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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드레스를 입었다는 부끄러움은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이 나에게 경계심을 품지 않는 것을 보고, 차라리 이런 복장을 하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겁먹어서야 우리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테니까.

        

       문제는…… 막상 이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이들을 앞에 모아두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대놓고 ‘너희들과 같은 고아원 출신이야. 나 알아보겠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 애들이 너무 많았다. 다니엘은 내 정체를 눈치채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나머지 아홉 명의 아이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으니까.

        

       “…….”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이 애들을 정말 하나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10년을 사귄 친구에게서도 모르는 면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고작 몇 달 보고 살았던 아이들이라면 10년이 지난 뒤 얼굴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기억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될 것이다.

        

       ……별로 자랑스럽지는 않았지만.

        

       “언니, 봐.”

        

       멍하니 서있는 내 옆으로 어느새 클레어가 다가오더니, 내 팔에 자기 팔을 넣어 팔짱을 끼고 나를 끌었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서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실비아 언니.”

        

       클레어가 덧붙이듯 말했다.

        

       그 말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아마 실제로는 나 들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 들으라고 한 이야기일 것이다. 클레어도 아이들한테 실상을 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넌지시 힌트 정도는 주고 싶었겠지.

        

       그리고 힌트는, 말 그대로 힌트일 뿐이다. 만약 이 아이들이 언젠가 확신에 차서 다시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힘껏 부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클레어의 말을 들은 아이들 몇 명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깜빡, 깜빡,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눈에 이해의 불빛이 들어오고, 이내 그 얼굴이 서서히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이해의 불빛은 파도처럼 옆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휘감았다. 자기 옆에 있는 애를 봤다가, 다시 나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가, 뭔가 깨달았다. 그리고 똑같이 놀란 듯 멍하니 입을 벌린다.

        

       그걸 몇 번 반복하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모두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1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나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애들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분은,”

        

       클레어는 여전히 나의 팔에 팔짱을 단단히 낀 채 말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금세 어디로 도망가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 같이 있었을 때, 내가 루카스한테 납치되어서 그대로 황실의 일원이 되었을 때.

        

       클레어는 아직 그때의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분은, 팬그리폰 황가의 황녀이신 실비아 팬그리폰 황녀님이셔.”

        

       아이들 몇 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히다가, 주변 애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갈팡질팡 하는 애들도 있었다.

        

       다들 아직 어렸다.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렇다는 건, 나도 아직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리게 보인다는 것일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친해져서 초대했는데, 우리가 너희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너희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모시고 왔어.”

        

       레오에게 보여주었던 장난기 넘치는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클레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나긋나긋하게 설명해나갔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나는 내가 사라진 뒤의 클레어를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클레어와 헤어진 뒤에도 몇 번이고 상상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그레이스 가에 있으니 삐뚤어지게 자랄 일은 없었겠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아카데미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그리고 만난 뒤에는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성실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만, 성격은 쾌활하고, 친구도 잘 만들고, 붙임성 좋고…… 그런 결과적인 클레어가 내 옆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클레어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작에서 그런 일을 겪고 삐뚤어진 채 황실에서 앨리스와 티격태격 싸우며 자라던 클레어처럼, 실제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구심점이었던 내가 사라진 직후의 클레어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아이들을 달래주었을까.

        

       “어때, 예쁘지?”

        

       예뻐졌지?

        

       클레어의 말이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이제는 양손으로 내 팔을 끌어안듯 한 채로 웃고 있는 클레어는, 마치 자랑하듯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기가 다 뿌듯하다는 듯.

        

       “황녀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데, 너희들은 어때?”

        

       “…….”

        

       아이들의 눈이 클레어에게 머물다가, 다 같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우리 이야기, 들려드릴까?”

        

       보통의 상황이라면, 어이없는 소리일 것이다.

        

       자선사업을 하는 귀족은 많다. 그게 진짜 동정심이건, 아니면 종교적인 이유나 자기가 마음이 넓은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이건, 빈민가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데 돈을 대주고, 고아원을 운영하고, 거기 방문하기까지 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들려줘서 발길을 막아버리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귀족과 평민이 사는 곳은 다르니, 당연히 귀족 대부분은 평민의 이야기를 굳이 들을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 평민들을 돕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내가 그걸 바랄 거라는 듯.

        

       그리고—

        

       그래, 솔직히 나는 그걸 바랐다.

        

       *

        

       엠마는 청소에 소질이 있었다. 그저 걸레질을 잘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물건의 크기를 보고 그 물건이 어느 공간에 딱 들어갈지, 어느 상자를 어떻게 쌓아야 창고에 하나라도 더 많이 집어넣을 수 있는지 눈대중하는데 소질이 탁월했다. 그래서 지금은 하녀 교육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본관에서 몇 년 정도 더 일하다가,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될 것이다.

        

       올리버는 검술에 탁월했다. 클레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기 주인이 싸울 때 옆에서 도움이 될 정도로 성장할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서 요즘에는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나이가 차게 되면 올리버는 이 영지의 입구를 지키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클로이는 식물을 돌보는 데 소질이 있었고—

        

       한 명 한 명, 마치 발표라도 하듯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두가 달랐다. 비슷한 곳에서 일하게 될 아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 재능이 완전히 똑같다고 할만한 애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내가 커튼을 묶어 내려주었던 그 아이들이었다.

        

       “…….”

        

       아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때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클레어와 둘이서 나가려고 했었다. 나에게 아이들 이야기를 했던 것은 클레어였다.

        

       애들이…… 애들이 아직 안에 있잖아.

        

       클레어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위로 올라갔고, 아이들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만약 클레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니까 마치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다는 듯 웃는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마치 내가 자신을 살려둔 것이 절대 아깝지 않도록 열심히 살겠다는 듯.

        

       그리고 내 옆에 있는 클레어는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을 띤 채 그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었다.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어디로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 감각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을 때와 비슷했다.

        

       나는…… 나는 이 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닐 텐데.

        

       “……실비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톡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앨리스였다.

        

       클레어와는 반대쪽에서 나에게 말을 건 앨리스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

        

       괜찮아? 그런 질문이 들리지는 않았다. 앨리스도 내 앞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앨리스도, 내가 그 아이들을 다 살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감사를 받을 수 있을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던가.

        

       “조금, 쉴까?”

        

       클레어의 질문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움직여서 로비에 있던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러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저 한동안 가만히 앉은 채 숨만 고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름이뭐에요 님, 후원 감사합니다!

    if스토리에 대해서도 고민은 해보았는데, 일단은 본편 끝날때까지는 따로 쓰지는 않을 듯 합니다. 쓰다가 둘을 헷갈려버리면 여러모로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아서요… 다만 시간을 돌리는 능력의 특성상,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특정한 부분에 대한 if물을 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말씀하신 그레이스 가에 제대로 도착한 실비아라던가요. 물론 if스토리도 태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이야기를 진행시키겠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해보고 싶은 이야기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천천히 생각해서 하나하나 꺼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의 소설을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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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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