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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9

        로즈마리는 펜릴에게 미리 지시를 내려놓았었다.

       

        – 언니를 마주치는 순간 바로 달려와서 고개를 박아야 해. 알겠어?

       

        펜릴은 로즈마리의 명령을 착실히 따랐다. 에테르 앞에 다가와서 낑낑 앓는 소리를 내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재앙급 마수답지 않은 굴종 연기에 헤를라인도, 학급 친구들도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저 녀석, 왜 저러지?”

        “전에 형한테 들었어. 펜릴은 강한 상대에게는 바로 꼬리를 내린다던데….”

        “뭐? 그러면 에테르가 저 마수보다 강하다는 거야?”

       

        재앙급을 앞에 두고도 떠들어대는 것들을 보니 긴장감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뭐, 상관없다. 바짝 긴장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마수에게 노출된 친구를 도와주기는커녕 구경만 하고 있는 꼴이라니.’

       

        하도 우스워서 다른 의미로 헛웃음이 나온다.

       

        “야, 이 바보야! 뭘 멀뚱거리고 있어!”

        “빨리 이쪽으로 와!”

       

        물론 그렇지 않은 녀석들도 있는 것 같다만.

       

        단발머리 소녀와, 키 작은 요호족 꼬맹이. 두 소녀가 제일 먼저 에테르에게 손짓하며 위험을 알린다. 

       

        …저 둘은 이름이 뭐였더라? 눈엣가시다. 큰 걸림돌이 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한다. 로즈마리는 눈가를 좁혀 두 학생을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에테르! 선생님이 벽 만들어 줄 테니까 엄폐하면서 돌아오렴!”

       

        한편, 헤를라인 교수는 마법을 다중 전개하며 펜릴 앞에 커다란 토벽을 세웠다. 얼마 버티진 못했다. 재앙급의 앞발질 한 번에 급조한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요호족 소녀가 무너지려는 벽을 바로 세운다. 연성진도, 사전 영창도 없이 토벽을 재구축한 것이다. 에테르는 그 틈을 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날 수 있었다.

       

        ‘그래봤자 부질없는 짓이야.’

       

        이미 언니는 보고 말았다. 재앙급 마수가 자기 앞에서 꼬리 내리는 모습을.

       

        기억을 잃었다면 이번 걸 계기로 조금은 떠올리고 말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또한 급우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재앙급 마수가 왜 언니에게 바로 굴종하였는지를.

       

        어딘가에서는 틈이 생긴다. 그 틈을 공략하며 큰 언니를 잘 구슬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마왕군으로 돌아오고 말겠지.

       

        무엇보다도 클리온 황자를 이용한 계획이 틀어졌으니 이젠 이쪽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자, 언니. 내가 언니씩이나 되는 사람 몰아붙이려고 성심성의껏 짜낸 계략이야. 가서 멍멍이를 쓰다듬건, 얼빠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건 하라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부채로 슬쩍 막는다. 이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된다.

       

        그리고 에테르는 펜릴의 미간에 플레어를 때려 박았다.

       

        “…어?”

       

       

        **

       

       

        힙색 깊은 곳에 손을 넣었다. 까끌까끌한 감촉. 스크롤 두 장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떡할까.

       

        로즈마리의 의중은 진작 파악했다. 남은 문제는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사용해야 하는 플레어는 두 발. 반면에 양장본에서 빼다 쓸 수 있는 마력량으로는 한 발밖에 쏘지 못한다.

       

        물론 플레어는 절멸급 마수의 파괴를 상정하고 만든 마도였기 때문에 재앙급을 상대로는 일격사가 가능하다. 빗맞히더라도 이 녀석에겐 치명타가 되겠지.

       

        [그런데 이 거리에서 쏘면 안 되잖아요.]

       

        양장본의 말대로다.

       

        펜릴과의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여기서 플레어를 쏘는 건… 그래, 155mm 야전포를 방탈출 카페에서 발포하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두 발을 쏘기로 했다.

       

        [아니, 미쳤어요?]

       

        욕하지 말고, 한 발 더 쏴 재낄 수는 없는지나 고려해 봐.

       

        [그럴 거면 마력초를 피우세요!]

       

        그럴 시간 없다. 불붙이고 마력 장전할 때까지 아무리 빨라도 30초가 걸린다.

       

        …흠. 주변에 있는 마력 끌어다가 못 쓰나?

       

        [마력이요? 마수가 잔뜩 출몰하는 던전에 마소가 풍부하면 그게 정령 놀이터지, 마수 사는 곳이겠…. 어라.]

       

        항변하던 양장본의 말이 점차 누그러진다.

       

        주변에 마소가 풍부하게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영 딴판으로 말이다.

       

        직관적으로 그럴 거라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설이 적중한 모양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떻게 아신 거예요?]

       

        빛.

       

        [빛?]

       

        특별한 장애물이 없는 한 빛의 세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예를 들어, 랜턴의 복사압을 생각해보자. 몇 가지 가정을 섞어 계산하면 던전을 가로지르는 동안 최소 몇 미터 정도는 시야 확보가 되었어야 했다. 실제로는 1m 앞을 겨우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까 중간에 뭔가 들어차 있는 것 같다고 넘겨짚으신 게 그거였군요.]

       

        어…. 확실히 검증하기는 어려웠지. 금안족의 몸으로는 마소를 쉬이 못 느끼니까.

       

        그렇다고 여기 존재하는 마소는 4대 원소의 마소도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랬다면 감각 좋은 누군가가 벌써 감지하고 얘길 했겠지.

       

        상관없다. 지금은 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

       

        쓸 수 있으려나?

       

        [효율은 낮지만 이 정도면 보존 법칙에 위배되진 않을 거예요.]

       

        좋아, 간만에 활약 좀 해 줘라.

       

        [그럼 이제부턴 책상 서랍에 안 넣고 다니기에요. 저랑 늘 붙어 있으셔야 해요. 아시겠어요?]

       

        툴툴거리면서도 해줄 건 다 해준다. 주변에서 마소를 끌어모은 양장본이 두 개의 플레어 스크롤에 방대한 마력을 때려 박기 시작한다.

       

        두 스크롤 사이의 간격은 4.180cm. 내가 있는 위치와 마수가 있는 위치를 가늠하여 책정한 값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사고하기를 불과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콰앙!!

       

        녀석의 미간에 고출력 레이저가 연달아 박힌다. 펜릴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 나갔다. 눈을 감았다 뜨니 벽에 박제가 되어 있었다.

       

        “어어….”

       

        가늘게 떠는 여자아이…. 아니, 이 던전 주인의 목소리.

       

        나는 숨을 몰아쉬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일격사다.

       

        “야! 괜찮아?”

       

        곧바로 몸을 점검하고 있으니 프레이와 로테가 차례로 달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 친구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는데, 대부분은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잠식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설명이 필요하겠는걸.

       

        “혹시 몰라서 플레어를 들고 왔어요. 그…. 아시죠?”

       

        그러자 대부분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구나…. 그래서 펜릴이 바로 머리를 숙인 거였어.”

        “난 또 뭐라고.”

        “근데 플레어 진짜 세다! 사용하는 거 처음 봤어.”

       

        괜찮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주었다. 그때 내 머리로 무언가가 딱 떨어졌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쌌다. 아프진 않았고, 조금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헤를라인 선생님이 고목 스태프를 손에 쥔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험했잖아. 다치면 어쩔 뻔했어?”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펜릴도 펜릴이지만 영거리에서 플레어를 쏘면 어떡하니?”

       

        연거푸 숨을 내쉬는 헤를라인.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방관만 하고 계셨던 공녀님께서 드디어 행차하셨다. 로즈마리는 우리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헤를라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맞아요. 그 거리에서 그런 마법을 쓰면 시전자도 큰 피해를 입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개발자인 언니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라?”

       

        그녀가 내 몸 구석구석을 훑더니 눈을 크게 뜬다.

       

        “왜 상처 하나 없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잠깐 동안, 로즈마리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걸로 너랑 나랑 동점이다. 꼬우면 전자기학 공부하고 오든가.

       

        “그보다도 내가 다치길 은근히 바란 것 같다?”

        “아뇨? 왜요?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상한 의미로 곡해하지 말아주실래요?” 

        “아니. 말투가 뭔가 기대하는 듯해서 말이야.”

        “원래 제 어조가 이럴 뿐이에요!” 

       

        거꾸로 공격하니까 재미있다. 이야, 이거구나. 이 맛에 날 몰아붙였던 거구나. 중독성 있는걸.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이번에 나타난 건은 선생님이 책임지고 이사회에 보고할 테니까 혹시라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여기서 얘기하렴!”

       

        보스를 잡은 이상, 이 던전은 죽은 던전이 된다. 최소한 며칠은 어떤 마수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친 학생은 먼저 무리를 지어 떠났다. 펜릴의 사체에 관심을 가지는 몇몇 친구들은 나와 함께 남았다.

       

        나는 스태프를 돌리며 펜릴에게 다가갔다.

       

        “제가 잡았으니까 제가 뜯어봐도 되죠?”

        “어, 응. 그렇지. 해체할 줄은 아니?”

        “그럼요. 3년 넘게 해 봤죠.”

       

        헤를라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로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치를 챘는지 짧은 신음을 흘렸다. 프레이는 그냥 프레이였고.

       

        “잠깐만요, 언니!”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한숨이 나온다.

       

        “우리 공녀님은 또 왜 그러세요?”

        “여기 이쪽 보세요! 으리으리한 전신 거울이 있어요!”

        “잘됐네요. 가져가서 공녀님 방에 걸어두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조금 특별한 거울 같아요!”

       

        와, 이것 봐라. 재앙급이라 그런지 마석도 다들 상등품이네. 이거 다 연구에 도움이 되겠는걸.

       

        “언니이이이!”

        “알았다, 알았어.”

       

        남은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떽떽 소리를 지르는 로즈마리에게 다가갔다. 그녀 말대로 보스방 한쪽에 2m 가까이 되는 높이의 전신거울이 있었다.

       

        랜턴으로 거울을 비춘 로즈마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목소리를 한층 높인다.

       

        “이 거울 정말 깨끗한 것 같아요. 어때요, 전리품으로 하나 더 챙겨가시지 않겠어요?” 

        “거울은 화장실 거울 보면 되는데.”

        “언니가 사내아이예요? 숙녀라면 방에 이런 것 하나쯤은 들여놓아야 된다구요.”

        “평생 사내새끼 하련다.”

       

        그러고 보니 로즈마리는 내가 빙의자인 것도 모르지. 틀림없이 내가 기억을 잃어버려서 자기가 절멸급 마수라는 것도 까먹었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 번만 봐 보세요. 여기 머리도 다 뻗쳤네! 빗질은 하고 다니시나요?”

       

        로즈마리는 내 손목을 잡아끌어서 거울 앞으로 데려왔다. 왜 이러는 걸까 싶은 호기심에 거울을 슬쩍 쳐다보았다.

       

        “……뭐야.”

       

       당연하게도, 거울 건너편에 비친 소녀는 분명 ‘나’였다.

       

        …머리카락이 새하얗다는 점을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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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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