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령아, 목경아. 갈 곳이 있다.”
“네?”
“갈 곳…말입니까?”
“그래.”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이 워낙에 뜬금없었던 모양이다.
이번 건은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진행한 부분이 많았으니 모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친절하게 행선지를 입에 담았다.
“하북팽가.”
“하북팽가요…?”
“하북팽가를 말입니까?”
“경공 연습할 겸 달려서 다녀온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면 왕복으로 보름 안에 팽가에 들를 수 있을 터. 나는 가능한 한 빠르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원작대로라면 설득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테고.
근육뇌들이 모인 세가가 바로 하북팽가니까.
“아저씨, 정말로 가는 거예요?”
“할 일이 있다면 안 따라와도 돼.”
꼭 데리고 갈 필요는 없지.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아저씨가 어딜 가든 따라갈 거예요!”
“저도 은공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어차피 두 사람이 나한테서 떨어질 일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한 상태. 나는 나갔다 오는 김에 사 온 짐들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준비해놔.”
“네!”
“알겠습니다.”
여행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니니 알아서 잘 준비하겠지. 나는 어둑해진 방의 등잔에 불을 붙이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아저씨도 경공을 배우니까 여행이 엄청나게 빨라진 거 같아요!”
“좋은 일이지.”
“경공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이정도 실력이시라니, 대단합니다.”
목경이가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올려 쳐줘도 내 경공 실력은 이류 내지 일류 언저리인데. 이 정도 경지면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답설무흔이나 초상비는 못하고.
답설무흔은 꿈도 못 꾼다.
애초에 경공이라는 공부가 몸을 가볍게 해서 장거리 이동의 부담을 줄이고 속도를 늘리는 그런 무공이라 경지가 오르면 그런 걸 펼치게 될 수 있는 거지만, 나는 가벼움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범한 무림인의 경공이 말의 달음박질과 같다면, 내 경공은 황소가 미친 듯이 돌진하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다른 경공보다 유연성도 낮고, 섬세함도 부족하다. 하지만 돌파력만큼은 이미 수위에 올라왔다 자부할 수 있었다.
조절에 실패해서 바위나 나무에 부딪혀도 부수고 지나갈 수 있었으니까.
“아저씨, 괜찮은 거 맞아요?”
“뭐, 그냥 집채만 한 바위랑 부딪혔을 뿐인데.”
“은공, 보통 경공을 펼치다 바위에 부딪히면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가?”
무림인이 고작 바위에 부딪혔다고 죽어?
맨날 일권에 바위를 부수니 일검에 바위를 베니 했던 애들이 참 허약하구나. 나는 이름 모를 나무를 부수고 지나가며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여행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애초에 하북팽가를 목표로 내달리는 중이었기에 옆으로 샐 일도 없고.
어지간하면 객잔에서 밥 먹고 자고, 사건 터지면 적당히 위협해서 잠재워서 문제도 줄이고 있으니 정말로 평화로운 여행이었다.
매일 이렇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은 정도로.
“은공. 곧 북경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북경이라…”
이 시절 중국 수도였던가?
중국 역사에 무지했기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내 말에 목경이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중원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입니다. 중원에서 세워지고 무너진 나라들이 북경을 수도로 삼았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런 건가.”
“북경은 처음 와봐요!”
혜령이가 흥분한 듯 팔을 파닥거리며 눈을 빛냈다.
시골 촌놈이 서울 구경하러 온 꼴이니 흥분하는 건 당연한 걸까.
현대 사회에서 화려한 도시를 자주 보았던 나는 비교적 담담한 눈으로 북경을 바라보았다.
크고 화려하다.
현대의 도시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은공, 북경을 보고서는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충분히 놀라는 중이야.”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옆에서 소란을 피우는 혜령이를 쳐다보았다.
경공을 썼을 때보다 더 크게 팔을 파닥거리는 혜령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근데 왜 넌 경공 쓸 때도 팔을 파닥거리니. 경공 원래 저렇게 쓰는 거였던가? 목경이는 닌자처럼 달리고 있는데?
나는 적절한 경공의 표본이 뭔지 감이 잡히질 않아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혜령이는 어쨌든, 목경이는 북경에 못이 박힌 채로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한 번 왔던 적이 있지요.”
과거를 떠올리는 말에 목경이를 쳐다보니, 목경이는 아련한 눈빛으로 북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의 추억이라.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게 만든 거 아닌가. 조금 걱정이 되어 어깨에 손을 얹으니, 목경이는 흠칫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묘하게 얼굴이 붉어 보이는 건 착각인가?
“으, 은공.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가 있잖나.”
“예, 예예예예…”
왜 이런데.
나는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어디 가고 당황스러워하는 목경이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러는지.
뭐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 거겠지?
이 지독한 남초 세상에서 동정을 받는 게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고.
원작의 종종 나오곤 했던 상남자 행동을 떠올린 나는 적당히 납득하며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혜령이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내 팔에 달라붙어 있는 혜령이를.
“왜 그래?”
“아저씨, 피곤해요.”
“전혀 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잘도 그런 뻔뻔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럴 땐 적당히 받아주는 거예요!”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다니, 참 당당하구나. 나는 당돌한 펭귄이 볼을 부풀리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귀엽게 굴기는.
“알았으니까 슬슬 다시 출발하자. 오늘 밤을 산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저는 아저씨랑 함께하면 풍찬노숙도 괜찮아요.”
“나는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목경아, 가자.”
“예, 예…”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목경이를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
하북팽가.
북경에서도 알아주는 가문으로, 듣기로는 구성원 중 일부는 관인이라 이런저런 혜택을 받고 있다던가.
그리고, 근육뇌들이 모인 가문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별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보초들만 봐도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나는 의복을 찢어버릴 기세로 커다란 근육 덩어리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와…아저씨, 아저씨보다 조금 작아요!”
“사람이 아니라 곰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두 사람의 감상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하북팽가의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하북팽가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는 자만 인정해주는 세가. 기세에 위축되었다간 하북팽가 문 앞에서 축객령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누구냐?”
“나는 위리엄이라는 사람이오. 하북팽가에 볼 일이 있어 찾아왔소.”
삿갓을 위로 젖힌다. 뒤이어 내 얼굴을 본 보초들이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익숙한 흐름이다.
“색목인?”
“설마…사자검협?”
“알아봐 주니 고맙군. 혹 가주님께서 세가에 계시는가?”
“예. 지금쯤 수련을 하고 계실 겁니다.”
나는 품에서 제갈현상이 써준 서찰을 꺼내 보초에게 건네주었다.
“벽력도제 선배를 뵙고자 무림맹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네. 혹 방문을 요청해도 되는지 기별을 넣어주겠나?”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초는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한 명의 보초는 헛기침을 하며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혜령이와 목경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도 남자구나.
나는 혜령이의 가슴에 시선이 길게 머무른 것을 눈치챘지만 구태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설사 부처님이라도 수박 두 개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눈이 안 갈 수가 없을 테니까. 저건 불가항력이었다.
자연재해에 준하는 수준으로.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보초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들어오시랍니다.”라며 겨우 침묵을 깨트렸다.
…드디어 하북팽가인가.
우리는 보초가 열어준 문을 넘어 하북팽가에 도착했다.
“가주님과는 언제 뵐 수 있겠나?”
“가주님의 방으로 바로 가시면 될듯 합니다. 마침 할 일이 없으시던 차라…”
그건 다행이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빠르게 용건을 마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좋은 일이니.
“너희 둘은 손님방에서 기다려라. 빨리 용건을 마칠 테니.”
“잘 다녀오세요!”
“일을 잘 마치고 오시길…”
나는 곧바로 가주가 있다는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주님! 사자검협 위 소협이 왔습니다.”
“들여보내거라!”
호랑이가 포효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방문을 뚫고 내 고막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화통한 목소리로구만.
나는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북팽가의 가주와 눈이 마주쳤…
“자네, 혹시 홀몸인가?”
뭔데.
나는 내 몸을 눈으로 훑으며 던진 생뚱맞은 질문에 굳고 말았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