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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영상을 쏘는 프로젝터의 불빛을 제외하면 어두운 방 안. 

    영상에서는 이번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을 비춰주고 있었다.

    영상 속의 피해자는 척 보기에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멀쩡히 잘 걷던 사람이 시간이 좀 지난 뒤부터는 눈앞을 손으로 휘휘 젓거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야야, 너 어딜 보는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정신은 차려야지.”

    “정신 차려! 눈 똑바로 떠! 어딜 보는 거야?”

    옆에서 걷던 동료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피해자의 어깨를 쥐고는 흔들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색 사신과 피해자가 눈을 마주치자, 피해자는 마치 범인은 회색 사신이라는 것처럼 손을 사신을 향해 뻗었다. 

    회색 사신은 눈이 마주친 피해자에게 순식간에 다가가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온몸에서 상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남자의 피부는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회색 사신은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힌 채로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을 목격한 동료는 그 끔찍한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쳤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꺼졌고, 그와 반대로 밝은 불빛이 방안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주 끔찍한 사건입니다. 피해자는 경비실 소속 32살의 정동전씨. 발견된 당시 모든 피부가 벗겨져 있었고, 내장도 모두 소실되어 있었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유일한 목격자도 당시의 충격으로 제대로 된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영상을 종료한 발표자는 침착한 분위기에서 발표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영상을 보면 피해자의 마지막 한 마디도 ‘회색 사신…’ 이었던 걸로 볼 때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특히 피해자가 회색사신과는 별다른 접점이 없던 것을 볼 때, 이번 사건은 ‘무차별 습격’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회색 사신은 위험성은 특급, 적극성에서는 4급을 받은 오브젝트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무차별 습격을 볼 때 적극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습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적극성 등급을 3단계 상향 조정해서 1급으로 매겨야 합니다.”

    “그에 따라서 연구소에서의 처리도 그 등급에 맞춰서 더욱 적극적이고 전방위적인 대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발표자가 발표를 마치자, 회의실은 들끓는 것처럼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세희 연구소 측에서 이걸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이걸 은폐한 경위가 무엇인지 확실히 밝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합니다.”

    “아니 그럼 중앙 연구소에서 격리에 실패를 하고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걸 공공연하게 밝히자는 말이오? 이번 사건에 대한 확실한 보안과 단속은 어떻게 되고 있소?”

    발표자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고 답했다.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당 사건 관계자들은 이미 다른 사설 연구소로 이직 처리 된 지 오래입니다.”

    흠흠, 하고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회의실 곳곳에서 울렸다. 중앙 연구소에서의 이직은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라는 의미랑 비슷하게 쓰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회의를 한다는 건 ‘아귀’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런 것 아닌가?”

    흰 수염이 길게 난 노령의 남자가 작은 목소리를 말했다. 꽤 작은 목소리였지만, 노인이 말하는 순간 회의실의 모두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기에 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격리실의 격리가 뚫린 이상, 사신이 언제 탈출할지 모릅니다. 사신의 위치가 확인되는 대로 중요 인원을 탈출시킨 뒤, 특수 연구소내에 ‘아귀’를 풀어놓겠습니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겠지. 그대로 시행하게.”

    중앙 연구소와는 멀리 떨어진 ‘국립 오브젝트 관리 협회’의 밀실에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

    오브젝트 협회에서 한 통의 보안 메일이 날아왔다. 격리가 풀려 버린 회색 사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귀’를 연구소 내에 풀어놓으라는 지시사항이었다.

    “하, 결국 이렇게 됐군.”

    서울 광장 참사를 일으킨 ‘아귀’를 찢어 죽이기 위해서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한데, 이런 식으로 또다시 쓸 만한 연구 소재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확인을 마친 메일은 10초도 지나기 전에 자동으로 삭제 처리가 되었다.

    불편할 정도로 과도한 보안 시스템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연구소 안에서 사람 먹는 괴물을 기른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스캔들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연구소를 비워야 한다. 연구원들에게 알리고 빠른 시일내에 준비하라고 해. 회색 사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대로 빠져나간다.”

    호출벨을 눌러 불러들인 비서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중요 인원인 연구원들은 탈출하고, 지금 연구소에서 일하는 일반 직원들은 모두 다른 사설 연구소로 ‘이직’처리될 것이다.

    “아, 부소장님. 소장님에게서 변화가 관측되었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인데,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소장님이 작성하는 연구일지에 ‘회색 사신’의 그림이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확실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기가 너무 공교롭군. 알겠네, 나중에 내가 확인해 보지. 이만 나가보게.”

    비서는 꾸벅하고 인사하고 방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갔다.

    확실히 공교로운 일이다. 소장이 작성하는 연구일지는 그 소재가 랜덤이긴 하지만 지금, 이시기에 회색 사신관련 일지를 쓴다는 건 확실히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연구소에 ‘아귀’를 풀어 놓는 준비로 바쁘더라도 확인해야 했다.

    길고 긴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엄청나게 넓은 사무실. 벽면은 수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그 가운데에는 거대한 탁자와 의자. 그리고 끊임없이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바닥에 버리길 반복하는 실험가운을 입은 남자.

    국립 중앙 특수 연구소 소장.

    오브젝트가 되어 버린 남자. 혹은 사람 모습을 모방한 오브젝트.

    “확실히, 이건 회색 사신이군.”

    바닥에 잔뜩 흩어진 종이에는 명백하게 회색 사신으로 볼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여전히 주석처럼 달린 글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자였지만 말이다.

    분명 무언가 의미를 가지고 쓰는 연구 일지일 텐데, 소장이 쓰는 문서는 해석이 불가능했다.

    정확히는 해석을 하는데 성공하는 사람은 실종된다. 갑자기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어디로 실종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해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이 종이는 현장직들의 방호복 충전재로 쓰인다. 오브젝트는 오브젝트에 저항성을 가지니까, 어떤 합금보다 오브젝트 대상으로는 훌륭한 방어구였다. 대신 충전재의 유출을 신경 써야하니까 제한적인 활용만이 가능했다. 

    만약 이 일지가 세상에 흘러들어갔다? 집단 실종 사태를 유발할지도 모르는 위험물이 사회에 퍼진 상황인 것이다.

    복사도 매우 쉽고 파급력도 얼마나 클지 예상이 안 됐다. 어떤 의미론 군부대의 탄약이나 폭약의 반출보다 큰일인 것이다.

    다행히 이런 위험물을 끝없이 양산하는 소장을 제거하는 방법은 이미 밝혀져 있었다. 

    공식 문서로 소장을 해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소장은 지구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소장의 존재는 연구소의 유지에 필수적이기에 어쩔 수 없이 특수 연구소의 관리자는 ‘부소장’이 맡는 것이다. 

    회색 사신이 그려진 종이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는 자리를 떴다. 

    ‘아귀’를 죽이면 소장도 원래대로 돌아올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

    ***

    벽을 넘으니 나를 반겨 준 것은 무채색의 세계였다. 벽면은 거대한 책장들이 메우고 있었고, 널찍한 방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뿐인 살풍경한 방이었다.

    “오, 이건 또 색다른 방문자로군.”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을 가진 실험복의 남자가 말했다.

    “보통 여기는 연구자들이 오는데, 오브젝트 방문자는 처음이야.”

    남자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너는 ‘KR – 897’이로구만.” 

    남자는 허공에서 파일 하나를 불러내더니 자료를 쓱쓱 넘겨보며 말했다. ‘KR – 897’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남자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아 ‘회색사신’인가하는 명칭쪽이 편한 건가? 사실 우리는 그쪽이 영 입에 안붙어서 말이야. 사실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분류하기도 불편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만한 작명이 공공연하다는 점이 이상해 보이지 않았나 말일세.”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오브젝트에게 명칭을 붙일 자유마저 빼앗겨 버려서 그런 거라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읊조린 남자는 다시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뭐, 이런 소리를 오브젝트인 자네에게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여기는 그런 현실 세계의 그런 제한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자유롭게 이름을 붙이는 거라네, 한국에서 발견된 897번.”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팔을 벌리고 환영한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방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 이곳에 온 최초의 오브젝트이니만큼 연구소장인 이 내가 안내를 해주는 것이 맞겠지.”

    “잘 왔네, 897번. 시간의 틈새에 갇힌 영원한 연구소에.”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인사를 한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남자의 눈 속에서 빛나는 열정을 마주한 순간, [연구소장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 라는 힌트에서 말하는 연구소장이 저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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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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