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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8

       유수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탑에 들어왔으나 흑마법사로 타락해버린 이자젤과.

        밑바닥에서 재능 하나만으로 마탑의 질서를 지키는 기둥 중 하나로 올라선 시엔.

        출신도 성향도 정 반대인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생기는 화학반응은 결코 불완전하게 연소되며 끝나지 않는 법이었다.

       

        “보아하니 클락과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꼬리치지 말아줄래? 얘는 지금 정신이 불안정해서 요양 차 여기 온 거거든.”

       

        시엔은 고압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늘씬한 다리와 기승에 어울리는 가죽바지가 로브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자 허리에 걸려있던 세검이 가벼운 빛을 반사했다.

        칠현자의 직계 마법사였던 비아지오가 현자의 약관으로 만들어낸 영역마저 두동강낸 검이었다.

        그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이자젤은 제 뺨에 손을 올리며 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남자라구요?”

        “내 눈에 그런 되도 않는 수작은 안 먹혀. 시련의 결계도 사라졌겠다 네 신원은 5분 안에 파악 가능하거든.”

       

        한 번 봐줄 테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으면 이쯤에서 물러나지-?

        정보부의 권력을 마음껏 남용하는 시엔의 협박에 가까운 제안에 이자젤이 꺼내든 것은 또 다른 무기였다.

        발 사이즈보다 다소 큰 헐렁한 단화가 시엔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머, 예민하셔라. 그럼 제가 클락 씨와 무슨 사이인지도 아시겠네요.”

        “뭐?”

        “으음, 언제였더라…… 클락 씨가 마탑에 들어오기 3년쯤 전이었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만남이었거든요. 처음 본 순간 제 가슴에 창이 꽂힌 줄 알았다니까요?”

       

        나는 너보다 더 오래 클락을 알고 지냈다-.는 어필.

        가슴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붉히자 시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 탑 밖에서의 인연 가지고 큰소리는! 나는 클락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밤마다 이, 이런 짓이나 저런 짓도 많이 했거든?”

        “아~ 많이 힘드셨겠어요.”

        “히, 힘들어?”

        “그 사람 잘 때 옆에 있는 걸 꼭 끌어안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어떨 땐 어릴 때 부모와 떨어져서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니까요? 아, 혹시 한 침대에서 자 본 적은 없어서 모르셨나?”

        “으득……!”

       

        시엔은 두 개의 신비를 사용하고 상층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이자젤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다.

        학파에서 파문당해 원소학파의 신비 ‘고결과 무결’을 잃고도 대륙 최고의 흑마법사 조직 검은별에 들어간 극마법의 대가.

        두 여인의 마력이 충돌하자 공기가 떨리고 산등성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살짝이라도 밀어내려 하면 귓볼이랑 목을 깨물고 잘근잘근 씹어대는데 다음날 밖을 돌아다니기가 어찌나 부끄럽던지, 저희 영지에서 소문이라도 돌았으면 바로 혼사 결정되는 거였다니까요?”

        “흐, 흥. 말하는 꼬락서니에 비해 발은 깨끗한 거 보니 그쪽은 클락 취향이 아니었나 봐?”

        “발이라고요?”

        “이쪽은 매일 반창고를 달고 다녀야 할 지경이라고. 스타킹이랑 양말도 매번 교체하느라 얼마나 고생인데, 아~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쟤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모양이네?”

        “…….”

       

        멀리 떨어져 있는 마법사들이 보기에는 그 모습이 마치 미티어의 떠오르는 신인과 정보부의 실세가 기싸움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나 역시 둘의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길 것 같은 쪽의 편에 붙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좋기 때문.

       

        갤러리에 중계라도 달릴까 고민하던 와중, 로브 안에서 무언가 꼼지락대며 튀어나왔다.

        귀여운 주근깨가 인상적인 인형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꾹꾹-.

       

        “응? 왜 그래?”

       

        언제부터 이런 걸 넣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가렛은 아는 눈치였으니 본래 내 물건이었겠지.

        내가 관심을 보이자 인형은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시엔과 이자젤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러더니 손에 든 붉은 가위를 꺼내어 자기 목에 긋는 시늉을 했다.

        천과 금속이 비벼지는 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오자 인형의 의지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슥삭슥삭-.

       

        “화냥년? 불여시? 누굴 말하는 거야?”

       

        슥삭슥삭-.

       

        “저주? 대신 해준다고? 왜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해. 그러면 안 돼.”

       

        내가 거부하자 녀석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로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마가렛이 준 포션을 가지고 나와 뚜껑을 땄다.

       

        “쭉 들이키라고? 내가?”

       

        끄덕끄덕-.

       

        “남이 준 건 함부로 먹는 거 아니라고 배웠는데…… 그리고 지금은 딱히 포션을 먹을 정도로 아프지도 않은걸?”

       

        끄적끄적-.

       

        “뭐야 이 종이에 적힌 건? ‘인형이 주는 건 전부 마실 것?’…… 아, 생각해 보니 그런 규칙이 있었지.”

       

        그럼 어쩔 수 없지. 규칙은 절대적이니까.

        나는 꺼림찍한 기분으로 푸른 병 안에 든 액체를 전부 마셨다.

        순간 머리가 맑아지며 나머지 기억들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인형의 정체, 애용하던 마장,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얼음 정수기까지.

       

        그러고 나서 저기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한마디가 절로 나왔다.

       

        “쟤들 뭐하는겨.”

       

        슥삭슥삭-.

       

        다시금 가위질과 함께 작두를 타기 시작한 프리나의 인형은 무시하고, 우선 둘을 말려야했다.

        나를 둘러싼 언쟁으로 불거진 갈등은 이내 본격적인 무력행사로 이어지기 직전이었다.

        시엔의 검이 반쯤 뽑혀 나오고 이자젤의 손에서 화염이 타오르자 양측의 마법사들도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말리기 위해 나서려던 순간, 그보다 한 발 앞선 존재가 있었다.

       

        — 쿠구구궁!

       

        땅울림과 함께 관측대 맞은편의 산맥의 나무가 일제히 쓰러졌다.

        산줄기를 따라 금이 가기 시작한 거대한 지형이 이윽고 거인이 몸을 일으키듯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토사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산 꼭대기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계곡의 강줄기를 따라 퍼지는 기하학적인 문양에 누군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정령문이다…….”

        “뭐?”

        “젠장, 산의 정령을 부리는 정령술사라고.”

        “무슨 개소리야? 저런 마법은 학회에도 발표된 적 없어!” 

        “게다가 이 압도적인 마력량은…….”

        “칠현자다. 메이버의 가주이자 요람의 걸작. 정령계의 여섯 대공과 계약한 심계의 주인.”

       

        작은 폭군, 린지 스트리블링.

        그 말이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나오자 산이 고개를 돌렸다.

        까마득히 작은 존재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목소리의 메아리가 관측대에 울려 퍼졌다.

       

        『시끄러.』

       

        그 한마디에 모든 마법사가 땅을 보며 침묵했다.

        시엔마저도 검을 뽑지 못한 채 얼어버렸다.

        기감을 통해 메아리의 진원을 쫓아가자 산 중턱 바위에 걸터앉은 소녀가 있었다.

        초췌한 모습이 꼭 악의의 층 버전 아녜스를 보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주억거렸으나 잡히는 건 열심히 주딱슬래쉬를 날리며 갤러리를 관리 중인 살살이뿐, 창은 없었다.

        다행히 칠현자는 우리에겐 별 관심 없어 보이는 듯 천천히 산의 정령을 데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이자젤이 불을 지른 구역이 있었으나 그냥 흙으로 덮어서 꺼버렸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

        “…….”

       

        산이 사라진 자리에 깊은 절벽이 생겨버린 미티어 학파의 마법사들은 돌아갈 길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이 아스트로 학파의 관측대에 합류하게 된 것은 해질녘 무렵이었다.

       

       

       

        *

       

        “칠현자들이 세계선에 와 있다더니 리브라 님 말이 맞았어. 불안정한 상태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면 30층 자체가 붕괴할 위험도 있어.”

        “어째서?”

        “칠현자는 신비의 주인들이야, 학파의 모든 마법사들이 쫓는 등불 같은 존재라고. 그런 마법사가 소유권 쟁탈이 한창인 곳에 있다는 사실이 퍼지면 어떻게 되겠어? 지금보다 더욱 난장판이 벌어질 거야.”

        “그렇구만.”

       

        딱히 아녜스를 등불로 삼았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신발 깔창을 몰래 얇은 걸로 바꿔놓거나 잘 때 수정구로 ‘듣기만 하면 키가 작아지는 주파수’를 틀어놓은 적은 있어도.

       

        “지금이라도 리브라 님과 만나서 최대한 회동(會同)을 앞당겨 볼게. 여기서 얌전히 있어.”

        “이 시간에 나간다고?”

        “저쪽도 언제 상황이 나빠질지 모르고 빨리 임무를 끝내야 너랑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뭐해?”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평소 루틴으로 돌아온 나는 의아한 듯한 시엔의 목소리에 위치노트를 덮었다.

        외출 준비를 끝낸 그녀는 현관 앞에서 다리를 꼬며 무언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 놓치고 있던 것을 알아차린 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잘 다녀오라는 포옹을 해주었다.

        팔에 힘을 줘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위로 들어올리자 입에서 ‘하읏’ 하는 가녀린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잘 다녀와.”

        “으, 으응…….”

       

        고개를 푹 숙인 채 관측대를 떠나는 시엔을 창 밖으로 바라보자 허리춤이 떨려왔다.

       

        — 주ㄷ닥 오ㅐ 말 안했ㅇㅓ?

        “요즘 스팸이 자꾸 오네요. 모르는 사람인데 왜 이리 집착하는지.”

        — 설ㅁㅏ 진짜로 물약 먹고도 ㄱㅣ억 안 ㄴㅏ는거ㅇㅑ?

        “오, 진정한 미식이란 자신이 한 행동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더욱 무르익는 법이랍니다. 부끄러운 추억을 하나씩 늘려가다 마지막에 터뜨려서 평생 이불을 못 덮고 자게 만들 예정이죠. 참고로 조금 전 표정도 몰래 위치노트로 찍어 아카이브에 박제해놓았답니다.”

        — 진ㅉㅏ 악ㅁㅏ 🙁

       

        물론 시엔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내 방에 찾아온 이자젤에게는 얄짤 없었다.

       

        “클락 니임~ 아직 안 주무시죠? 지금 막 생각났는데 사실 저희가 다시 만나면 사랑의 도피를 하기로…… 꺄아아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욧! 제가 아침에 일어나면 애인이 아침밥 만들어 주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바퀴벌레 들어간 샌드위치는 진짜 아니에요오옷!!”

       

        실실 입꼬리를 늘리며 다음엔 어떤 기억을 주입시킬까 기대하던 그녀는 감히 주딱을 능멸한 죄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이제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았으니 남은 건 분탕의 왕, 아니 분탕의 신의 화려한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이놈의 파딱 삼인방을 모아 놓고 쪼인트를 까야 하는데…….

        시엔의 말로는 세계선이 위험하다고 하니 일단 여기 올 수나 있나 확인해 봐야겠군.

        연회를 개최하기 전에 대표로 한 녀석만 불러보기로 했다.

       

        ====

        — 빵이없으면포인트를먹으면되잖아 : 부엉아

        — 빵이없으면포인트를먹으면되잖아 : 죽었으면 대답

        — 부엉부엉부엉이 : ????

        — 빵이없으면포인트를먹으면되잖아 : 지금 그거 대답한 거다?

        ====

       

        서로 잠수 타는 타이밍이 귀신같이 맞는 걸 보니 나 몰래 친목질이라도 하는 모양이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타는 내일, 아니 오늘 퇴근 후에 수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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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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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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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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