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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9

     

    자신을 고치면 계약을 이행한다.

     

    아셀라가 내게 그렇게 선언했다.

     

    “기아스의 맹약 말이지요.”

     

    “맞아. 공자가 반드시 이루고 싶었던 소원 말이야.”

     

    “음.”

     

    아셀라의 저주를 고쳐서 가장 기대되는 결과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유발하는 남은 배드엔딩들의 삭제다.

     

    저주는 아셀라가 가진 마법 재능의 대가다.

    이 세상에선 대가가 없으면 보상도 없다.

     

    아셀라가 마법으로 일으키는 대부분의 배드엔딩, 이를테면 고위계 공간마법으로 용군단을 소환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없어진다.

     

    ‘그리고 아셀라가 미친 악녀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

     

    아직 속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아셀라는 표독하긴 해도 내가 아는 황제만큼 완전히 미친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휴고는 저주의 매개인 대마녀의 영혼이 흑마술의 전파를 위해 인간성이 잘려있고, 아셀라와 융합하면 불안정해질 것이라 했다.

     

    미래의 아셀라가 그리된 건 이 영향이 아닐까 싶다.

     

    마력폭주 사건 때 대마녀의 혼과 융합해 맛탱이가 가버린 거지.

     

    친모를 죽인 충격까지 가해져서 뭐…

     

    힘들기도 했을 테고.

     

    조금 농담을 보태자면 황제가 아셀라의 본성이고 그녀의 혼이 워낙 강대해서 대마녀도 잡아먹었다는 쪽이 내겐 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뭐, 어쨌든.

     

    아셀라에게 볼일은 끝난다.

     

     

    다만 황실에서 할 일이 더 있냐 하면 의사로서 커리어가 있긴 한데.

     

    ‘효율이 안 좋아.’

     

    의학의 씨앗을 제국 전역에 퍼트렸으니 내의원에서 할 수 있는 핵심적인 활약은 했다고 생각한다.

     

    후작령에 제약공장도 세웠고, 황제로부터 독립군사권도 얻었다.

     

    영지로 돌아가 가문에서 활동하는 게 업적을 쌓기에는 더 편할지 모른다.

     

    내의원에서는 늘 정치 파벌이 갈리니 명확한 우두머리가 될 수 없을뿐더러, 탑이 된다 한들 결국 황족의 아래다.

     

    대학병원 출신 의사가 새 대형 종합병원을 건설하는 느낌이 좋지.

     

    ‘슬슬 다른 배드엔딩도 신경 쓸 때고.’

     

    101개의 배드엔딩 중 아셀라가 유발하는 건 정확하게 52개다.

     

    그 외의 것 중 지운 건 사룡이나 휴고 정도고, 아직도 마흔 개 넘게 남아있다.

     

    마왕군과의 싸움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 미리 대비하면 할수록 좋으니까.

     

    용사파티에서는 직접 뛰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도움도 안 될 테고, 용사에게 최고의 파티를 준비해주는 쪽이 효율적이다.

     

    음, 용사라.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좀 있고.

     

     

    그런 고로.

     

    아셀라와의 계약을 이행하기에 나쁘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됐다.

     

    “신경 써주고 계셔서 기쁠 따름이네요, 황녀님.”

     

    “후후, 그럼. 나 같은 주군이 또 어디 있겠어.”

     

    “천상천하, 아셀라 황녀님 한 분뿐이죠.”

     

    아셀라는 내 아첨에 여느 때처럼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대신 내게 충성해.”

     

    어느새 아셀라가 대군주와도 같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제국의 황녀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에게 너의 재능과 헌신을 바치렴.”

     

    요즘 기력도 부족할 텐데 이만한 위압감을 내는 걸 보면 역시 천상 황제 체질이시다.

     

    물론, 충성이야 바치지. 주치의로 월광궁에서 월급 받는 한은.

     

     

    대답하려 입을 여는 찰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공자, 피 나.”

     

    “네? 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디버프 증상이었다. 스테이터스 상으로 체력이 엄청 줄지는 않는다. 사탕과 브로치의 효과로 충분히 커버되기에 문제는 없다.

     

    다만 이런 식으로 출혈 효과가 종종 발생하기에 조금은 귀찮아졌다.

     

    “공자, 너 어제 몇 시간 잤어?”

     

    아셀라가 내 팔을 거칠게 잡았다.

     

    “아이, 별일 아니에요. 금방 멎습니다.”

     

    “얼마나 잤냐고.”

     

    “흠, 세 시간인가. 요즘 조금 바빠서요.”

     

    제약과 문서 정리하고 환자 보고, 최근엔 아셀라 상태 검증하느라 거의 못 잤다.

     

    아셀라가 달각, 파란 병을 꺼냈다.

     

    “너 이거 먹고 자.”

     

    “예에? 그럴 때 쓰는 약 아니에요. 그렇게 남용하면 큰일 납니다.”

     

    “안 그러면 또 금방 일어나서 뽈뽈 돌아다닐 거잖아. 아니면 전처럼 묶어놔야 잘래?”

     

    “에이, 그것도 잘 못 하시면서.”

     

    실실 웃으니 아셀라가 얼굴을 붉히며 내 옆구리를 홱 꼬집었다.

     

    “알았어요. 아파.”

     

     

    결국 그 날은 강제로 내가 만든 수면제를 먹고 자게 됐다.

     

    아셀라는 자기 침대를 내주며 온갖 생색을 다 냈다.

     

    어차피 애착인형으로 쓸 생각이면서.

     

    침대에 누우니 따끈하고 푹신한 게 순식간에 졸음이 덮쳐왔다.

     

    흠, 생각해보니 수면제는 임상실험을 한 적이 없었다. 내게는 필요가 없었으니.

     

    “공자, 졸려?”

     

    “예. 어째 금방 잠들…”

     

    눈꺼풀뿐만 아니라 입술도 무겁네.

     

    예상보다 성능이 어마어마했다.

     

    눈이 사르륵 감기고 어깨가 붕붕 뜨는 게 굉장히 기분 좋다.

     

    “라스? 벌써 자?”

     

    사락,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몸 왼쪽에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셀라가 달라붙은 모양인데, 나는 잠에 취해 몽롱한지라 정확하게 인식할 순 없었다.

     

    “…진짜 잠들었니? 애가 기척도 없어지는 주제에 잠은 얕게 자니 방심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녀가 톡톡, 내 콧잔등을 두드리다가 슬그머니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후후. 약을 먹었으니 안 깨겠지.”

     

    아셀라의 사악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의식이 멀어졌다.

     

     

     

    ***

     

     

     

    다음 날, 수면제의 효과로 푹 잔 덕에 평소보다 아주 개운한 기분으로 깼다.

     

    아침 진료를 보는 내내 아셀라는 어쩐지 자기가 이겼다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뭔데.

     

    그러고 있으니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황제가 나를 호출하는 내용이었다.

     

    “왜 폐하께서 공자 너만 찾으셔?”

     

    “전들 알겠어요.”

     

     

    월광궁을 나서서 타냐와 길을 걷는다.

     

    도중 황궁으로 귀환 중인 기사단 부대와 마주쳤다.

     

    그 선봉에서 당당하게 백마를 타고 있던 헤이케가 나를 보고는 위엄 있게 외쳤다.

     

    “아, 고트베르크. 오랜만이군.”

     

    “오, 황녀님. 안색 좋아 보이시는데요. 원정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녀가 말에 탄 채로 여장부처럼 호쾌하게 내 어깨를 두들겼다.

     

    “물론이다. 버릇없는 도적단에게 본때를 보여줬지. 소식은 들었다, 고트베르크. 제국의 옥체를 구하다니, 대단한 위업이었다.”

     

    “하하, 여기저기서 칭찬은 많이 들었지만 전하께서 치켜세워주신 게 가장 기분 좋군요.”

     

    “음, 내가 황실을 비운 동안 위기를 막아주어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이번 출정은 굉장히 기셨군요.”

     

    헤이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돌아오는 길에 흑마술사와의 전투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후속조치를 취했다. 제국에도 생각보다 흑마술사가 널리 숨어있었다.”

     

    “어라, 흑마술사를 토벌하다 오신 겁니까?”

     

    “그 말대로다.”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No. 088 악마숭배 23% → 2%]

     

     

    어쩐지 이 배드엔딩이 삭제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했더니 헤이케가 쥐잡듯이 흑마술사를 잡고 있던 모양이다.

     

    능력도 좋다. 흑마술사라는 키워드만 듣고 꽁꽁 숨어있는 그들을 얼마를 토벌한 건지.

     

    심지어 행동도 빠르다. 황궁에서 흑마술사가 토벌됐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이라 그들이 대처하지 못한 덕도 있었겠지.

     

    확실히 헤이케는 제국을 위해 움직인다는 원칙이 가장 황제를 닮았다.

     

    흠, 제국을 위해서라.

     

    포 더 킹덤. 아니, 엠파이어인가.

     

    좋은 생각이 났다.

     

    “황녀 전하, 혹시 기사단을 조금 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두어 달 정도, 한 개 중대 규모입니다.”

     

    “기사단 말인가. 월광궁이나 2병영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자네의 개인적인 부탁인가, 고트베르크?”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셀라가 싫어할 만한 사안이군.”

     

    “제국을 위한 일입니다.”

     

    아셀라의 마력이 폭주하면 제국도 멸망하니까 맞는 말이지. 거짓말은 안 했다.

     

    “목휘궁과 월광궁의 동맹은 아셀라의 승계전 참전 선언으로 사실상 파기되었지. 아셀라에게라면 지켜야 할 의리는 없다만.”

     

    헤이케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는 얼마든지 있다. 용도를 밝힌다면 빌려주마.”

     

    좋아, 거의 넘어왔다.

     

    “야만족을 상대할 때 필요합니다. 토벌이 될지 협상이 될지는 상황에 따라 대처할 예정입니다.”

     

    “야만족이라? 또 뭔가를 꾸미고 있군.”

     

    “늘 제가 하던 일 아니겠습니까.”

     

    헤이케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내어주마. 보고서만 작성해와라.”

     

    “바다와 같은 성품에 영탄드리옵니다.”

     

    이래서 평소에 거래처를 잘 뚫어놔야 한다.

     

    병력도 생겼겠다, 장기 외부 활동 허가를 받으면 오늘 밤에라도 북부로 출발할 수 있게 됐다.

     

    아셀라에겐 알릴 수 없으니 이 황실에서 내게 허가를 내려줄 윗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나는 천황궁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했다.

     

    “고트베르크.”

     

    “예, 폐하.”

     

    “짐은 그대를 신뢰할 수 있는 자라 판단했다.”

     

    “황공할 따름입니다.”

     

    황제는 약간은 격식을 내려놓을 생각인지 옥좌에 편한 태도로 앉아있었다.

     

    반대로 어깨에 걸린 짐은 여전히 무거웠는지 표정은 편치 않았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터를 폐위했다.”

     

    그렇게 되었나.

     

    황실에서는 꽤 이슈가 될 사건이다.

     

    후계자 자리가 공식적으로 공석이 되었으니 승계전은 더욱 치열해진다.

     

    파벌의 신하들도, 이해관계가 얽힌 귀족들도 온갖 호들갑을 떨며 가능한 술수를 쓰려 힘을 다하겠지.

     

    ‘그나마 지금 게오르크가 궁 밖에 있어서 혼란이 적을 것 같긴 한데.’

     

    본인은 승계 의지가 가득하니 게오르크가 복귀하면 황실이 꽤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제국에 혼란해지기 전에 짐이 후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일개 주치의인 내가 감히 제국의 미래를 논하는 건 월권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황제가 말을 이었다.

     

    “허나 아직은 확신이 없다. 짐은 자식들의 모든 가능성을 보고 판단하지 못했다.”

     

    아셀라의 가능성은 말해줄 수 있긴 하지.

     

    원래 역사에서는 아마 2, 3년 후쯤인가.

     

    황제가 죽고 혼란의 시대가 된 제국에서 승계 전쟁이 발발했고, 아셀라가 다른 형제를 전부 마법으로 숭덩숭덩 썰어버렸다.

     

    마력폭주 사건 후니 지금보다 훨씬 강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을 터다.

     

    그 전쟁도 몇 년이 걸려서 민생은 엉망이 되고 외적의 침입을 허용했다. 기울 뻔한 제국을 아셀라가 즉위한 후 금세 살려냈다.

     

    “고트베르크, 자네는 내 자식들과 모두 연이 있다 알고 있다. 하여 물어보겠다.”

     

    그걸 왜 제게 물어보시는지.

     

    “그대가 보기에, 헤이케, 게오르크, 라우가, 아셀라 중 차기 황제로 가장 적합한 자는 누구인가?”

     

    이건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당연하지만 내 의견만으로 후계자를 정할 리는 없을 테고, 비서관이나 집사장, 기사단장, 재판관 등 믿을 만한 인물은 죄다 불러다 물어보고 있지 않을까.

     

    ‘굳이 아셀라의 신하인 나를 불러다 생각을 물었어.’

     

    심지어 나는 아셀라의 혼약자다.

     

    내가 아셀라 이외의 승계권자를 대답하리라 생각했을까.

     

    ‘그만큼 내가 다른 이를 언급하면 그만큼 신뢰할 수 있단 뜻이겠지.’

     

    아셀라가 황제가 됐을 때 나만큼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없다고 여기는 게 보통일 테니.

     

    하지만 나는 아셀라가 황제가 되었을 때 찾아올 미래를 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한 후에 나는 한 명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스?”

     

    그리고 알현실로 통하는 복도.

     

    그곳에서 어째서인지 아셀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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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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