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

     

    배드엔딩 [평민의 죄].

     

    마왕군의 공격으로 제국 전역의 밀밭이 역병에 오염되었고, 그로 인해 유례없던 식량난이 발생한다.

     

    아셀라는 그나마 남은 밀을 마왕 원정군에 우선으로 배급하고 기아로 죽어가는 평민들을 무시한다.

     

    평민들이 황궁 앞에 모여들어 빵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아셀라는 그들을 조롱하며 말했다.

     

    빵 대신 과자를 먹으라는 상투적인 말은 안 했다.

     

     

    ―사실 짐이 밀밭에 저주를 풀었다. 비천한 평민은 마땅히 굶주리며 죽어가거라.

     

     

    평민들은 배가 고파 봉기할 힘도 없었고, 제국은 그대로 멸망했다.

     

    나중에야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았고, 좌절한 용사님께서 원정을 포기해 세상이 어둠에 잠식됐다.

     

     

    그 엔딩에서 알 수 있듯, 아셀라가 평민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는 건 분명하다.

     

    ‘평민에 대한 악감정이 이런 작은 시찰에서 누적되어 생겨난단 소린가 본데.’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나라도 한가롭게 티타임을 보내던 와중에 삥을 뜯는 깡패를 만나면 없던 악감정이 무럭무럭 피어나겠다.

     

    그리고 나도 이 개자식에게 열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간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받았다.

     

    무엇보다 상단 놈이면 내 영지민도 아니다.

     

    평소 내 영지민에게도 이런 짓거리를 하고 다녔으리라 생각하면 열이 두 배로 오른다.

     

     

    나는 남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아셀라를 등지고 섰다.

     

    시비를 대처할 때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법이다.

     

    선공필승. 다소 격식은 떨어지더라도 망나니가 되는 쪽이 효과적이다.

     

    “오랜만에 산책 나왔더니 별 거렁뱅이가 앞마당에서 허락도 없이 장사질이야. 뭐 하는 자식들이야?”

     

    두목인 남자는 덩치가 컸다.

    그가 대흉근을 부풀리며 내게 몸을 붙여온다. 위협할 기세다.

     

    “입조심 해라, 삐끼 놈아. 돈에 눈 돌아가서 대낮에 골 빈 여자나 꼬시는 자식이.”

     

    “허.”

     

    이 친구 말하는 뽄새 보소.

     

    내가 아셀라를 유혹하는 호스트로 보였나.

    얘는 목숨이 천 개쯤 있는 모양이다.

     

    “귓구녕이 막혔나. 여기 내 앞마당이라는 소리 못 들었냐?”

     

    “이게 뭘로 보이나?”

     

    남자가 상의 가슴팍의 문양을 가리켰다.

     

    “제국의 모든 땅이 슈프레 상단의 앞마당이지. 분수를 알아라.”

     

    “그래! 당장 꺼져. 나풀거리는 모자에 기생오라비 같은 꼬락서니하고는.”

     

    부하들도 아주 기세가 등등하다.

    내가 코웃음을 쳤다.

     

    “말이 좋아 상단이지 그게 수수료나 따먹는 택배회사지. 그리고 이거, 그냥 조끼네?”

     

    탁탁, 남자의 조끼를 손등으로 치니 먼지가 풀풀 났다.

     

    “너 거기 뭐 돼? 꼬질꼬질한 게 끽해야 짐 나르는 잡부일 게 뻔하구만. 어으, 찌린내.”

     

    팍! 내가 놈의 조끼를 내쳤다.

     

    “그리고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왜 남의 영지에서 상단 놈들이 깡패질이냐고. 어?”

     

    “정당한 대출을 요구했을 뿐이다. 우리 상단 정도 이름이면 금화 정도야 빌려줄 수도 있잖나?”

     

    “니들 짐 운송하러 강 타고 잠깐 온 게 전부잖아. 언제 갚을 줄 알고 돈을 빌려줘? 그리고 말단 주제에 자꾸 이름 팔아먹네?”

     

    내 말에 성질이 긁혔는지 남자가 눈썹을 꿈틀댔다.

     

    “이 자식이 기어코…!”

     

    슬슬 더 열받게 하면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 같으니 정체를 밝힐까, 하는데 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왼 주먹이 벌써 날아온다.

     

    하여간 성질 급한 놈들이 이래서 안 돼요.

     

    체격 차가 상당하다. 한 대 맞으면 치명상이 분명하다.

     

    나도 짬은 있어서 반응속도는 상당하거든.

    고개를 돌려 가볍게 피해낸다.

     

    “아니…?!”

     

    피할 줄은 몰랐는지 놈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선빵 맞고 가만히는 안 있는다.

    주먹을 쥐고 바로 반격할 자세를 취한다.

     

    …근데 나, 근력이 좀 허약했지.

    많이 허약했다.

     

    반격한들 대미지를 넣을 수나 있나, 의문이 든 순간.

     

     

    [진단 D가 발동합니다]

     

     

    상태창에 메시지가 뜨고 어떤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었다.

     

    [부상 상태 : 골절]

    [부상 위치 : 오른팔]

     

    남자의 오른팔이 골절 상태라는 정보.

    그의 몸 일부가 붉게 점등했기에 위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왼손잡이였던 게 아니라 오른팔을 다쳐서 왼손으로 때리려 했었구만?’

     

    ―빠악!

     

    망설임 없이 붉게 표시된 부분에 스트레이트를 날려준다.

     

    “히아악!”

     

    그러자 여태 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놈이 여자같이 높은 비명을 질러내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아이구, 그렇게 아팠어요.

     

    반응을 보니 분쇄골절일지도. 그거 진짜 아프지.

     

    몸을 거칠게 쓰는 인부니 최근에 부상을 입었던 것일 터다.

     

    틈은 놓치지 않는다. 나는 엎어진 놈을 무릎으로 눌러 즉시 제압했다.

     

    “형님!”

    “이 자식이!”

     

    나머지 두 명이 달려들려 하길래 뒷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냈다.

     

    “야야, 진짜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라?”

     

    시퍼런 날붙이를 보자 그들이 식겁하며 물러섰다.

     

    “뭐, 뭐야.”

    “진짜 미친놈이잖아…! 경비 불러!”

     

    소란스러우니 점점 구경꾼도 몰려들기 시작한다.

     

    상관없다. 내 관심은 오직 한 명, 아셀라에게 가 있었다.

     

     

    [No. 021 : 평민의 죄 25% → 23%]

     

     

    아셀라는 내 행동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이 상단 놈들에게 위협감,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평민에 대한 악감정이 누적되어 이 배드엔딩을 만들어낸다고 가정해보자.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악감정의 대상을 돌려야지.’

     

    나는 구경꾼들도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외쳤다.

     

    “경비? 불러봐라! 이 영지의 경비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확인해보라고!”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던진다.

     

    고트베르크의 자랑, 새하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저, 저 사람!”

    “라스! 라스 공자다!”

    “후작가의 망나니다!”

     

    나를 알아본 구경꾼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하긴, 이 거리에서 날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어떻게 공자님이라고 부르는 놈이 하나도 없이 반말이다. 어지간한 평판이다.

     

    “고, 공자? 후작가의 영식이라고?”

    “흰 머리… 진짜인가!”

     

    부하들이 당황했다. 가재를 잡으려 돌을 들췄더니 독거미가 튀어나온 꼴이다.

     

    나는 칼을 집어넣고 대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 돈은 왜 필요하냐?”

     

    “예, 예에? 아니, 그게….”

     

    “빨리 대답해, 팍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기 전에.”

     

    내 무릎에 깔린 대장은 여전히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 그게… 상단주가 여기 와 계신데, 그분께 배송해야 할 고급품을 오전에 상자째로 깨먹었습니다. 그 배상금이 필요해서….”

     

    “아, 그러니까 상단주 탓이다?”

     

    “아뇨, 그건 아니고 제 잘못….”

     

    “한 번 더 물을 테니까 그렇게 말해.”

     

    “예?”

     

    “안 하면 뒤진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큰소리로 외쳤다.

     

    “슈프레 상단! 항상 내 영지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겁을 주고 다녔겠다! 내가 오늘은 안 봐준다!”

     

    내 외침에 동조하는 구경꾼들이 있었다.

     

    “맞아!”

    “저놈들은 보일 때마다 문제야!”

    “공자님! 확 더 패버리쇼!”

     

    지금 제압한 놈들이 우리 영지에 오는 건 오늘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고.

     

    하지만 상단은 배를 타고 일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몸놀림이 험하다.

    구경꾼들이 동조하리라고는 예측했다.

     

    대장의 머리채를 잡아들고 다시 한 번 크게 외친다.

     

    “말해! 너도 평민이면서 왜 같은 평민을 갈취하려 했어!”

     

    “사, 상단주님이 시켰습니다!!”

     

    대장이 목청껏 외쳤다.

     

    좋아, 의도대로 말해줬다.

     

    “아, 내가 위에 귀족이 있을 줄 알았지! 항상 우둔한 평민을 이용하는 건 귀족이기 마련이야. 고트베르크 가문에서 슈프레 상단과 직접 결판을 내야겠군!”

     

    내가 대장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경꾼들이 수군대며 웅성거린다.

     

    “이봐, 고트베르크 공자가 영지를 위해서 상단이랑 한판 붙는다는데?”

    “그냥 망나니인 줄 알았는데 자기 땅에 애착은 있는 분이었구먼.”

    “공자님, 멋집니다요!”

    “화끈해서 마음에 드는데!”

     

    화끈하긴, 내 얼굴이 다 화끈하다.

     

    쪽팔려 죽겠다.

     

    가극 연기도 아니고, 완전히 싸구려 연극 톤으로 대사를 외쳐버렸다.

     

    연기는 재능에 없었는데 뭐 어째.

     

    이 촌극의 원인인 아셀라의 눈치를 살짝 살펴보았다.

     

    …아셀라는 커피를 즐기며 나를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즉 쇼를 관람하는 기분이었나 보다.

     

     

    [No. 021 : 평민의 죄 23% → 5%]

     

     

    대신 배드엔딩 확률은 복구됐다.

    오히려 처음보다 조금 더 떨어졌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뭘 봐, 구경났어? 어?”

     

    주변을 향해 으르렁대주니 구경꾼들이 재빨리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엎드려 퍼져있는 대장에게 말했다.

     

    “야, 너희도 볼 일 다 봤으니 썩 꺼져. 더 귀찮게 하지 말고.”

     

    “괘, 괜찮습니까? 오늘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부디 상단에는 불문으로 부쳐주시면 감사하겠….”

     

    “시끄럽고.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상단주에게 들어가던 물건이 뭐였어?”

     

    우리 영지에서 구매해갈 고가품이면 항목이 뻔하긴 했다.

     

    “상등품 성수였습니다. 스무 병 정도였습니다만….”

     

    깨먹었다고 했으니 성수뿐이었겠지.

     

    스무 병이면 상당한 양이다.

     

    상단주가 반드시 고쳐야 하는 병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쓸만한 정보였기에 이만 놔주기로 했다.

     

    “그래, 이제 진짜로 꺼져. 팔 부러진 덴 내놓고 다니지 말고 뭐라도 묶고 다녀라.”

     

    “어? 부러진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묶는다니… 뭘 묶습니까?”

     

    답답하게 하네.

     

    원래 면상에 몇 대 더 때려줘야 이치에 맞는다. 하지만 헛소리도 짜증 난다.

     

    나는 대장 놈이 가지고 있던 봉을 부목 삼아 밧줄을 팔에 칭칭 감아 묶어줬다.

     

    “최소 2주일은 이러고 다녀. 치유사 볼 돈도 없으면 임마.”

     

    “어랍쇼? 왠진 몰라도 한결 편해졌군요… 감사합니다요. 폐를 끼쳐 정말 죄송했습니다요.”

     

    그들이 나와 아셀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이럴 땐 권력이 편하긴 편하다.

     

    ‘응?’

     

     

    ―――――――――――

     

    · 스킬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 응급처치 마스터리 E → D

     

    응급처치를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습니다.

    응급처치의 효과가 약간 증가합니다.

     

    ―――――――――――

     

     

    스킬 경험치가 생겨서 랭크가 올랐다.

     

    ‘빠른데. 내게 의학 지식이 있어서 그런가.’

     

    덕분에 [의학]의 전체 경험치도 올랐다.

     

    ‘새 스킬도 금방 나오겠는데.’

     

    나는 아셀라에게 돌아갔다.

     

    “잠깐 트러블이 있었군요, 황녀님. 불쾌하시진 않으셨는지요.”

     

    “아주 불쾌했어.”

     

    아셀라가 커피잔을 입에 슬며시 댔다가 떼고는 감상을 이어갔다.

     

    “그래도 이 커피와 함께 즐길 간식으로는 훌륭했어.”

     

    내가 광대 짓을 하니 재밌어져서 평민이고 뭐고 신경 안 쓰게 되셨나 보다.

     

    그래. 10년 후에서도 늘 이런 느낌이었지.

     

    나를 포함한 용사파티는 아셀라의 유흥을 위한 광대가 되어 서커스를 펼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뭐, 결과가 좋으면 됐다.

     

    “네 잔은 없어져 버렸네.”

     

    “다시 주문 안 하셨어요?”

     

    “금화는 주지 말라며.”

     

    “잘하셨습니다. 돌아가서 물이나 마시죠.”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의자에 앉은 찰나, 주인이 새 커피를 가져왔다.

     

    “주문하신 커피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시켜놨구나.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은화를 꺼내려니 주인이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아닙니다. 대금은 이쪽의 아가씨께 받았습니다.”

     

    “받았다고? 어떻게?”

     

    금화밖에 없어서 지불이 불가능했을 텐데.

     

    내가 미심쩍게 아셀라를 돌아보는 찰나, 주인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꽃으로 받았습니다. 싱싱하고 화사한 것이 장식으로 쓰기 좋겠더군요. 깨진 잔 가격까지 충분합니다. 그럼 마저 교제를 즐겨주시죠, 공자님.”

     

    주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갔다.

     

    내 앞에는 따끈한 버터 커피가 놓여있었다.

     

    “교제는 무슨 교제야.”

     

    고개를 돌려보니 아셀라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꽃이요?”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잖아.”

     

    아이들에게서 산 꽃을 바로 물물교환해서 써버렸다.

     

    현명한 방법이었다. 외상을 하거나 내 가문 이름을 대서 무료로 받으면 그만큼 명성에 금이 갔을 테니.

     

    탁, 아셀라가 잔을 내려놓고는 내게 말했다.

     

    “라스 공자.”

     

    “예.”

     

    “같은 상황이 생기면 또 그렇게 내 앞에 나서줄 거니?”

     

    “물론입니다.”

     

    나는 즉답했다.

    시뻘건 숫자가 쭉쭉 올라가면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갈 건 당연하니까.

     

    내 대답에 아셀라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 끝, 젖살이 덜 빠진 뺨에 버터 거품이 살짝 올라왔다.

     

    “여기 묻으셨네요.”

     

    팔을 뻗어 엄지로 슥 닦아주었다.

     

    황녀님 체면은 챙겨드려야지.

     

    “다 드셨으면 가실까요?”

     

    질문에 대답이 없다.

     

    아셀라를 쳐다보니 시선을 피한 채 이빨을 꽉 깨물고 있다.

     

    왜 또 화가 났어.

     

    “공자.”

     

    “예.”

     

    “그건 하지 마.”

     

    뭐를요.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