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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처음으로 봄을 실감하고, 따스한 풍경에서 잠시나마 서있는 사이.

       

       어느새 공작저에 머무른지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찰나처럼 느껴졌던 날이었다.

       

       다행히도 그 짧은 기간 동안 틀어졌던 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리시트 공작령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였으니까.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레이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차 앞에서 나를 배웅하고 있던 레이먼은, 유감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머물러도 좋았을 텐데 말이지.”

       

       “곧 아카데미의 개학이 찾아오지 않습니까. 이제는 정말 새로운 계절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지요.”

       

       “알고 있네… 우리 딸아이를 생각하면 잡아두고 싶네만. 너무 염치 없는 짓이겠지.”

       

       “공녀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강인한 분이시니까요.”

       

       “그래, 그러길 바라야지.”

       

       

       말은 이렇게 했어도, 나 역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하렛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나에게서 비롯된 강박과 죄책감 등으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진 상황이었다.

       

       

       내 곁에 붙어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루시처럼 리시트 가문에 잠시 머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여러 번 내밀었지만.

       

       당사자의 연이은 거절로 인해 무산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추고, 그간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하고 있는데… 내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이상하지.’

       

       

       어쩌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걸지도.

       

       어차피 보름만 기다리면 다시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을 테니, 조급함을 넣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일렁이는 잡념을 털어냈다.

       

       직후 딱딱하게 굳어있는 은발의 소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카데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공녀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그려낸다.

       

       

       “부디 그날까지 무탈하시기를.”

       

       

       마하렛은 그런 나를 말없이 올려다봤다.

       

       투명한 적안 위로는, 흑발을 지닌 어느 소년의 인영만이 온전히 담겨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잔잔한 시선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혀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도 그러길 바랄게요.”

       

       

       이제는 그 삶이 안온한 빛으로 숨쉬기를.

       

       소녀가 뱉은 마지막 한마디는 선선한 바람을 따라 부서지고 흩어졌다.

       

       휘날리는 자음과 모음의 파편들 속에서, 나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렸다.

       

       

       터벅, 그리고 터벅.

       

       마차에 오르는 걸음은 차분했다.

       

       다만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거운 다리가 마치 가볍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그럼, 안녕히.”

       

       

       한 철의 겨울을 지나는 봄꽃.

       

       눈의 계절은 한 떨이 홀씨가 되어 파일러 공작저를 떠나갔다.

       

       

       .

       .

       .

       

       

       -다르르…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허전하게 퍼지는 마차 내부.

       

       나는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풍경을 감상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에 잠길만한 일이 조금 있었기에.

       

       

       나는 늘어진 소매를 톡톡 건드렸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소음은 심신에 안정을 찾아준다.

       

       한참 동안이나 그 짓거리를 반복하던 나는, 곧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상태창.”

       

       

       쏘아지는 한 줄기의 부름.

       

       뒤를 이어 익숙한 기계음이 또렷하게 울리더니, 눈앞으로 푸른색 화면이 떠오른다.

       

       

       -띠링!

       

       [시스템이 복구되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노려봤다.

       

       

       “……”

       

       

       그래, 상태창.

       

       그동안 이 녀석에 대해서 있고 지내기는 했다.

       

       시스템이 휴면으로 들어갔던 지난 몇 개월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휘몰아쳤으니까.

       

       그래서 관련된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는 매일을 보냈는데… 마침 분주했던 일상이 잠잠해지는 참에 돌아왔다.

       

       

       -우리가 말했잖아. 너의 기억을 조작한 존재가 있다고.

       

       -그게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녀석에게는 물어볼 것이 많았다.

       

       전생에 대한 것들부터, 빙의라고 믿었던 이번 생, 마지막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 나를 속인 것이냐고 간절히 묻고 싶었다.

       

       지난 반 년 동안 나를 지탱해주었던 모습들이, 나에게 건네줬던 격려와 위로의 말들이 전부 기만에 불과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띠링!

       

       [입력된 질문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반응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마치 의식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질문을 던져봐도 돌아오는 것은 딱딱한 문장 뿐이었다.

       

       

       내가 알던 녀석이 아니었다.

       

       이전의 상태창이 자아를 지닌 하나의 ‘존재’ 같은 느낌을 풍겼다면.

       

       지금의 상태창은 어떠한 생기도 남아있지 않은 ‘기계’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혹시 연기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에 하루 종일 시스템을 괴롭혀보기도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녀석은 텅 빈 껍데기처럼 공허했다.

       

       

       ‘……비겁하네.’

       

       

       이렇게 사라지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적어도 해명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며, 괜히 푸른색 화면만을 만지작거렸다.

       

       

       대체 뭐였을까.

       

       나에게 녀석은 나름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같은 관계였는데.

       

       녀석에게 나는 이리도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관계였던 것일까.

       

       우스운 장난감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꽤나… 너를 의지하고 있었구나.”

       

       

       약간의 배신감과 함께 입술을 씹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나는 심호흡으로 안정을 찾으며,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잠연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나는, 이내 피로에 찌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됐다… 일단 어떻게라도 시스템이 복구된 게 어디야.”

       

       

       화면 너머로 유대를 쌓았던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점은 섭섭했지만.

       

       그나마 시스템이 돌아왔으니 다행이었다.

       

       앞으로 아카데미를 덮쳐오는 사건 사고들을 해결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터였으니까.

       

       지금이야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개학 이후로는 다시 원작을 따라서 이런저런 위험들이 닥쳐올 예정이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애써 머리를 비우며 눈꺼풀을 덮는다.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라도 조금 붙이려는 작정으로,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나고.

       

       영원히 달릴 것만 같았던 마차도 결국에는 목적지에 닿았다.

       

       

       “도착했습니다, 공자님.”

       

       

       부드럽게 열리는 마차의 문.

       

       천천히 벌어지는 풍경을 너머로, 익숙한 건물이 시야에 비친다.

       

       거대한 압력을 뿜어내는 듯 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저택의 자태.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

       

       

       거진 한 달만에 밟는 안식처는 퍽 애틋했다.

       

       잠시 제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눈에 담고 있으면, 곧 어느 부름이 귓가에 닿았다.

       

       

       “오빠!!”

       

       

       직후 따스한 온기가 나의 등을 끌어안는다.

       

       뒤를 돌아보면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적발의 소녀가 있었다.

       

       오랜만의 어리광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따스하게 물드는 마음으로 소녀의 이름을 읊었다.

       

       

       “아리엘.”

       

       “보고 싶었어, 오빠…!!”

       

       

       방긋 웃으며 매달려오는 아리엘.

       

       나는 붉은 머리칼을 차분히 쓰다듬으며 환영에 응해주었다.

       

       가만히 두면 계속해서 통통 튀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헤헤…”

       

       “그렇게 좋아?”

       

       “응!”

       

       

       마치 작은 강아지가 품에 안겨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마중을 나와준 것은 아리엘만이 아니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점점 들려왔다.

       

       

       “돌아오셨네요, 도련님.”

       

       “라이덴, 기다리고 있었어…!”

       

       “꼬마 도련님.”

       

       “별일은 없었느냐, 라이덴.”

       

       

       레이첼.

       

       루시.

       

       길버트.

       

       아버지.

       

       하나같이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하며,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괜찮은 거야, 라이덴? 혹시 파일러 공녀가 또 몹쓸 짓을 한 건 아니지…?”

       

       “저는 괜찮습니다, 저하.”

       

       “식사는 제대로 했느냐. 떠나기 전보다 야위어진 것 같구나.”

       

       “오히려 살이 붙은 느낌입니다만…”

       

       “확실히 공작님의 말씀대로 볼이 푹 패이긴 하신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딜 봐서요… 영감님.”

       

       

       정신없이 쏟아지는 걱정과 관심.

       

       그들의 목소리에 차례로 답해주고 있으면, 누군가의 손가락이 뺨을 콕하고 찔러왔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서있다.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도련님.”

       

       “레이첼.”

       

       “일전에 말씀하셨던 일은 잘 해결되었나요?”

       

       “글쎄…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충은 해결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싱긋 눈웃음을 짓는 소녀.

       

       유려하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매혹적인 선을 남긴다.

       

       

       “매일 걱정하고 있었는데… 혹시 밤에 무서워서 못 주무시는 건 아닌지.”

       

       “날 얼마나 어린애로 보는 거야?”

       

       “글쎄요~ 대략 8살 정도?”

       

       “우리의 시간은 처음 만난 순간에 멈춰 있구나.”

       

       

       가볍게 주고받는 시답지 않은 농담.

       

       이제서야 조금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묘하게 간질간질한 감상들을 접어두고는, 눈앞의 당신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집에 돌아왔다고.

       

       

       

       ***

       

       

       한편.

       

       소년의 무의식 저편에 남아있는 미지의 공간에서는, 진중한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평화롭게 이어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형체들.

       

       어김없이 김나루와 라이덴의 외형을 하고 있는 ‘존재의 파편’들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루가 입을 열었다.

       

       툭 떨어지는 질문.

       

       곁으로 자리하고 있던 라이덴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말이야?”

       

       “상태창…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것 말이야. 지금 완전히 오해하는 중인 것 같은데.”

       

       “난 또 뭐라고.”

       

       “고작 그런 반응으로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시원찮은 대답에 나루는 미간을 굽혔다.

       

       라이덴의 태평한 태도가 거슬리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은 상태창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그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해야 곧 바로 잡히겠지만.

       

       그래도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입장이라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한 것을……

       

       

       “불편을 개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잖아.”

       

       “하, 하하…”

       

       

       쏘아보는 눈빛에 찔리는 것인지, 라이덴은 괜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불가라고.”

       

       “그래, 뭐… 금제가 있으니까.”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짚는 나루.

       

       라이덴은 그런 소년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담백하게 말했다.

       

       

       “걱정은 넣어둬~ 어차피 오해는 잠깐일 뿐이야.”

       

       “흐음…”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그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전부터 우리의 편이었는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를 기다렸던 사람이니까.

       

       라이덴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입가에 호선을 그려냈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렇게 이번 챕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챕터부터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시작할 것 같네요.

    아마 내일은 외전이 몇 개 올라갈 것 같습니다.
    딱 진행 상황으로 지금 올려야 맞는 것들이라서, 그렇게 되었네요.

    내일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

    항상 읽으러 와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조금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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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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