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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설정 놀음은 설정의 재미있는 부분만 쏙 빼서 가지고 놀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원래부터 아제르나 전기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그 게임 시리즈의 세계관을 외우고 싶어 했다. 세계관에 등장하는 신화, 대륙과 나라, 마법과 문화…… 세세하게 정리되어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읽었다.

        

       두툼한 설정집을 사다 읽기도 하고, 게임 내에 ‘서적’으로 등장하는 텍스트들은 빠짐없이 다 읽고, 마물이나 짐승의 설명이나 적에 대한 설명, 등장인물과의 이벤트를 모두 마치면 채워지는 인물 노트의 설명까지 전부.

        

       1년에 한 편씩 나오는 시리즈였기에, 한 편을 클리어하고 다음 편을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다른 게임도 하긴 했고, 내가 최신작을 클리어하기 전에 발매된 전작들도 다 플레이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시리즈를 7년 동안 열심히 퍼먹고 있으면 먹을 것이 바닥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시리즈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다고 해도 주기적으로 세계관이 리셋되기까지 했으니까.

        

       아무리 게임 내의 모든 텍스트를 끌어모으고 거기에 세계관 설정집을 추가한다고 해도, 한 세계관을 요약하는데 필요한 책은 설정집 두께만큼 쓴다는 가정하에 대충 세 권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거고.

        

       ……문제는, 그게 ‘게임’일 때나 그렇다는 이야기다.

        

       게임에서 무조건 그 세계관의 밝은 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면의 모든 어두운 부분이 다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어두워서 보고 있기만 해도 우울함이 전염될 것 같은 설정은 그냥 대사로 짤막하게 설명하고 건너가기도 하고, 세계의 어두운 일면을 ‘얼핏’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우울한 부분은 대충 읽고 넘기고 재미있는 부분만 파면서 설정을 연구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하지만, 그게 ‘실제 세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임에서 ‘이런 뒷골목도 있다’하고 짧게 보여준 장면이 실제 세계에서는 수백 편의 논문이 되어 존재한다. 이런 빈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수많은 예시와 답안을 전부 보여주면서 서로 논박하고 옹호한다.

        

       역사도 그렇다. 게임에서는 본편 시점에 중요한 부분만 깔끔하게 요약해서 보여주지만, 이 세계의 역사서는 내가 살던 세계의 역사서처럼 두껍고 재미없고 많기까지 하다. 게다가 중심으로 다루는 인물 별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고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 또 기나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증기기관, 총기, 마법. 세계관을 이루는 그 세 가지의 핵심마저도 재료공학, 기계공학, 화학, 물리학, 마력학, 마도학, 마도공학…… 온갖 종류의 학문으로 갈라져서 머리가 깨지게 했다.

        

       심지어 그 모든 이론을 관통하는 핵심 학문은 무려 수학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생 때 수학을 시원하게 포기해버린 수학 포기자였고.

        

       ……내가 설정 파고들자고 수학까지 해야겠냐?

        

       *

        

       하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하나의 책을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시간을 되돌려 확실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같은 가정교사에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물어봐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사람한테는 내가 딱 한 번 물어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게다가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딸려오는 굉장한 이득도 있었고.

        

       “과연 황녀님이십니다!”

        

       가정교사가 대단히 밝은 얼굴로 손뼉을 치며 외쳤다.

        

       황녀, 라는 호칭은 지금까지도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다른 호칭을 쓰라고 할 수도 없다. 어쨌거나 나는 황녀가 맞긴 했으니까.

        

       물론 진짜 황녀인 앨리스와는 여러모로 그 의미가 다르긴 했지만, 이런 교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후에 ‘이렇게 유능한 황녀의 교사였다’는 캐치프레이즈만 가져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으리라.

        

       “어떻게 제가 하나를 말할 때마다 모두 이해하고 넘어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황녀님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황녀님은 분명 황립 아카데미에 가서도 그 재능을 꽃피우실 수 있겠죠!”

        

       ……좀 과하게 좋아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나는 최대한 무표정으로 넘길 뿐이었다.

        

       물론 내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내 목표는 황립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게임에서는 시험 문제가 한두 문제만 물어보고 지나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게 뻔하다. 분명 현실의 시험처럼 엄격한 분위기에서 수십 개의 문제를 시간 내에 풀어야 할 거다.

        

       뭐…… 시험 문제를 본 다음에 시간을 돌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래서야 평소에 밑천이 드러난다.

        

       그러니 평소에 이런 ‘똑똑하고 유능한’ 이미지를 챙겨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황립 아카데미에 들어가려고 하는가. 원작에서의 클레어도 처음부터 입학한 게 아니라 스토리 도중에 황제가 꽂아 넣어서 들어갔는데.

        

       내가 굳이 황립 아카데미에 직접 입학하려는 이유는……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아제르나 전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 굉장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 캐릭터들이랑 같이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다고?

        

       이걸 참아? 어떻게?

        

       뭐, 물론 나는 이 게임에서 악의 세력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의 밑에 있었고, 그러니 여러모로 주인공 일행과는 반목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사실 나에게는 굉장한 메리트였다.

        

       원작에서는 죽는 캐릭터가 몇 명 있다.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반드시 일부 캐릭터는 죽게 된다. 어떤 캐릭터가 죽게 될지는 선택지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선택을 해도 반드시 죽게 되는 클레어를 포함해 루트에 따라 두 명에서 세 명 정도가 영구적으로 사망한다.

        

       내가 플레이했던 최신작에선 그랬다. 후속작에서는 세이브 데이터를 연동해서 그 결과를 이어가려고 한다고 했던가.

        

       물론 플레이어들은 그 작은 회사가 이 세계관의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그 연동을 쭉 이어 나갈 거라고 절대 믿지 않았다. 분명히 초반부만 침울하게 만들고 뒤에서 반드시 살려내라는 게 다수 의견이었고, 내 의견도 그랬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가 애정을 품고 있던 캐릭터가 사망하는 건 정말 싫었다.

        

       그러니까, 내가 막는다. 황제 아래 있고 제대로 된 신임을 얻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

        

       “…….”

        

       뭐, 그런 생각으로 내가 수험생이었던 시절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것의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앨리스처럼.

        

       우리 둘 다, 올해 생일이 지나면 만으로 14세.

        

       이 세계관에서는 만 15세에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올해 말이면 입학시험을 보게 될 거고, 거기서도 수석, 차석을 따져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특혜를 받게 된다. 그 뒤 4년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게 되고, 학기별로 시험을 쳐 계속해서 성적을 가린다.

        

       한국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중3 때 입학해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다니는 셈이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입학 시점에서 수석은 앨리스 황녀였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앨리스가 흉흉한 목소리로 묻는다. 목소리에서 질투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앨리스는 입학시험에서 전체 과목 시험을 합쳐 딱 다섯 문제를 틀리고 입학했다. 황립 론다리움 아카데미의 시험은 당연히 어렵기로 유명하고, 보통은 500점 만점 중에서 450점 이상으로 들어가면 수재 소리를 듣는다.

        

       487점으로 입학한 앨리스는 당연히 수재 중의 수재였고. 자기 ‘형제자매’들보다 더 뛰어나고 싶은 바람으로 열심히 공부한 앨리스가 이룩한 업적이었다.

        

       “…….”

        

       나는 말없이 내가 들고 있는 모의고사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495점이라는 점수가 쓰여있었다.

        

       참고로 모의고사는 보통 실제 시험보다 다소 어렵다는 평가를 듣는다.

        

       ……내가 너무 과하게 공부했나?

        

       “…….”

        

       내가 아무 대답도 없는 것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앨리스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해 봐. 그거, 정말로 네 실력으로 푼 거야?”

        

       음…….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게 되나?

        

       시간을 돌리는 것도 내 ‘실력’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고 달달 외운 거니까.

        

       게다가 앨리스가 하루에 네 시간씩 자면서 공부할 때 나는 마음 푹 놓고 여덟 시간을 꽉꽉 채워 잤다. 남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앨리스까지 포함해서, 모두 나를 보면 수재 수준이 아니라 그냥 천재 수준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너무 과했던 건가?

        

       “……운이 좋았습니다.”

        

       “운?”

        

       그래서 억지로 지어낸 말이 바로 그런 소리였다.

        

       “예. 모르는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감에 따라 고른 답변이 정답이었던 모양입니다. 다섯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하니 분명, 그 문제의 답을 비워두었다면 황녀님께서 저보다 더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으셨겠죠.”

        

       다만 억지로 지어낸 티가 나지 않도록, 나는 최대한 평소의 어조를 유지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황녀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남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니까요.”

        

       평소에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도 나는 미리 미래를 보고 과거로 돌아가 일을 해결했다. 어느 정도는 유능하게 보여도, 확실히 어떤 일은 그냥 운이 좋아서 넘어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런 나를 보는 몇몇 사람들은 내가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뭐, 운이 좋다는 건 나도 동의한다.

        

       솔직히,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주인공 중 하나가 내 앞에 서 있었으니까.

        

       “……음.”

        

       앨리스는 마치 나의 그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그래? 정말이지?”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풀어진 표정을 어떻게든 다잡으려고 노력하며 말한다.

        

       “정말입니다. 황녀님은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니.”

        

       지난 9년의 시간 동안 나는 황궁 내의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부탁받은 일이 있다면 묵묵히 해내고, 질문을 받으면 성실하게 대답했다.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거짓말의 경우에는 일단 질러두고 그게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꾸민 것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남들이 보는 결과는 같았으니까.

        

       참고로 황제는 그 이후에 나에게 어떤 암살도 시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거겠지. 덕분에 연기가 더 수월하긴 했지만.

        

       “흐흥, 그렇구나. 그러니까, 운 때문이라는 거지?”

        

       결국 앨리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애한테 거짓말을 하는 게 조금 켕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거면 된 거겠지.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흥.”

        

       내 말에 앨리스는 새침하게 콧소리를 냈다.

        

       “뭐, 그래도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지. 이게 실전이었다면 분명히 네가 수석이 되었을 테니까.”

        

       앨리스는 투지로 불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두고 봐. 다음에는 그 운으로도 이기지 못하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귀엽기도 하지.

        

       ……입학시험에서는 다섯 문제 정도는 더 틀리도록 해야겠다.

        

       *

        

       그리고 앨리스의 성질을 자꾸 건드리게 되는 것 외에도 부작용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실비아.”

        

       “예.”

        

       “혹시 세계정세에 관심이 있느냐?”

        

       “…….”

        

       황제와 독대한 자리에서, 나에게 그런 몹시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순간, 예? 하고 되물어볼 뻔했지만 꾹 참았다.

        

       “음.”

        

       침묵하는 나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황제는 침음을 흘린 뒤 말했다.

        

       “한 달 뒤에 법국과 왕국, 그리고 우리 제국의 3자회담이 있다.”

        

       “…….”

        

       여기까지도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다. 황제는 종종 나를 불러서 뜬금없는 소리를 하곤 했고, 이번에도 그냥 그런 소리인 줄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일정이 있어서 그 자리에 못 가게 되었구나.”

        

       그래서?

        

       얼굴에 그런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니,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네가 대신 가보겠느냐?”

        

       “네? 제가요?”

        

       “음?”

        

       아.

        

       못 참았다.

        

       ……다시.

        

       *

        

       “……어째서 다른 이가 아닌 제가 가는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이렇게 말한 이상, 이미 마음을 굳혔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나한테 그 일을 시킬 생각이 아니었다면 나를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을 거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실제 나이가 어떻건, 지금 내 나이는 공식적으로 만 14세. 한국 나이로는 16세였고, 이제 막 내년에 아카데미— 그러니까 따지자면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는 참이다.

        

       아무리 애니 풍 서브컬쳐에서 10대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그야 내가 너를 믿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

        

       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지나치게 노력을 했던 모양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 그러니까 같은 황제의 아이들이나, 진짜 황녀인 앨리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황제에까지.

        

       나 자신은 몰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신뢰가 좀……

        

       ……심하게 굳건해지는 것이, 내가 요즘 들어 고민하는 내 능력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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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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