정을 구분 못 하는 애들이 많단 말이지.

         

       파스텔 얘가 이렇게 친한 척 들이대는 걸 보면, 날 좋아하나? 라는 마음이 다들 있을 거야.

         

       당장 몇 번 고백도 받았고.

         

       ―미안! 나는 친구와는 연애하지 않아! 내가 친구라 호칭했으면 연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야! 친구 관계는 연애 관계로 바뀔 수 없다! 이건 인기인의 원칙이야! 관상용 벚꽃에서 관상용(아님) 벚꽃이 되면 난장판이 된다구!

         

       개미 친구가 뿜뿜.

         

       ―앗! 여기 봐봐! 안녕, 개미 친구! 빵 조각이 맛있어 보이는구나! 혹시 너도 날 사랑하니? 역시! 너도 그렇구나! 특별하지 않은 일이지! 응응!

         

       신발이 꾹.

         

       ―으아아! 개미 친구우! 성실한 개미 친구를 밟아 죽이다니! 너 나쁜 애구나?! 완전완전 나빠!

         

       블랙리스트 추가.

         

       하여튼.

         

       그렇다고 사랑을 좀 알아보겠다고 모르던 사람의 초상화만 보고 일단 약혼을 맺는 건 악마님 말대로 뭔가 그렇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이상해! 엄마를 사랑하면 닮은 나도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딸의 외견이 아무리 닮았다 한들 학자답게 냉철히 아내와 딸을 구분해 버리지 말라구요!

         

       구분 못 하면 그건 그것대로 범죄긴 해도오!

         

       파스텔은 사랑에 고팠다.

         

       그래서 사랑 대신 권력이나 냠냠 하기로 했다.

         

       권력 냠냠.

         

       허억.

         

       생각보다 너무 맛있음.

         

       인생이 즐거워짐!

         

       위대한 권력자 파스텔 각하는 끙끙댔다.

         

       “너무너무 즐거워요.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보라색이 될지 몰라요.”

         

       아까는 장난삼아 말했지만 정말 짜릿한 미래.

         

       어라라.

         

       뭔가 수식어가 잘못된 기분?

         

       『원래부터 하극상이니 뭐니 하면서 이랬긴 했다만 최근 심해지긴 했지. 자각하니 그나마 다행이군.』

         

       악마가 턱을 문질렀다.

         

       『내 생각엔, 예의와 존중이 무너져서 그런 거 같다. 스승에 대한 예의, 보호자에 대한 존중. 이런 위계질서부터 지켜보는 게 좋을 거다.』

         

       파스텔은 끙끙거리길 멈췄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건 악마님 희망 사항 아니에요?”

         

       악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다만 세상엔 불필요해 보이는 게 굳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거다. 위계질서가 그렇지.』

         

       파스텔은 팔짱을 끼고 모범생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싫어요!”

         

       악마가 떨떠름해했다.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있는 건가?』

         

       헤헤.

         

       “악마님이 그렇게 반응하시니까 뭔가 하기 싫은 느낌.”

       『하아.』

         

       악마가 이마를 짚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모르겠어요~.

         

       원인은 악마님이니 나중에 책임져 주세요.

         

         

         

       #

         

         

         

       매케나스 백작과 복도를 걸었다.

         

       백작은 정장이 아니긴 했지만 금 액세서리로 뒤덮인 패션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정장이 아니라 완전 부유한 상인 같은 모습이라 조화로웠다.

         

       파스텔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때 패션은 완전체가 아니었네요. 식견이 트이는 기분이에요.”

       “그렇소? 일부 귀족은 구태에 얽매인 나머지 폄훼하기 마련인데 후작은 명품을 볼 줄 아시는군.”

         

       매케나스 백작이 금팔찌를 매만졌다. 실용성보다는 화려함에 치중된 외견이었다.

         

       “고대에 제사장이 썼을 거라 추측되는 예식용 팔찌지. 중요한 건 디자인이 매우 세련돼서 지금 시대에 착용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거요. 역사적 가치에 실용적 가치까지 겸비한 특급 명품이오.”

       “우와아!”

         

       굉장히 비싸 보여!

         

       파스텔은 금팔찌의 외견보다는 거기에 붙은 가격표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콩닥콩닥.

         

       매케나스 백작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금팔찌를 풀더니 건넸다.

         

       “한번 차 보시겠소?”

         

       허억.

         

       떨리는 손으로 금팔찌를 받았다. 얇은 손목에 걸치자 굉장히 넉넉하게 헐렁였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확 느껴졌다.

         

       이 무게감.

         

       내게 아주 잘 어울리는 가격표라는 걸 알려주고 있어.

         

       이런 걸 온몸에 걸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분홍분홍 하양하양에 금팔찌가 어울리지 않다는 건 내 착각이 아닐까?

         

       이 친구를 받아들여야 인기인의 본분을 다하는 게 아닐까?

         

       매케나스 백작이 안타까워했다.

         

       “이런. 후작의 외견엔 어울리지 않군. 아쉽게 됐소이다.”

         

       그럴 수가.

         

       파스텔은 힘없이 금팔찌를 돌려줬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금 컬렉션이 보관된 별도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방팔방에 여러 금색 장식물이 촘촘히 배치됐다.

         

       금화가 넘치게 담긴 보물상자에 황금으로 된 작은 비공정 모형은 물론이고 금박된 세계 지도까지 존재했다.

         

       파스텔은 입이 헤벌레 벌어졌다.

         

       경매 담합과 비즈니스 하러 온 거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갈 거 같은 기분.

         

       시선이 떠돌다가 한 책장을 발견하고 멈췄다. 가죽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오잉.

         

       홀로 눈에 띄는 지적인 컬렉션.

         

       “한 권 읽어보시겠소?”

         

       파스텔은 똑똑한 표정으로 슬쩍 책을 뽑았다.

         

       얇게 무두질된 딱딱한 가죽 질감이 느껴졌다. 펼치자 금을 녹여 쓴 글자들이 빼곡했다.

         

       우와앙.

         

       나 같은 똑똑이에게 걸맞는 책.

         

       매케나스 백작이 다른 책을 뽑았다.

         

       “마족의 가죽으로 만든 책이라오.”

         

       마족의 가죽.

         

       “전쟁 당시 만들어진 컬렉션이지. 책 한 권에 한 명씩 해서 그 마족의 생애와 최후까지 적어놓은 거라오.”

         

       손짓이 책장을 가리켰다.

         

       “현재 시세는 떨어지긴 했다만 미래 가치는 충분하지. 최근 역사학에 후원이 많아지고 박물관도 늘고 있으니 사료적 가치를 고려했을 때 장기적으론 시세가 무척 오를 것이요.”

         

       마족의 가죽.

         

       파스텔은 손이 파들 떨렸다.

         

       책이 떨어졌다.

         

       매케나스 백작이 서둘러 잡아챘다. 의아해하는 눈동자가 파스텔을 바라봤다.

         

       “후작? 왜 그러시오?”

         

       파스텔은 소스라치며 손을 떨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책장을 보다가 정말 의아해할 뿐인 백작을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족, 싫어하세요?”

         

       매케나스 백작이 더 의아해했다.

         

       “시대가 어느 땐데. 마족에게 유감은 없소만.”

         

       파스텔은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런 일을 하시죠?”

         

       매케나스 백작은 영문을 몰라 하다가 생각에 잠겼다. 인생 질문이라도 받은 듯이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결론이 났는지 양팔을 벌렸다.

         

       “사랑하기 때문이오.”

         

       주변을 둘러싼 황금색 컬렉션이 펼쳐졌다.

         

       “이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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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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