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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심심풀이로 읽었던 여러 소설 중,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
연애 경험은커녕 인생 경험조차 없던 그 시절의 나는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던 작은 언덕에 대해 읽을 때마다 골드필드 영지의 황금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떠올리곤 했다.
끝내주게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골드필드 영지의 그 작은 언덕.
언젠가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언덕 위에서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부른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철없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내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칭송받아 마땅할 영웅이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인.
나는 실비아가 숲 밖으로 나가길 바랐다.
“…애쉬, 너 지금 그거…”
실비아는 눈을 크게 뜨며 물 밖에 나온 잉어처럼 연거푸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 모습조차 너무나 귀여워서, 새어 나오는 미소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란 고향엔… 아버지가 짓고 있던 이 층짜리 작은 저택이 있어 실비아. 언젠가 아들이 신붓감을 데리고 오면 독립시켜주겠다고 지으셨지. 끝내 완성은 시키지 못했지만…”
“… 애쉬,”
“나는 실비아를 그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실비아와 함께라면 이 숲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욕심을 부리자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멋진 신부를 자랑하고 싶고, 실비아와 그곳에서 살고 싶어.”
녹색의 여인은 내게 얼마든지 도망쳐도 좋다고 말했다.
어쩌면 정령의 여왕이 내게 남긴 그 말은 그저 내 도망칠 구석을 꾸며주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하며 뱉은 헛된 미사여구일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면, 이 여정의 끝에 결국 실패한 내가 마왕의 손에 죽어갈 때 느낄지도 후회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그마한 위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왕을 죽이고, 이 빌어먹을 저주를 풀기를 결심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내가 보이는 이 용기는 알량한 착각과 착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내가 직접 마왕의 손아귀로 들어가자는 말을 꺼내게 될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내가 제정신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내, 이 과감한 결심에는 앨리스 누나와 실비아라는 뛰어난 무력의 두 영웅이 나와 함께할 것이라는 판단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내, 이 발칙한 결심의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못했다.
내 가장 큰 동기는 오직 실비아였다.
나는 실비아가 평생 이 숲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가둔 채 살게 두고 싶지 않았다.
보답받지 못하는 희생 끝에 그녀가 쓸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실비아를 자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예쁘고 멋지고 강한, 그 용사 실비아가 바로 내 연인이라는 걸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내 고향을 그녀가 사랑하길 원했다.
내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그 아름다운 황금 들녘을 그녀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실비아.”
나는 그 모든 소망과 욕망을 가득 담아.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랑 결혼해 주세요.”
*
실비아는 정지했다.
마치 숨이 멎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대로 굳어 돌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숨 쉬는 걸 잊었는지 옅은 호흡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하나는 자기 가슴에 또 하나는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댄 양손마저 미동도 없이 떨리지 않았고, 세차게 흔들리던 그 불꽃 같은 눈동자 역시 우뚝 멈추었다.
오두막 안에 불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녀의 피부 위에 드리운 빛은 넘실거리듯 춤추건만, 그녀는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이 고백은 실비아를 설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내 소망이자 욕망이기도 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이 숲 밖을 나가 다른 이들의 축하와 시선 속에서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함께 하고 싶어요.
굳이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왜 그 두려운 마왕의 면전 앞으로 걸어가려 하는지, 왜 그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는지,
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멈추어 선 것이리라.
따라서, 나 역시 그녀처럼 굳어있었다.
굳은 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재촉하지도 않고, 두려움도 숨기며, 천천히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숨이 폭발하는 것처럼 들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
제 입가를 가리고 있던 그녀의 손이 자기 입과 턱을 완전히 틀어막듯 덮어 쥐었다.
눈이,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니, 그녀의 얼굴 전체가 움직였다.
실비아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녀는 양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니… 잠깐…”
“…실비아?”
“하지만… 위험한데, 너무 기뻐서… 잠깐…”
그녀는 완성되지 못하는 문장을 마구 중얼거렸다.
“허락할 수 없어… 위험해… 마왕은… 애쉬는 죽으면 안 돼서… 나는 못 견딜 거니까…”
“…”
“그런데, 너무… 너무 기뻐서… 나도 애쉬랑 같이 살면… 결혼해서… 살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
“아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위험할 게 분명한 여정.
그리고 그 길목마다 서 있을 자신의 실패의 흔적들.
그 모든 것을 회피하고만 싶은 심정이 여전히 너무나 강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내가 제시한 그 미래는 실비아에게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마왕을 잡으러 가자는 내 제안에 무조건 거절하려고 했는데, 너무 놀랍고 기뻐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실비아.”
“… 안돼… 안 되는데…”
“나랑 결혼하는 거, 싫어?”
“흣,”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럼 나와 결혼해 주세요. 그 문장에만 대답해. 그 문장만 생각해 봐.”
“안돼…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는 속지 않을 거야.”
“실비아…”
그녀의 눈동자는 멈춰 있던 반동인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이었다.
공격하려면, 그녀의 의지를 꺾으려면 지금 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놓아도 되고, 버텨도 될 텐데,
그녀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텐데, 그녀는 힘없는 소녀처럼 팔랑거리며 내게 날아왔다.
나는 그런 실비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실비아…”
“아, 안돼… 안돼, 안돼,”
천천히 턱을 그녀의 어깨 위로 끌어올려 그녀의 귓가 근처로 내 입을 가져갔다.
“결혼하자.”
“으아으,”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너무나 잘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로 파고들듯 고개를 움직였다.
“그럼 나를 가둬둘 필요도 없어. 그렇잖아. 우리 집… 나랑 실비아가 살 집… 생각해봐…”
“…윽, 흣,”
실비아의 몸이 점점 내게 기대져 온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받치며 손을 빼내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단단한 몸이 흐물흐물 내 품속으로 떨어졌다.
“나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
“…”
“정말 대답 안 해줄 거야?”
실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양팔을 들어, 내 목을 감싸 쥐듯 끌어안았다.
*
앨리스는 새카만 하늘을 향해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깃덩이인 채로 맞이한 밤이다 보니, 지금이 몇 시인지, 앞으로 해는 몇 시간이 더 지나야 뜰지 알기 어려웠다.
애쉬가 실비아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년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미친 년이고, 몇 배는 더 애쉬를 아끼는 것 같으니까.
약혼자를 빼앗겼다는 분노 같은 건 처음부터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앨리스에겐 애쉬를 향한 연심 같은 건 딱히 없었으니까.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애쉬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미래에 딱히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몇 년이나 보지 못했던 애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솔직히 없었다.
그저, 마리아의 남은 유일한 가족인 그가 행복하다면 앨리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실비아라…”
처음엔 세뇌 혹은 단순히 정이 든 것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애쉬는 진심으로 실비아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그 실비아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니,
솔직히 실비아가 애쉬를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애쉬가 실비아를 대하는 태도에는 두려움이나 위화감이 없었기도 했고, 오히려 실비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앨리스는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뭘 어떻게 했길래 저 실비아를 구워삶은 거야.”
실비아를 사랑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실비아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나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실비아는 단순히 무력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차갑고 날카로운, 아카데미 안에서도 무척이나 친해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었다.
아마 바보같이 실실거리면서 그 어떤 상대에게도 허물없이 다가가던 마리아 같은 사람만이 실비아와 간신히 친해질 수 있겠지.
“하, 진짜… 어떻게 되먹은 남매야.”
앨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리아의 동생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애쉬는 마리아만큼 붙임성이 좋은 녀석은 아니지 않았나?
어릴 땐 애쉬도 마리아 못지않은 장난꾸러기였지만, 점차 나이를 먹더니 소심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아마 마리아의 재능에 커다란 벽을 느끼고 나서부터 조금씩 의기소침해진 것이 계기였으리라.
하지만, 그런데도 실비아를 저렇게나 사로잡다니,
그 남매에겐 무언가 특별한 페로몬이라도 나오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 잘하나…?”
앨리스는 잠깐 발칙한 상상을 하다 금세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붕붕 저었다.
미친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상대는 애쉬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그 애쉬.
맨날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꼬맹이.
내 등에 도마뱀붙이고 도망치고, 잡히면 에릭이 시켰다고 변명하던 간악한 꼬맹이.
겨울이 되면 차가워진 내 볼에 호호 입김을 불어주던 꼬맹이.
맛있는 게 생기면 자기가 먹기도 전에 먼저 마리아와 나한테 달려와 건네주던 그 착해빠진 꼬맹이.
“…”
앨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시 있을 리 없는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골드필드 영지의 화목한 가정.
그 행복한 가족 중 부모의 머리에 자신과 애쉬의 얼굴이 흐릿하게 덧씌워진다.
앨리스의 귓가에 애쉬가 남긴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당연히 누나랑 결혼할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응, 좋았겠다.’
앨리스는 조용히,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나도… 조금은… 기대 했었어.”
하지만, 그건 이젠 닫혀버린 미래였다.
애쉬에겐 이미 실비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앨리스에겐 보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가슴팍을 매만지다, 살짝 벌어진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살갗이 아물다 손가락을 꼭 물었고, 손가락은 화상을 입으며 점차 익어갔다.
앨리스는 헛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잡아 뽑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이 몸에 남은 시간은… 대체 얼마일,”
“누나!”
갑자기 들린 애쉬의 목소리에 앨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애쉬는 실비아의 손을 붙잡고 오두막 문을 열며 소리쳤다.
“설득했어!”
“…뭐?”
“설득했다고!”
…허락했다고?
마왕에게 가는 걸?
저 미친년이 진짜!
앨리스는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실비아는 온통 새빨개진 얼굴로 앨리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애쉬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앨리스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어떻게?”
“우리 결혼해!”
와장창,
앨리스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지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 아?”
.
아이고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