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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어둡고 어두운 비밀스러운 장소.

         

       누구도 함부로 들여다보아서는 안 되는 장소에서, 한 소녀가 오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댔다. 흐릿한 그림자가 분홍 머리카락을 덮었다.

         

       “결국 내가 손봐줘야 할 상대는 없는 건가. 하늘섬의 수준에 실망했어.”

         

       소녀 앞에서 삐딱하게 선 레너드가 힐끔 바라봤다. 두툼한 보고서를 대충 넘기더니 훑어 읽었다.

         

       “행정 인력이 한차례 걸러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아니냐. 문제가 있다면 직원부터 다시 뽑아야지.”

       “감찰부장, 어리석은 발상이야.”

         

       소녀는 턱을 괴고 고개를 저었다. 먼 곳을 보듯 분홍 눈동자가 짙어졌다.

         

       “직원이 잘했든 못했든 그들의 수준을 평가하는 건 무의미해. 내 수준에선 아무리 잘해도 무능하다 느껴지니까. 너무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면 수족 중 누구도 내 진심 구조조정을 버틸 수 없겠지.”

         

       레너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기사단 구조조정해 놓곤 해고한 고급 인력들 네 상단으로 빼돌렸던데 그렇게 티 나게 욕심부려도 되는 거냐? 이미 해버린 일이긴 해도 전쟁기 유산을 쪼개서 삼킨 꼴이잖아.”

       “아, 기사단. 이런 것조차 설명해 줘야 하는 건가.”

         

       소녀는 작게 한숨 쉬었다.

         

       “비대화된 정부 조직은 큰 계기가 없이는 손보기 어렵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계기가 왔다고 큰일을 벌이는 건 또 맞지 않아. 정부는 민간이 아니니 사소한 소음조차 사회 전체에 불필요한 영향을 줄 테니까.”

         

       손짓이 오만하게 스스로를 가리켰다.

         

       “내가 취한 조치는 기사단에게 위아래를 가르쳐주기 위해 경고의 의미로 구조조정이라 과격히 이름 붙였지만 정확히는 소속 변경에 가까워.”

         

       턱을 괸 자세가 나른하게 조정됐다.

         

       “기사단 인원을 기사단에서 크래프트 상단, 다르게 말하면 정부 조직에서 공기업으로 일부 이동시킨 거지. 사회 파장을 보고 후행 조정할 계획이었으니. 불필요하다고 잘못 판단한 인원은 다시 기사단으로 돌리는 식으로.”

       “오, 그렇네. 아예 권력 사유화가 이루어지면 그런 식으로 운영할 수 있구나.”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감찰부장, 내가 이런 기초 전략까지 설명해 줘야 하는 건가? 단순한 추론은 직접 하도록 해.”

         

       레너드의 눈썹이 올라갔다.

         

       “야, 이게 어떻게 단순하다는 거냐.”

         

       보고서가 대충 덮였다.

         

       “그리고, 너 오늘 말투가 왜 그 모양이야? 뭐 잘못 먹었어?”

       “후우.”

         

       분홍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봤다.

         

       “역시 이곳은 내 수준에 안 맞아. 사소한 전략조차 감당하지 못하니.”

       “수준 이러고 있네.”

         

       문득 문이 벌컥 열렸다. 어둡고 어두운 비밀스러운 장소에 복도의 강렬한 빛이 침범했다. 문을 연 마족 소녀가 후광 속에서 의아해했다.

         

       “어둡게 뭐 하는 거야?”

         

       발소리가 창가로 향했다. 손짓이 학생회실 커튼을 열어젖혔다. 어둡던 실내가 단번에 환해졌다.

         

       밝은 햇살이 파스텔을 덮쳤다.

         

       “으아아! 눈부셔! 내 눈……!”

         

       시력이 0.1도 낮아진 기부운!

         

       파스텔은 양팔로 허겁지겁 햇살을 가렸다.

         

       “광합성이 과해애!”

         

       벚꽃에게 좋지 않은 환경!

         

       엘리가 덤으로 창문까지 열어 환기했다.

         

       “먼저 왔으면 환기부터 해.”

         

       마족 소녀는 괴로워하는 파스텔을 보다가 레너드를 바라봤다. 덩달아 쳐다보던 레너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감찰 대상과 감찰담당자는 서로 미묘한 감정 상태가 됐다.

         

       엘리의 눈길이 돌아갔다.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힐끔 봤다.

         

       “뭐 하고 있었어?”

         

       파스텔은 눈을 비볐다. 아직 햇살을 적응 못 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위대한 파스텔 각하의 비밀스러운 흑막 행각을 구현 중이었엉.”

         

       멜리사조차 의심하길래 상상 속 사악한 파스텔은 이런 느낌인가 해봄.

         

       “그게 뭐야?”

         

       엘리가 황당해했다. 눈길이 레너드를 향했다.

         

       레너드가 대답 없이 삐딱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 파스텔을 보더니 문으로 몸을 돌렸다.

         

       “난 간다.”

       “잘 가아!”

         

       파스텔은 눈을 비비다가 인사해줬다.

         

       레너드가 떠나자 엘리가 다시 감찰 보고서를 힐끔 봤다. 굉장히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또 엘리를 감찰하기라도 했을까 궁금한 걸까.

         

       뿌뿌.

         

       착한 파스텔은 친구에게 그런 짓 안 한다구.

         

       “이번에 호레이스 총장님이 부도난 상단들을 크래프트 상단에 넘겨주기로 했잖아. 그 상단 중에 수상한 곳은 없나 확인해 봤어. 교단의 끈이라도 닿은 곳이라면 내 라인에 교단이 잠입한 꼴이니까. 모른 채 있다가 중요한 고리를 잠식당하면 매우매우 곤란해.”

       “아, 그거.”

         

       파스텔의 염려대로 몰래 잠입해 행정 영역에서 대체 불가능 상태가 된 엘리가 찔린 표정으로 변했다.

         

       파스텔은 헤헤 웃었다.

         

       “물론 엘리는 느낌이 다르지! 우린 친구잖아!”

         

       응응!

         

       이 말에 뭔가 생각이 들었는지 엘리가 머뭇거렸다.

         

       “이건 어떤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 질문인데, 친구가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으에?”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의도 없는 질문 맞지?”

         

       갑자기 걱정스럽.

         

       엘리가 긴장했다.

         

       “네가 말했잖아. 언행만으로 신뢰할 수 없다면 이해타산 위에서 신뢰를 쌓자고. 그렇다면 배신의 리스크도 알아야 하잖아. 내 의도와 별개로 정세가 네 이득과 상충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확한 리스크를 공유해야 서로 판단에 오해가 없지.”

       “듣고 보니 그렇네!”

         

       우와앙.

         

       굉장히 똑똑하고 타당한 발언!

         

       이게 서운함보다 고찰이 앞서는 친구와의 대화일까?

         

       파스텔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심했다.

         

       “나는 엘리를 엄청엄청 좋아해! 만약 엘리가 나를 배신한다면 보복보다는 회유를 열심히 할 거 같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이유도 궁금하고!”

         

       응응!

         

       “당연히 대화부터 시도할 거 같아! 좋게 좋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원래 친구 사이엔 싸웠다가 화해하기도 하는 거라구!”

         

       엘리가 다소 편안해진 표정으로 변했다.

         

       “하기야. 아무리 되짚어도 친구 좋아하는 건 연기가 아닌 거 같긴 하더라. 이해 상충에도 대화부터, 인가.”

         

       엘리가 중얼거리며 찬장으로 향했다.

         

       “응응! 물론 파스텔 각하는 다르겠지만!”

         

       녹차라도 마시려는지 찻잔을 꺼내던 엘리가 멈칫했다. 홱 돌아보더니 물음표 가득한 표정이 됐다.

         

       “그게 왜 달라?”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공적 대처와 사적 대처는 당연히 달라야지?”

       “그게, 그게 그렇긴 하지만.”

         

       엘리가 혼란스러워했다.

         

       오잉.

         

       뭐가 문제인 걸까?

         

       엘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 파스텔 각하는 대화부터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는데?”

         

       파스텔은 잠시 고민했다. 생각을 마치곤 해맑게 말했다.

         

       “그건 공무라 이해당사자에겐 말해줄 수 없어! 원칙을 밝히면 악용도 쉬우니까!”

         

       엘리는 다시 물음표 가득한 표정이 됐다.

         

       “아니, 아까는.”

         

       허억.

         

       뭔가 알 거 같아!

         

       이 반응은 인기인 파스텔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친구들의 반응이야!

         

       인기인은 가끔 일정이 너무 잡혀서 친구가 놀자는 얘기를 꺼내도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나와!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가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서운해하는 경우가 다분하단 말이지!

         

       으아아, 인기가 많아서 미안해애!

         

       엘리도 마찬가지인 거야!

         

       파스텔 각하는 우선순위가 너무 많아서 사적 친분이라는 고려 요소를 후순위로 두어야 하는 경우가 자주 나온단 말이지!

         

       그런데 그건 그 친구를 싫어해서가 아니야! 나는 친구를 매우매우 좋아한다구!

         

       하지만 파스텔을 너어무 좋아하는 친구 입장에선 서운한 건 별수 없는 거겠지.

         

       “엘리 걱정 마! 아무리 그래도 되돌릴 수 없는 조치까진 안 할 거니까!”

         

       우리는 친구잖아!

         

       “되돌릴 수 없는, 조치.”

         

       엘리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되돌릴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학생회실 문이 슬쩍 열렸다.

         

       부스스한 머리 상태의 더스틴이 내부를 살펴보다가 쏠린 시선에 민망해했다.

         

       “나 지각한 거야?”

       “안녕 더스틴!”

         

       파스텔은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오늘도 날 보러 왔구나!”

         

       더스틴이 당혹스러워했다.

         

       “어? 그런, 그런가? 일하러 온 건데……?”

         

       그러다 목을 문지르더니 다소 쑥스러워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와아!

         

       그냥 해본 소리인데 맞대!

         

       엘리가 멍한 상태 그대로 더스틴을 쳐다봤다.

         

       “머리 안 감았어?”

         

       살짝 영혼 빠진 질문이었다.

         

       “어? 자기 전에 감았어.”

       “더러워.”

         

       툭 말한 엘리가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더스틴이 벙쪘다.

         

       파스텔은 머리 상태를 보다가 해맑게 외쳤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응응!

         

       “어?”

         

       더스틴이 곤혹스러워했다.

         

       “왜, 왜 아침부터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거야?”

         

       딱히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더스틴은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기숙사로 돌아가 머리를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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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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