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배후가 여기서 나왔기 때문이다.

         

       새하얀 갈기를 달고 있는 흑마가 새겨진 문양.

         

       프란체의 약혼자인 카서스의 가문. 페르시아의 문양이었다.

         

       게임의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나도 이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프란체가 파티로 향하던 도중 습격을 받은 것도 놀라운데, 배후에 있던 게 페르시아 공작가일 줄이야.

         

       “…….”

         

       설마 여기서 미리 죽이려고 한 건가? 아니지, 페르시아 공작가쯤 되는 가문이 이런 아마추어와 같은 암살자들을 보낼 리 없다.

         

       ‘이간질.’

         

       두 가문의 충돌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 그럼 본의아니게 나까지 휘말릴 수 있다.

       

       지금은 나중을 대비해 가지고만 있자. 나는 문양을 품속에 넣은 뒤 마차로 돌아갔다.

         

       “이봐 노예.”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는 반말이고 새끼야. 뭐 찾은 거라도 있냐?”

       “없다.”

       “끝까지 반말하는군.”

         

       내 실력을 봐서 그런가. 기사들은 더이상 내가 하는 행동에 트집을 잡지 않았다. 하긴, 검에 오러까지 흘려보내는 경지를 보여줬는데 까불면 죽는다는 걸 자기들도 알고 있겠지.

         

       나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오직 프란체 뿐이니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프란체는 턱을 괴고 권태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다 처리했니?”

       “예.”

       “배후가 누군지는 알아냈고?”

       “송구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프란체의 얼굴에는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들에게 큰 호기심이 없어 보였다. 방금까지 목숨줄을 위협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삶에 의욕이 없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목숨에 가치를 매기지 않은 건가.’

         

       뭐가 되었든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인간은 본래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목숨을 중요시하는 법인데.

         

       그때. 마차를 이끌던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덜컹. 마차의 바퀴가 움직이며 들썩거렸다.

         

       “불편하시진 않으십니까?”

       “딱히.”

         

       더이상 할 말은 없는 건가.

         

       “또 말씀하시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들어드릴 테니.”

         

       내 말이 끝나고, 그제야 프란체가 날 바라봤다.

         

       “내가 좋은 노예를 두긴 했구나. 무력도 강하고 나를 배려해주는 게 5억의 가치가 있어. 마음에 드는구나.”

         

       옅은 미소를 보이는 프란체. 그녀의 도움이 되어 다행이다. 그런데…….

         

       자꾸 가슴이 간질거리는 이 느낌.

         

       ‘대체 뭐지.’

         

       내가 지금까지 느낀 감정은 동정, 분노, 슬픔.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보호 본능과 악역이라는 운명에서 구해주고 싶은 소망이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저번에도 느꼈던, 꽁꽁 뭉쳐서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실뭉치와도 같은 이 감정. 왠지 심기가 불편하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아까의 싸움으로 다치기라도 한 거니?”

       “제가 그 정도로 다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럼 다행이구나.”

         

       프란체는 그리 말하고 다시 마차의 창문으로 바라보았다.

         

       “창문에 너무 가까이 계시지 마십시오. 유리 파편을 치웠다곤 하지만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너는 그렇게 내가 걱정되니?”

       “주인님을 걱정하지 않는 노예가 어디있겠습니까.”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구나. 제국이 원망스럽진 않니? 너의 조국을 멸망시키고 너를 노예로 만들었어. 나는 그 제국의 귀족이고. 명령을 듣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충성심이 가득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원래라면 너에게 좋은 미래를 보여주고서 내 노예 각인을 해제한 다음, 서로가 좋은 결과를 바랐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는 단순히 게임 속 악역이 아닌,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 프란체로 보이기 시작했으니.

         

       ‘변화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여정의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나는 너를 버리고 갈 수 있을까.

         

       프란체 데카르트.

         

       너는 나를 어찌 생각할까. 그저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장기말일 뿐일까?

         

       “…….”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내가 무슨 짝사랑에 빠진 소년도 아니고. 나는 그저 목적을 위해 움직이면 될 뿐이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을 뿐입니다.”

       “…왕족으로서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용히 창문만 바라보던 프란체가 말을 이었다.

         

       “피곤하구나.”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나보고 의자에 누워서 자라는 거니?”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귀족 영애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잖니.”

       “…….”

         

       귀족 영애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라. 나는 그 말이 모순되었다고 본다. 그녀가 가문에서 받는 취급은 귀족 영애로서 받을만한 취급이 아니니까.

         

       “나를 걱정해주는 건 알겠어. 그렇다고 해서 누워서 자지는 않을 거야. 그냥 의자에 기대서 눈 좀 붙일게.”

       “편히 주무십시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프란체의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마차가 멈췄다. 엘다스 후작령에 도착했나 보다.

         

       “주인님.”

       “으음…….”

       “주인님.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프란체가 눈을 떴다. 부스스한 눈.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도착했구나.”

       “시간이 꽤 지나긴 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마차의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계단 옆에 서서 조심히 내려오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에스코트를 해주는구나.”

         

       프란체가 피식 웃었다. 그럼. 한 번 해봤으니 다음은 잘 해야지.

         

       “가자꾸나.”

         

       프란체를 따라 걸었다. 마부는 마차를 맡기러 갔고, 여덟의 기사도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여기서 페르시아 소 공작님과 만나기로 했단다.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도착한 모양이야.”

       “…….”

         

       소 공작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는 여기에 올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걸 말해주기엔 그렇지. 어떻게 알았냐부터 시작해서 온갖 추론이 시작될 테니까. 그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파티는 시작한 지 오래지만, 내 예상대로 소 공작은 등장하지 않았다.

         

       “주인님. 이제 시간이…….”

       “나도 알고 있단다.”

         

       에덴과 라인에게 핍박을 받을 때도, 암살자들이 습격했을 때도 흔들림이 없던 프란체의 눈동자에 지진이 생겼다.

         

       빠득.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 프란체.

         

       이대로면 그녀는 혼자 입장해야 한다.

         

       약혼한 남녀가 파티에 같이 입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대놓고 알리는 암시에 가깝다.

         

       소 공작은…….

         

       ‘프란체와 입장할 생각이 없는 건가.’

         

       이 또한 예정대로다.

         

       “주인님.”

       “왜 그러니.”

       “소 공작님은 여기에 오지 않으실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니?”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저 감입니다. 아직도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그만.”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그만 말하렴. 나도 알고 있으니까.”

         

       프란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절대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안 표정. 나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프란체의 입이 열렸다.

         

       “…들어가자꾸나.”

         

       결국, 프란체는 혼자 입장하게 되었다. 나는 호위기사로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고, 엘다스 후작가의 파티장 앞에 도착했다.

         

       다른 기사들은 바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파티에 입장이 가능한 건 호위기사뿐이었으니.

         

       프란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거겠지.

         

       “문을 열어라.”

         

       대기하고 있던 엘다스 후작가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아치형 문이 열리고, 그녀가 입장했다.

         

       ―데카르트 공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곳으로 모인다. 그들은 눈을 얕게 뜨고 조용히 프란체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려왔다.

         

       ―소 공작님은 어디 가시고 혼자 입장하셨대요?

       ―글쎄요. 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든지?

       ―그럴 만도 하죠. 애초에 둘의 약혼은 일방적으로 진행된 거니까요.

       ―평소에 드레스나 장신구로 거들먹거리더니, 이거 참 좋은 광경이네요.

         

       저게 진정 귀족들의 대화인가. 시작부터 온갖 음해와 뒷담이 시작되는데 앞으로는 어떨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각. 순간적으로 숙연해진 파티장에 넓게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 프란체가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감정이 죽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소 공작이 등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충격이 큰 건가.

         

       “호위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 있으렴.”

       “예.”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파티장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귀족들의 호위기사들이 모여있었다.

         

       “이야, 오늘 음식 좋은데?”

       “술맛도 좋아.”

       “엘다스 후작령이 좋긴 해?”

       “우리끼리 짠이라도 하자고.”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는 호위기사들. 술잔까지 부딪히며 파티를 즐기고 있다. 안주들을 집어 먹으며 잡담을 나눈다. 나는 저들과 딱히 할 말도 없기에 의자에 앉아 프란체를 바라봤다.

         

       주먹을 꽉 쥔 프란체.

         

       그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프란체 또한 다른 이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지금 이야기를 나눠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하아.”

         

       프란체가 데카르트 가문에서 받는 취급과 과거를 알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저런 모습을 보니 괜히 내 가슴만 아파져 왔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예민한 감각을 통해 귀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저 표정 좀 보세요. 세상을 잃은 얼굴이신데?

       ―소 공작님께 버림받은 게 틀림없나 보군요.

       ―그분도 참 너무하시지.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파티에 참가하지 않았을 텐데 저리 망신을 주시다니.

       ―어쩌겠어요. 데카르트 공녀님이 원해서 일방적으로 진행된 약혼인데. 소 공작님에게 버림받아도 할 말이 없지요.

         

       아직도 음해와 뒷담이 계속되고 있다. 저 말들이 그녀에게도 들릴까.

         

       ……안 들렸으면 좋겠다.

         

       그럼 그녀가 더 상처받을 테니까.

         

       나는 이후에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티장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샴페인을 홀짝이는 프란체. 씁쓸하다 못해 안타까웠다. 고독함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니.

         

       그때였다.

         

       ―페르시아 소 공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프란체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페르시아 소 공작, 카서스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는 듯 혼자서 입장했다.

         

       저벅. 저벅. 길쭉한 다리로 파티장에 들어온다. 이번에도 귀족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소 공작님도 혼자 입장 하셨는데요?

       ―역시 둘 사이에 뭔가 있군요.

       ―이 약혼이 오래갈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그렇긴 하지요. 데카르트 공녀님은 성질을 좀 죽일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그동안 뭘 하고 다녔던 건가.

         

       ‘미친년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으니 이곳저곳에 횡포를 부렸겠군.’

         

       그게 그녀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의도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프란체는 얌전히 카서스를 바라보더니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말소리 또한 예민한 감각을 통해 들려왔다.

         

       ―페르시아 소 공작님.

       ―프란체 데카르트.

       ―…어째서 저와 입장하지 않으신 건가요.

       ―아, 그 얘기인가.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는데 잘 되었군.

         

       카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프란체 데카르트. 너와 파혼을 하고 싶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