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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

        

        

        틸레스의 상 마틸렌느에서 출발해 크라실로프의 프리첸카야로 도착하는 급행열차는 총 네 개 구간의 군사 지역을 지나친다.

        

        틸레스 제 3 근위사단을 지나치며 한 번, 서북부 국경선을 넘으며 한 번.

        다시, 크라실로프 국경 방위사단을 한 번, 프리첸카야 방위본부를 지나며 한 번.

        

        마족과의 전선에 가까웠던 만큼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병력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거법을 사용한다면 테러가 가능한 구간은 단 세 개 역에 그친다. 이 열차가 지나치는 30개 남짓한 역사 중에, 하루 거리에 지원 병력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지대가 험난한 곳이 딱 그 셋 뿐이란 뜻.

        

        

        ‘하나.’

        

        

        이반과 이자벨이 탄 열차는 첫 번째 매복 포인트를 지나쳤다.

        

        열차의 선로에 개입하려는 괴한도, 말을 타고 마법이나 포격을 쏟아내는 마적도 없었다.

        

        

        ‘둘.’

        

        

        두 번째 매복 포인트에서도 열차는 쾌속하게 선로 위를 질주했다.

        

        이반은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몇 시간 후, 고요 속에서, 열차는 세 번째 매복 포인트를 지났다.

        

        

        ‘뭐지…?’

        

        

        열차는 이제 크라실로프 국경선을 넘었다. 이대로 직진한다면 하루 거리에 프리첸카야에 도착할 터.

        

        이제 평원을 지나 고작 산 하나만 넘으면 프리첸카야다. 중간에 숲을 통과하긴 한다지만, 그 근방엔 사단급 병대 하나가 주둔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테러를 저지르려 해 봐야 할 수도 없다는 의미다. 이반은 초조하게 권총을 쓰다듬었다.

        

        

        ‘예상이 틀렸다고?’

        

        

        튜토리얼이 열차 테러로 통일된 것이 아니었나?

        

        그럼 에시디스는 지독하게 운이 없던 경우였나? 아니면, ‘원작’ 게임에선 튜토리얼이 각 캐릭터마다 다르게 설계되어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각자 고유한 스토리를 제각기 진행할 것이란 생각 정도는 했었지만, 초반 설계는 그렇기 힘들다. 이건 ‘아카데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했는데, 그래야만 했는데.

        

        이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또 오판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게 아카데미물조차 아니었다면, 이 빌어먹을 이세계엔 엔딩이 있기나 한 건가?

        

        자살해야 하나? 자살 말고 답이 있나. 장르를 예측할 수가 없으니 엔딩을 판단할 수도 없다.

        

        가장 최악의 가정은….

        

        

       -엔딩은 주인공 만의 것일 경우.

        

        

        지난 전쟁, 즉 용사의 왕도 RPG가 이세계의 본질이었다면.

        

        용사의 은거가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까. 용사는 왜 은거를 택한 것인가. 그것이 그 사내의 ‘엔딩’이었나.

        

        그렇다면 남겨진 이세계는.

        

        우리는.

        

        아니,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반의 생각이 점차 복잡하게 꼬였다. 싫어, 싫다. 더 이상 이 빌어처먹을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

        

        쉬고 싶다. 다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 보일러 나오는 편안한 집에서 푹신한 침대에 누워 극세사 이불에 몸을 감싸고 한 일주일 잠들고 싶다.

        

        먹고 싶은 것들을 모조리 시켜서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게임, 소설, 영화, 드라마, 예능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죽음과 빈곤, 기아와 공포가 만연하고.

        그럼에도 ‘복지’와 ‘여가’라는 개념이 희미한 이 빌어먹을 전근대 판타지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가고 싶지 않다.

        

        

        “히익… 끅…!”

        

        

        그의 옆자리에 앉은 한 사내가 새파랗게 질리며 숨막힌 신음을 내뱉었다.

        

        이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살기가 독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반은, 아니. 김선우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추스를 정신이 없었다.

        

        점점 더 날카롭게, 심지어 실제로 사람을 상하게 할 정도로 짙고도 농밀하게.

        

        그렇게 김선우의 패닉이 점차 격렬해질 때.

        

        산 아래 터널을 통과해 계곡 위 다리를 건너던 열차가 쿠궁, 흔들렸다. 전조였다.

        

        

       -콰아아아아앙!!!

       -끼이이이익—!!

       -쿠구구구궁-!!

        

        

        선로를 터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리 전체를 붕괴시켜버리는 폭발에 휘말리며 힘 없이 아래로 미끄러 떨어진다. 선체가 뒤틀리고 달리던 속력을 그대로 받아 차량 전체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몸이 떠오르고 사방이 뒤집히는 상황 속에서, 이반은 반사적으로 열차의 선반을 꽉 움켜쥐어 균형을 잡으면서, 본능에 따라 주위를 살폈다.

        

        휙휙 뒤집히는 공간과 미끄러지는 창 밖 풍경 사이에서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다.

        

        

        열차가 추락하고 있다.

        지금 열차는 프리첸카야 서부에 있는 산맥을 통과하고 있었다.

        

        열차가 추락하고 있다.

        열차 테러가 일어났다.

        

        튜토리얼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아직, 엔딩이 남아있다.

        

        

        떨어지는 열차 차량 속에서, 이반의 메마른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아직까지 패닉에 빠진, 쓸모없는 김선우를 억지로 의식 아래에 처박아버리며. 이제 ‘해야 할 일’을 처리할 시간이니까.

        

        공포와 증오와 혼란은 임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통 머리는 차갑게, 그리고 가슴은 뜨겁게라고들 한다지만, 그 말은 틀렸다.

        

        절멸부대에선 이렇게 가르친다. 머리도, 가슴도, 손끝도 모두 차갑게 유지해라.

        

        크라실로프의 지독한 겨울처럼. 그 기나긴 밤처럼. 차갑게, 고요하게, 치밀하게.

        

        절멸부대 장교는 혼란에 휩싸인 차량 속에서 기척을 죽인 채로 조용히 사라졌다.

        

        난간을 딛고, 선반을 밟고, 뒤엉키는 짐더미들을 쳐내며, 위로, 위로, 위로.

        

        

       *

        

        

        이자벨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단편적인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튕겨져 나가는 몸, 마구 흔들리는 시야, 휘몰아치는 격통.

        

        깨진 차창과 쏟아지는 토사.

        

        그리고, 으스러지며 찢겨 나가는 차체.

        

        그리고, 하나가 더.

        

        

        “헉!”

        

        

        이자벨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저녁놀을 바라보며 스쳐가던 크라첸로프의 침엽수림을 구경하던 찰나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찌를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객실이 토사 속에 파묻혔다. 그녀의 눈이 점점 어둠에 적응하며, 깨진 창문 너머로 쏟아진 흙더미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옥 또옥,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후욱, 훅.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냘픈 소리.

        

        

        “정신이… 후윽… 정신이 드십… 니까, 아가씨?”

        “오거스트 경…?”

        

        

        한 사내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아니. 못 박혀 있다.

        

        한쪽 팔은 토사 속에 파묻혀있고, 옆구리 쪽엔 길쭉하게 철근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는, 그의 입과 코. 그리고 허리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내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이다. 그녀에게 쏟아질 바위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떨어져 내리는 열차의 파편들을 등으로 받았다.

        

        그녀는 경악에 찬 눈으로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는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가씨. 도망… 흐윽…! 도망치셔야 합니다…. 흉수가 찾아올 겁니다. 이건 아가씨를 노린… 후윽…!”

        “그만, 그만! 대, 대답해요! 왜…?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야. 당신, 진짜 병신이야?”

        

        

        이자벨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설마, 내가 죽으면 우리 아버님이 분노하시기라도 할 줄 알아요? 아냐! 그 사람은 어느 누구한테도 관심이 없어!!”

        “압니다.”

        

        

        기사는 힘없이 웃었다. 틸레스의 누가 모르겠는가. 제 처자식을 모두 버리고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고 있는 그 기이한 사내에 대해서.

        

        처음, 마왕을 죽인 후 상처를 정양하기 위해 떠났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후, 마왕에 의해 용사의 마음이 뒤틀렸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4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용사를 잊어가기 시작했다.

        

        마왕을 죽였던 그 순간부터 용사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용사란 개인이 아니니까.

        막시밀리앙이라는 사내는 용사라는 이름 아래 덧없이 스러져. 이젠 그저 업적과 신화만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

        

        

        “당신은 날 증오하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용사의 딸이니까.”

        

        

        사내의 눈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기이할 정도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자벨은 이런 상황에서도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우리 아버님께서 과연 그 ‘딸’한테 한 푼이라도 관심을 기울이실까?”

        “아뇨. 아가씨. 막시밀리앙의 관심 따윈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용사의 딸이라.

        

        

        “일개 개인이 인류 전체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줄 수 있었으니까. 그 시절을 함께 보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위대한 사내조차도 후손을 남기고 세월에 스러져가는 ‘사람’이란 뜻이니까.”

        

        

        막시밀리앙도 사람이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제지만,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할 문장이다.

        

        그러나, 이자벨은 다르다. 그녀는 사람이다. 분노하고, 시기하고, 슬퍼하고.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다.

        

        그러니까, 이자벨의 존재 자체는 용사 또한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반대로. 인간이란, 인간인 이상. 용사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이자벨이란 사람을 혐오하더라도, 이자벨이란 존재를 긍정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희망이었다.

        

        용사가 남겨둔 마지막 씨앗, 그것이 발화하는 것 자체가 희망을 상징한다. 지난 시절의 전쟁이 끝나고 남겨진 사람들이 무너진 터전을 일으켜 세우는 이 시대에.

        

        이 피폐한 시대에도 피어오를 수 있는 희망이다.

        

        마왕과 투쟁하는 징집병들의 희망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개 개인을 위한 희망이.

        

        용사가 그 스스로 승리의 상징이라 불렸다면, 용사의 혈육이란 재건의 상징이다.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자벨을 증오하면서도 몸을 날렸다.

        

        그는 틸레스의 기사였으므로. 대의 아래에서 개인을 버릴 수 있는 사내였으니까. 그 또한 인류의 재건을 바라마지않는 소시민이었으므로.

        

        

        “훌륭하군.”

        

        

        그의 말이 끝났을 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차창 안에 쏟아졌던 흙더미 속에서 팔뚝이 튀어 나왔다.

        

        그 팔뚝은 더듬거리며 흙더미를 한참 뒤적이더니 곧 스르륵 빠져나갔다.

        

        차가운 늦겨울 밤의 공기가 시원하게 객실 안을 식히고.

        

        그 열린 틈 사이로 새파란 달빛이 스며들었다.

        

        

        “기사, 그대의 이름은?”

        “디안 오거스트. 귀하는?”

        “이반 페트로비치.”

        

        

        흙더미가 무너지며 한 사내가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빛을 등지고, 검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살고 싶나?”

        “가능하다면.”

        “아플거다.”

        

        

       

        이반은 힐링 포션의 뚜껑을 뜯어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참고) 힐링 포션은 상처가 깊을수록 고통스럽습니다.

    늦어서… 죄송…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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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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