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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무능왕과의 짧은 대면 이후.

     “괜찮느냐?”

     “예.”

     “국왕이 뭔가 네게 한 말은 없고?”

     “음, 그냥 어머니는 잘 계시냐. 요즘 식사는 잘하냐. 변경백과의 관계는 어떠냐. 그런 걸 물었습니다.”

     나는 방 안에서의 일을 교묘히 뒤틀었다.

     “…그렇겠지. 직접 알아보기는 두렵고, 아들을 통해서 물어보는 거구나.”

     카르멘 왕비는 다행히 크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렴. 메이드장을 따라가면 네 방이 나올 거란다.”

     혹시나 이번에는 왕비가 나를 밤새 옆에 두고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건 비밀로 하거라.”

     카르멘은 나를 보내주는 대신,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왕이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있다는 걸 백성들이 알면 구설에 오를 수 있으니.”

     “예.”

     아, 그쪽.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10살 아이’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걸까.

     ‘전자든 후자든,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카르멘 왕비가 침묵하기로 한 이상, 그 부분은 건드릴 필요가 없다.

     “그럼, 잘 자렴.”

     “예. 왕비께서도 편안한 밤 되십시오.”

     카르멘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고, 나는 카르멘이 붙여준 메이드장의 안내에 따라 나의 침실로 향했다.

     제법 넓은 방.

     그냥 좋은 방이기는 하지만, 배치를 생각하면 이 방은 분명 모르가니아 공작가의 사람이 방문했을 때를 위한 손님방이다.

     ‘손잡았다고 알릴 생각이 없다더니, 은은하게 밑밥을 까네.’

     10살 아이가 잘 몰라서 이 방에 들어왔다?

     정치적으로 과장되고 확대해석하는 이들은 이 사안만으로 벌써 모르가니아와 지브롤터 사이의 장밋빛 미래를 떠올릴 것이다.

     ‘정답이긴 해.’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런 음모꾼이 아닌 이상, 보통은 그런 생각을 그냥 헛소문으로 치부하기 마련.

     “후.”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어린아이 한 명이 눕기에는 너무나 넓은 침대였으나,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절로 피로감이 전신을 가득 채운다.

     ‘많은 수확을 얻었어.’

     왕도에서 오고자 한 목적 중 대부분을 달성했다.

     ‘편지도 양쪽으로 각각 전했고, 계획서도 승인 나겠지. 카르멘 왕비와 밀약도 맺었고.’

     심지어 초과 달성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요소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무능왕이 이 시점부터 ‘가루’를 건드렸을 줄은.’

     가루.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은어로서, 공식적인 용어는 ‘백은(白銀)’이다.

     물론 그 용어도 나중에 왕국이 망하고 난 뒤에나 생긴 말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

     대외적으로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연금술의 산물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합성물이다.

     효과는 뭐,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원본인가? 아니면 개량? 설탕을 섞은 보급형?’

     자세한 효과를 언급하기에는 여러모로 머리도 아프고, 국왕이 흡입한 백은이 1세대인지 아니면 7세대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특정할 수도 없다.

     ‘직접 맛을 보는 게 아니면 모르긴 해.’

     한 가지 분명한 건, 백은은 술과 같이 인간의 이성을 상당히 흩어지게 만드는 물건이다.

     순간적인 충동과 무의식 속 욕망에 충실하게 만들며, 쾌락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물질이다.

     무능왕이 어머니를 상대로 그런 짓을 저질렀던 건, 단순히 술에 취해서만 그랬던 게 아니었을지도.

     ‘얼마나 퍼져있을까.’

     국왕에게만?

     아니면 국왕 주변에 있는 모두가?

     

     한 가지 분명한 건-

     ‘제국은 이미 이 시점부터 왕국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거네.’

     백은은 제국이 직접 관리하는 물건이라, 그게 노스트럼 왕성에 있다는 건 제국이 손을 썼다는 것.

     ‘무서운 자들이야.’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다니.

     그런데.

     제국이 이런 수작을 벌인 것이 이 나라의 멸망에 더 많이 기여를 했을까.

     아니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무능함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할까?

     제국의 첩보부나 정치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후자라고 생각한다.

     ‘왕만 정상이었으면 전쟁도 이겼을 거야.’

     왕국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왕이 구심점이 되었다면 왕국은 제국에 결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테니.

     미래.

     협곡이 열린 날.

     소드 마스터가 배신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 왕도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백작가 하나가 배신했을 뿐이다.

     ‘기습당하기는 했어도 전력상 심각한 열세는 아니었지.’

     다른 귀족들을 잘 수습하고, 왕도의 성벽에서 농성을 펼치면 제국을 상대로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튀지만 않았다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그는 제국군이 도착하자마자, 왕궁을 공주에게 맡기고 후방으로 도망쳤다.

     그게 왕국 멸망의 쐐기였다.

     ‘나리아 공주의 농성은 결국 한 줌이었고.’

     공주는 기사단을 비롯하여 왕도 수비군을 동원해 철저히 항전했으나, 국왕이 도망갔다는 사실이 왕도에 퍼지게 되며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공주를 위해 희생하기는 했지만, 결국 왕도는 함락되었어.’

     공주는 간신히 기사들에 의해 목숨을 건져 도주하고, 제국은 후방인 ‘모르가니아 공령’으로 도망친 무능왕을 쫓았다.

     ‘도망친 국왕은 목줄이 채워진 채 왕도까지 질질 끌려왔고.’

     후방으로 도망쳐봐야 결국 하루거리였고, 딸인 카르멘 왕비가 인질로 잡힌 대공이 국왕의 멱살을 잡고 항복한 걸로 전쟁은 끝났다.

     그렇게 노스트럼 왕조는 끝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국의 사학자들은 전쟁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내놓았다.

     -왕만 바뀌었으면,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다.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은 수많은 마스터를 죽인 황제 폐하도, 제국에 길을 열어준 지브롤터도 아니다. 왕국 전체를 스스로 망가뜨린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다.

     결론은 모두 같았다.

     

     -노스트럼은 무능왕 때문에 망했다.

     “……역시, 안 되겠네.”

     반대로 왕이 바뀐다면, 제국도 전쟁을 다각도에서 고려해볼지도 모른다.

     왕을 바꾸기에는 여러모로 처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무능왕이 사라지면 나리아 공주가 여왕이 되는 건가.’

     왕이 바뀐다면, 다음 왕은 당연히 노스트럼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옥좌에 올라야 한다.

     “흐.”

     

     다시 한번 드는 생각이지만.

     “왕도에 와서, 정말 다행이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 * *

     다음날, 아침.

     “오늘 바로 떠난다고?”

     카르멘 왕비는 자신이 초대한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내가 꺼낸 말에 흠칫 놀랐다.

     “예. 왕비님께서 제안서에 도장도 찍어주셨으니, 지브롤터로 돌아가서 바로 소식을 알리고 공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처럼 왕도에 왔는데 구경하는 건 어떠니? 왕도는 처음인 걸로 알고 있는데.”

     카르멘 왕비가 질척거린다.

     정치적 아들이 되겠다고 했지, 진짜 아들이 되겠다고 한 건 아닌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만, 제가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불안해하실까 봐.”

     “쓰읍….”

     아버지의 입장에서 왕도는 사실상 ‘적의 본거지’다.

     “그리고 왕비님을 뵌 걸로 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 다른 귀족분들이 올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지브롤터 가문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들은 많지.”

     소드 마스터의 가문.

     아들을 통해서라도 접점을 만들 수 있다면, 훗날 자신의 가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네가 왕도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귀족들이 자기네 딸들을 데리고 왕도로 급히 올라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정략결혼을 생각하는 거겠죠.”

     “벌써 결혼을 생각하는 것이냐?”

     “저 말고, 다른 이들이. 어렸을 때 안면을 익히고, 나중에 사교 파티에서 말이라도 걸게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딸들에게.”

     “그리고 결혼에 성공이라도 하면, 변경백과 사돈이 되는 셈이니 참 강력한 검이 생기겠구나.”

     지브롤터의 의무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소드 마스터의 권위만 빌려와 호가호위하기 위해서.

     “지브롤터의 후계자가 마침 지브롤터를 나왔으니,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누구도 감히 지브롤터에 방문하지 못하니. 지금이 아니면 사실상 기회는 없는 셈이지.”

     카르멘 왕비 또한 오랜 시간을 끌면 파리가 꼬일 걸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빨리 보내려고 생각은 했다만,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은 섭섭하군.”

     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제안서를 검토하고 결재도장을 찍었다.

     “자식을 아카데미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내가 동맹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오늘 오후에는 도장을 찍어줬을 것이다.

     “혹시 선전을 위한 거라면, 저도 하루 정도는 왕도에 더 머무를 수 있습니다.”

     “아니. 나는 너를 인형으로 데리고 다닐 생각이 없다. …정말이지, 나를 뭐로 보고.”

     “지브롤터의 생각 없는 아들을 단숨에 휘어잡아 모르가니아의 편으로 만든 왕비님?”

     “그러니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카르멘 왕비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찻잔을 들었다.

     “네가 자꾸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이야기하니, 내가 다 착각을 하게 되는구나. 정말로 네가 그분과 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것처럼.”

     “싫으십니까?”

     “아니. 싫기는. 아직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 망상에 잠시 취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카르멘 왕비가 찻잔을 두 손으로 들었다.

     “나는 이런 여인이다. 나의 사랑을 위해서, 그의 영악한 아들마저도 이용하려고 하는 악녀다.”

     “악녀인 겁니까?”

     “모르가니아 공녀가 소싯 적에 사교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네 어머니에게 한번 물어보렴. 후후후.”

     “…….”

     아마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데.

     “그리고 너 또한 그런 악녀와 결이 비슷한 녀석이지. 못된 녀석. 내가 너를 통해 네 아버지를 갈구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이용하다니.”

     “제가 역겨우십니까?”

     “아니. 그런 걸로 역겹다면, 애초에 네게 농담으로라도 아들 운운하지 않았겠지. 너도 마찬가지고.”

     타인을 그 사람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주변인을 투영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이 또 없다.

     가령, 사랑했던 여인의 아들에게서 그 여인의 향기를 찾으려는 무능왕처럼.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카르멘 왕비는 자기조절은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 가지 물어보마.”

     “예.”

     “네가 이렇게 너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이냐?”

     “…….”

     막 들었던 잔을 내려놓는다.

     “나는 여러 사람을 보아왔다. 그리고 너 같은 이를 잘 알고 있단다.”

     “저는 어떤 부류의 인간입니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면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을 자.”

     “그건 누구나 다 같은 거 아닙니까?”

     “이웃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친하지 않으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릴 부류지.”

     “…….”

     가볍게, 한 잔 목을 축인다.

     “너는 낙엽처럼 살아가는 인간이다. 네 아버지처럼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려 굳건하게 솟은 나무도 아니고, 네 어머니처럼 태양을 향해 환하게 피어난 해바라기도 아니지.”

     미래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변경백과 백작 부인을 여러모로 닮지 않았다.

     “지브롤터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주변에 무관심한 녀석이다. 네 외모가 아니었다면, 어디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인정합니다.”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자기 객관화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매국노의 삶과 배신.

     “저는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분명 그렇게 살다가 그대로 죽겠죠.”

     한 번의 죽음.

     “그런데, 그런 인간도 이유가 생기면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에서의 목표.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저는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래서, 네 목적이 무엇이냐? 권력? 지브롤터 가문을 물려받는 것? 네 어머니를 축출하고 권력자 가문의 어머니를 맞이하는 것?”

     “그것도, 전부 과정입니다. 필요하다면 반드시 이루고, 목표에 어긋난다면 얼마든지 폐기할 수 있는 계획의 일부.”

     “…모르가니아와의 연대조차 네게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하!”

     카르멘-모르가니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럼, 말해보거라. 네 목적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이유라면, 너를 지브롤터로 보내지 않을 테니. 설마 말하지 못하겠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카르멘 왕비님과 같은 이유입니다.”

     “나와 같은 이유라?”

     “예. 다만 그 방식이, 그레이 지브롤터의 방식일 뿐이죠.”

     

     카르멘 왕비가 씩 미소를 짓는다.

     “자꾸 돌려 말하려는 걸 보니, 뭔가 부끄러운 이유라도 있나보구나?”

     “…….”

     “고백해보거라. 어서. 무엇이냐?”

     확실히, 사람에 대한 파악이 뛰어난 사람이다.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

     “…….”

     진심을 밝히기를 원한다면.

     “그녀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진심으로 답하는 수밖에.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앞으로 10년이 남았지요?”

     “…….

     “그 10년 동안, 그녀가 왕관을 쓸 길을 잘 닦아놓으려고 합니다. 그녀를 위한 레드카펫을.”

     나는 카르멘 왕비를 향해, 잔을 들었다.

     “나리아, 그녀가 이 나라의 태양이 되는 겁니다.”

     여왕을 위하여.

     “당신의 딸을 이 나라의 왕으로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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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쓰겠습니다.
    충성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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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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