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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9

        

         

       엘라는 굳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 상태로 미동도 없이 대마녀 쪽을 향한 채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 시간을 정지시키기라도 한 것 같았고, 얼음 땡 놀이에서 과몰입한 사람 같기도 했다.

         

       “깨어나세요. 동생이여.”

         

       툭.

         

       옆에서 아나스타시아가 엘라를 툭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아마 온종일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어, 어….”

         

       제정신을 차린 엘라는 대마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마녀는 어색한 듯 몸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었고, 얼굴에는 하기 싫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과 짙은 화장기로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홍조가 깔렸다. 아니, 홍조뿐만이 아니라 아예 목 아래까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네. 가, 감사합니다…?”

         

       엘라는 뇌를 쥐어짜서 단어를 생각해내고, 과호흡이 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폐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을 토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어쩌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대마녀의 태도는 엘라의 정신을 있는 대로 후려쳤으며, 엘라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대마녀는 엘라가 받은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진성을 슬쩍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이 제대로 한 게 맞냐, 잘 한 게 맞냐며 확인을 받는 모습과도 같았다.

         

       진성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오딜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도저히 민망해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듯, 가능한 한 빠르게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듯이 민첩하게.

         

       하지만 그녀의 남긴 말의 여파는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으니.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진성을, 혹은 대마녀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진 후, 이아린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오라비…. 뭐 하고 온 거야…?”

         

       오만가지 감정이 다 담긴 듯한 목소리였다.

         

       이아린이 진성을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길거리에서 여자를 꾀고 다니는 한량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질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집에서 사용하는 말투와 전혀 다른 말투로 엘라를 꼬시는 것도 보았으며, 노인의 말투로 바꿔서 전화로 대마녀를 농락하는 것도 보았으며, 지금 잠깐 사이에 대마녀를 완전히 휘어잡는 모습까지 보았으니까.

         

       그리고 이아린의 옆에 있는 이세린 역시 비슷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이아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세린의 눈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저런 화술을 배웠을까’에 대한 궁금증도 서려 있었다는 것이다.

       진성이 아니었다면 필시 권능을 사용해서 비밀을 훔쳐보려고 했으리라.

         

       진성은 둘의 시선에 슬쩍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아그네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엘라처럼 ‘말도 안 되는 것을 목격하여 정신력이 현저히 떨어져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상태’가 되어있는 아그네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한 손을 슬쩍 잡았다. 그리곤 그녀가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프라우 라이히.”

       “어, 네. 네…? 네. 반, 반가워요. 헤어 박. 말씀은 들었습니다….”

         

       아그네스는 멍한 상태에서도 반사적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서서히 정신력이 돌아왔는지 눈에 총기가 서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추태를 부린 것이 부끄럽다는 듯 슬쩍 헛기침하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헤어 박, 불모지에서 난 꽃과 같은 분이라고 들었답니다. 주술이 소실된 곳에서도 어마어마한 실력을 갖추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강대한 주술사라면서요?”

       “과찬이십니다.”

       “게다가 힘에 걸맞은 심성까지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힘을 가지면 필시 나쁜 생각을 하거나, 무언가 비틀린 형태로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지요. 하지만 헤어 박은 그런 유혹마저 뿌리치고 선하게 힘을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답니다. 그리고 그 선한 영향력을 제 제자의 생명을 구하고, 또 다른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해주었으니….”

         

       아그네스는 호의 가득한 표정으로 진성을 바라보았다.

         

       “인신공양을 벌이는 사악한 주술사에 맞서 싸워 제 제자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너무 커다란 은혜라서 어찌 갚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성을 마주 보았다. 그리곤 허리를 크게 굽히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 제자의 목숨을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일어나시지요.”

         

       진성은 허리를 굽힌 아그네스를 일으키더니 다시 의자에 앉혔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것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몇 번이고 진성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을 약속했으니.

         

       “제 딸과 같은 아이예요. 그런 아이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나 다름이 없죠. 바라시는 게 있다면 힘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백지수표.

       그녀는 진성에게 백지수표를 약조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진성은 그 말에 곤란한 듯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프라우 라이히라면….”

       “아그네스.”

         

       아그네스는 진성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고는 그에게 말했다.

         

       “아그네스라고 불러주세요. 제 딸아이를 구해주셨고, 또 다른 딸에게 몸을 만들어 주셨고, 제 딸아이들의 둘도 없는 친구의 오빠입니다. 그런데 저를 그렇게 딱딱하게 부른다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알겠습니다.”

         

       진성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아그네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그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가라는 것은 중복으로 받아선 아니 되는 일. 제가 한 일에 대한 대가는 대마녀님께서 지불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어머, 스승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아그네스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대마녀가 아그네스에 관련된 일도 아니고, 엘라와 관련된 일에 흔쾌히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지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아그네스가 저에게 반드시 대가를 주고 싶으시다면, 아나스타시아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시는 것으로 지불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머.”

         

       아그네스는 감격했다는 듯 진성을 바라보았다.

         

       “이런 착한 청년이 있다니….”

       “과찬이십니다.”

       “그런 부탁은 하지 않아도 저는 저 아이를 사랑해줄 생각이었답니다. 엘라와 자매라면 저에게도 제자이고, 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게다가 온기를 받지 못했던 만큼 듬뿍 사랑을 줄 생각이었어요.”

         

       아그네스의 말을 들은 아나스타시아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엘라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곤 가만히 아그네스를 쳐다보다가 배시시 웃고는, 아그네스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가서 그녀의 품 안에 안겼다.

         

       “스승님?”

       “어머머. 아-샤.”

         

       엘라의 어릴 적과 똑 닮은 외모로 애교를 부리는 그 모습에 아그네스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아나스타시아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배시시 웃더니, 가만히 서 있는 엘라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엘라는 쭈뼛거리며 다가가기를 꺼렸으나, 아나스타시아가 언니 명령이라면서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하자 어색하게 걸어갔다.

         

       “얍.”

         

       아나스타시아는 엘라가 근처에 오자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아그네스를 향해 확 잡아끌었고, 중심을 잃은 엘라는 그대로 아그네스의 품에 안겨버렸다.

         

       아그네스.

       엘라.

       아나스타시아.

         

       셋이 한 곳에 모여있는 그 모습은 마치 사이좋은 가족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아나스타시아가 앞에는 엘라, 뒤에는 아그네스에게 안겨있는 것이 마치 어머니와 제 언니에게 안겨있는 막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나스타시아는 두 사람에게 안긴 채 미소를 지으며 진성에게 물었다.

         

       “진성 박. 제 대가도 마찬가지인가요?”

       “아니요.”

         

       그 물음에 진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별개입니다.”

       “칫. 알았어용.”

         

       은근슬쩍 자신의 빚을 대마녀에게 떠넘기려 했던 아나스타시아는 실망한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진성을 향해 말했다.

         

       “뭐. 대가 때문에라도 자주 볼 수 있을 테니,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네요~”

         

       진성은 아나스타시아의 말에 과거를 떠올렸다.

       주술이 발견될 때마다 자신에게 가져왔던, 회귀 전의 담비의 모습을.

         

       그때마다 진성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며 주물을 주거나 의식을 치러 그녀의 몸을 강화하거나 치료해주곤 했었다.

         

       회귀 전과는 미래가 달라졌지만, 이번에도 담비의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과거에도 얻지 못했던 주술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진성은 아나스타시아의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머, 벌써요? 더 이야기 하고 싶은데….”

       “기다리는 분이 있는지라 어쩔 수가 없군요.”

         

       끼이익-

         

       진성은 가볍게 작별인사를 나누곤 축지를 사용해 사라졌다.

         

         

         

        * * *

         

         

         

       “허, 아직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빅토르는 식사 자리에 홀연히 나타난 진성을 보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슬슬 진성에게 연락해서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마치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귀신같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가 자신이 군주가 될 운명을 살펴볼 정도로 대단한 주술사라는 것을 기억해내었다.

         

       “별이 속삭였느니라.”

       “별? 별이라….”

         

       빅토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의 하늘에는 별은커녕 별 비스름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뭐. 확실히 실력은 있는 놈이니…. 부대도 아니고 단순한 식당이고, 거기에 호위도 붙이고 오지 않았으니…. 충분히 들어올 수 있겠지.”

         

       단순한 식당.

       호위도 없는 몸.

       거기에 진성에게 연락해서 독대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진성 박. 박진성이라고 해야 하나?”

         

       빅토르는 말했다.

         

       “단둘이.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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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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