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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온기.

       

       소녀의 손이 이끈 곳에는 온기가 가득했습니다. 거리를 전전하며 노숙으로 밤을 보내던 당신에게는 실로 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입니다.

       

       타닥. 탁.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안의 장작과, 그 위에 매달린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베이컨 세 장. 당신은 그 향기와 자극적인 소리에 침이 고였습니다.

       

       당신이 베이컨에 정신이 팔려 있자, 벽난로 앞에서 요리를 하던 여자 용병이 숟가락으로 프라이팬을 땡땡 두드렸습니다.

       

       일렁이는 불꽃같은 붉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커다랗게 가로지르는 흉터. 살벌하게 치켜 뜬 눈. 가볍고도 단단하게 무장한 가죽 갑옷까지. 

       

       당신은 소년 기사에게 배웠던 전투력 측정 방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단검을 무장하고 있는지, 무장하고 있다면 손잡이가 얼마나 닳아 있는지.

       

       여자 용병은 단검을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었고, 손잡이에는 상당히 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소년 기사식 견적에 따르면 ‘날리는 용병단의 중견’ 정도의 실력. 

       

       2황자일 시절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을 인력이건만, 권력도 돈도 없는 지금 상태에서는 상당히 중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상대가 날 선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더더욱.

       

       당신이 긴장하며 마력을 끌어올리려 할 때, 당신을 이끈 소녀가 먼저 나섰습니다.

       

       “로냐, 나 왔어!”

       

       “센트라, 옆에 있는 녀석은 또 누구야. 이번에도 유기견 한 마리 주워 온 거야?”

       

       “유기견이라니! 사람한테 실례야!”

       

       “거적때기 입고 쫄쫄 굶으면 유기견이지. 너, 이름을 말 해.”

       

       당신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자랑스럽게 밝혀야 했을 이름. 그 이름이, 이 세계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당신이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유지하자, 로냐라고 불린 여자 용병은 눈빛에 살기를 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밝힐 수 없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수상한 사람일 테니.

       

       그 때, 누군가가 당신의 손등을 부드럽게 터치했습니다.

       

       당신이 깜짝 놀란 속마음과는 달리 침착한 척을 하며 눈동자를 돌리자. 센트라, 당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또한 현재 진행형으로 베풀고 있는─ 소녀의 손이 가볍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가벼운 접촉이건만, 당신은 어쩐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녀가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이리드다.”

       

       “이리드? 영락제(零落帝) 이리드?”

       

       “⋯⋯⋯⋯.”

       

       “망설일 만했네. 누구든 그 이름을 들으면 곱게 안 볼 테니까. 하필이면 그런 이름이 붙다니, 너도 재수가 없구나. 응?”

       

       로냐는 낄낄거리며 웃다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경고를 남겼습니다.

       

       “사고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가라. 센트라는 불쌍한 거렁뱅이를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난 아니야. 오히려 죽이고 싶은 쪽이지.”

       

       “⋯⋯은혜를 원수로 갚으라고 배운 적은 없다.”

       

       “나도 거렁뱅이 죽이지 말라고 배운 적 없어.”

       

       “그만!”

       

       센트라가 폴짝 뛰어들어 당신과 로냐 사이를 막아섰습니다. 

       

       “걱정해 주는 건 감사하지만, 로냐. 이 이리드라는 분은 좋은 사람 같아요.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대체 무슨 근거로?”

       

       “3층에서 제가 뛰어내릴 때⋯⋯ 신사답게 고개를 돌려주셨거든요. 가요, 이리드! 아, 편하게 불러도 괜찮죠? 이쪽으로 와요, 오늘은 정말 맛 좋은 스튜가 나왔거든요!”

       

       당신은 다시 한 번 이끌렸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태양같이 빛나는 웃음에, 그리고 옅게나마 코를 스치는 로즈마리의 향기에.

       

       ===============================================================

       

       제국의 황자라는 포지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자리다. 

       

       당연히 그중에서는 여성들도 포함된다. 정략결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제국 황실의 특성상 더더욱 그렇다.

       

       2황자 이리드는 지금까지 많은 귀족 여인들을 만났고, 그들의 생리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독한 향수 냄새, 가식의 가면, 권력을 탐하는 속내, 실수인 척 스킨십을 걸어오는 수작까지.

       

       이리드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가슴 설레었던 적이 없었다.

       

       눈빛에 담긴 의도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리드 자신을 보물상자로 바라보는 그 눈. 

       

       언젠가, 이리드는 반드시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것이었지만. 그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우스운 감정이 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느껴지는 미약한 두근거림 또한 착각이리라.

       

       

       “스튜는 어때요?”

       

       센트라는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이리드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란 눈매의 맑은 눈동자에는 가식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맛있군. 훌륭한⋯⋯ 요리다.”

       

       위압감도 날카로움도 없는 그 시선을, 이리드는 어쩐지 똑바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심장 박동이 빨리 뛰며, 자신의 감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것이 느껴졌다.

       

       생전 처음 겪는 3일간의 노숙에 마음이 흔들려서, 이토록 간단한 호의에도 과민반응하게 되었노라고. 2황자는 거듭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이다. 혹시 입에 안 맞으면 어쩌나 했어요!”

       

       “뭘 내 줘도 가릴 처지는 아니다. 그리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로 파렴치하고 싶지는 않아.”

       

       “역시,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좋다니까⋯⋯! 로냐는 자꾸 ‘너는 너무 경계심이 없어-‘ 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구요. 봐요, 이리드는 좋은 사람이었잖아요!”

       

       이리드의 대답이 흡족했던 듯, 센트라는 즐거워하며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했다.

       

       염치를 아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다니, 이리드는 묘한 기분이었다. 당연한 것으로 공치사를 받는 게 이렇게 낯부끄러운 일이었던가.

       

       이리드는 센트라의 재잘거림을 들으면서 스튜를 한 숟가락 떠 넣었다. 여태 맛본 산해진미와 비교하면 당연히 맛은 떨어졌지만, 속을 데우는 푸근함이 있어서 좋았다.

       

       안에 고기도 적잖게 들어간 것 같다. 기름진 뒷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잡내를 잡아주는 풀이 들어간 것 같은데, 백색초? 아니면⋯⋯

       

       “그런데, 제 치마 안쪽 진짜 안 본 거 맞죠?”

       

       “──큭, 커윽, 콜록콜록⋯⋯!”

       

       스튜를 음미하던 이리드는 불의의 일격에 사레가 들리고야 말았다. 

       

       “엄마야, 미, 미안해요! 그냥 물어본다는 게⋯⋯ 여기 물!”

       

       “콜록, 콜록콜록⋯⋯ 그런, 말은, 상대를, 콜록, 가려가며!”

       

       “물부터 마셔요, 자. 등 두드려 드릴 테니까. 어, 배를 두드려야 하던가?”

       

       센트라는 이리드의 등을 통통 두드려댔다. 몸 전체가 울리는 타격이었다. 이 상태로 물을 마시면 물에도 사레가 들릴 것 같아서, 그만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이리드는 물을 마셔가며 사레를 진정시켰다.

       

       “흡, 후우⋯⋯.”

       

       “그래서, 안 본 거 맞죠?”

       

       “⋯⋯로냐라는 용병 앞에서, 네가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질러 봤어요. 로냐가 또 내쫓을 것 같아서. 그래서 대답은요?”

       

       “안 봤다. 맹세컨대.”

       

       “휴, 안 봤으면 됐어요. 안 입은 거 들킨 줄 알았네.”

       

       “아니, 분명 검은색⋯⋯.”

       

       “역시 봤구나!”

       

       집요한 유도신문에 넘어간 이리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프릴. 가운데 작고 소중한 빨간 리본. 약간 반투명.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구성이었다.

       

       센트라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괜히 물어본 건 아니구요, 막⋯⋯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쵸? 이, 이런 속옷을 입은 사람은 그렇고 그런 일을 할 거고 뭐⋯⋯ 그런 거! 그게 오해라고 말하고 싶어서요.”

       

       “그런 오해는, 생각한 적 없다.”

       

       그 상황에 ‘야한 속옷을 입었으니 분명 헤픈 여자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유니콘도 그렇게 못 한다. 

       

       이리드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귀족 영애들의 육탄공격에는 언제나 과감한 속옷이 뒤따랐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낯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돈은 없는데, 예쁜 옷은 입고 싶었거든요. 드레스라던가 장신구⋯⋯ 그런 거요! 그래서, 속옷은 면적이 제일 작으니까 값도 얼마 안 나가고⋯⋯?”

       

       “그만, 그만!”

       

       이리드는 괴로운 표정으로 TMI 대방출을 막아섰다. 이 착해빠진 소녀가 대체 어디까지 털어놓을 생각인 건지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로냐라는 용병이 센트라를 싸고 도는 이유를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

       

       “아즈아아아아아아-!!”

       

       “황자님이 팬티 봤다는 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야⋯⋯?!”

       

       마탑주가 날 미친놈처럼 보던 말던 상관 없다.

       

       나는, 내 연출에 대한 자존심을 지킨 거다!

       

       마탑주는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내 정수리를 통통 두들기면서 말했다.

       

       “으음, 그래서⋯⋯ 이대로 그, 황자님을 꼬셔서 드래곤 하트를 타낼 셈⋯⋯?”

       

       ‘님 진짜 게이임?’ 눈빛 시즌 2. 용납할 수 없는 음해였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놉.”

       

       “그럼, 이 다음에 어떻게 할 생각인데?”

       

       다음 전개를 물어보다니, 마탑주가 드디어 TRPG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는 순순히 내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다.

       

       “일단 처음 생각한 전개는 이미 조졌어요.”

       

       “조졌구나.”

       

       조졌다.

       

       아카데미 엑스트라도 울고 갈 기가 막힌 이벤트 회피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타이밍도 좋지 않다. 이제 와서 영지물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애초에 맛보기용 세 시간 아니었던가. 기초공사 끝내고 떡밥을 뿌린 뒤에 세션을 끝냄으로써, 절단신공의 효능을 극한으로 발휘할 계획이었다.

       

       2황자의 보법이 아주 오묘하고 신묘하여 시간이 촉박해진 것이지.

       

       그렇다고 무지성 나데나데를 퍼붓다가 끝내기에는 로망이 없었다.

       

       실익도 없었다. ‘나데나데는 즐거웠지만 세션 초반부는 꼽군. 죽어라.’ 이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내게는 인질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빌드업을 하고 / 사건을 진행시켜서 / 세션 재밌고 알찼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다음에 또 하고 싶게 만든다. 처음부터 나는 그 생각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젠 고삐가 생겼다. 황자 녀석, 은근히 스킨십에 약하다.

       최면세뇌빔을 쏜 것도 아닌데 센트라가 손만 잡았다 하면 뇌가 표백되는 게 훤히 보였다.

       

       엇나가고 수틀린다 싶으면 이제는 냅다 손부터 잡아버리면 되겠지!

       

       

       “아직 호감도가 부족해요. 센트라라는 인물의 설정을 조금 더 푼 다음에, 플레이어와의 유대가 견고해지면 사건을 터트려야죠. 아마 앞으로⋯⋯ 2세션 분량 후에.”

       

       “그렇게 말해도 나는 모른다⋯⋯? 음, 근데 있잖아.”

       

       “네, 말씀하세요.”

       

       “센트라의 모델링 말야. 하트를 가져다 써도 괜찮았던 거야?”

       

       “⋯⋯뭐, 별 문제 있겠어요?”

       

       나는 잠깐 생각한 뒤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진짜로 별 문제 있겠느냐고. 2황자는 하트를 본 적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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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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