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0

     

    ―파지직.

     

    아셀라가 손끝의 마나를 튀기며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았다.

     

    금방 질려서는 휙, 허공에 증발시킨다.

     

    “지루해.”

     

    슬슬 그녀의 수준에 맞는 교재나 논문도 찾기 힘들어졌다.

     

    온갖 학문도 몇 년 만에 통달한 그녀가 더 배움을 얻으려면 용사 아카데미의 박사 과정이라도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월광궁의 운영이 있으니 그렇게 장기간 황실을 비울 수도 없고, 지금은 승계가 걸린 중요한 시기다.

     

    ‘마법 쓰고 싶어.’

     

    돌고 돌아 그 생각에 다다른다.

     

    투정을 부려보지만 라스가 몇 번이고 강조했었기에 아셀라는 오늘도 진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참아냈다.

     

    ‘라스.’

     

    대신 그만큼 그의 생각을 하면서 보냈다.

     

    어젯밤 수면제를 먹고 잔 그를 가지고 노는 건 특히 즐거웠다.

     

    ‘같이 외출은… 아직도 멀었구나.’

     

    아셀라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전하고, 그의 대답도 들으리라 결심했었다.

     

    이 황궁 안에서는 주치의와 담당환자이자, 주군과 신하로서 있어야 하는 두 사람이다.

     

    황실 밖에서 아무 호위도 시종도 없는 상황에서라면.

    그의 진심을, 숨겨둔 비밀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결정사항이었다. 사정상 조금 시기가 미뤄졌다고 해도 예정을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셀라에게도 연애는 미지의 학문이자 첫 경험이기에 유도리가 없어져 버린다.

     

    ‘나도 몸이 나은 다음이 좋고.’

     

    아셀라가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홀쭉 들어가 갈비뼈가 슬쩍 만졌다.

     

    카밀라의 마지막 발악이 닿았을 때는 많이, 정말 많이 아팠다.

     

    지금까지도 그 잔통이 환상처럼 남아 쿡쿡 쑤시는 듯했다.

     

    ‘그래도 라스가 있으니까.’

     

    지금은 괜찮았다.

     

    …잘 때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빼면.

     

    그동안 라스와 함께 잘 땐 안 들렸지만, 이제는 조금씩 소용없어지고 있었다.

     

    그때 시녀장이 소식을 전했다.

     

    “황녀님, 긴급 보고입니다. 천황궁에서 급한 움직임이 있었다 합니다.”

     

    황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눈은 곳곳에 심어놨다. 그에 관한 보고였다.

     

    “말해봐.”

     

    “권터 황태자가 폐위되었습니다. 유배될 예정이라 합니다.”

     

    “신뢰도는?”

     

    “확실하다 합니다. 공식 발표 날짜를 조정 단계에 있다고.”

     

    “좋은 기회겠어. 폐하를 알현할 준비해.”

     

    아셀라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래 선약이 없으면 맞을 수 없는 황제다.

     

    하지만 황태자의 폐위라는 커다란 사건이 있으니 직접 의지를 표명하면 큰 인상을 줄 것이었다.

     

    황제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안다. 얼마 전에는 겨우 사경을 넘겼다.

     

    차기 후계자는 가능한 빨리 정하고 싶을 터였다.

     

    ‘그간 월광궁에서 보인 활약도 있어.’

     

    그도 아셀라의 의지는 알 것이고, 잠깐의 면담 정도는 허락해 주리라.

     

     

    천황궁에 도착한 아셀라는 깐깐한 검문을 받았다.

     

    두 명의 호위기사만을 대동하여 알현실 복도로 들어섰다.

     

    “폐하께서 선객과 사담 중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기다린다.

     

    도중, 어렴풋이나마 안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라스도 황제의 부름을 받은 참이었다.

     

    타이밍이 겹친 것일까.

     

    아셀라는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본능에 이끌려 또각또각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황녀 전하!”

     

    집사장이 작은 소리로 그녀를 말리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중요한 시기에 폐하께서 왜 내가 아니라 라스를 불렀을까.’

     

    아셀라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알현실로 들어서는 입구, 모서리의 틈새에서 잠시 몸을 멈춰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차기 황제로 가장 적합한 자는 누구인가?

     

    황제의 대담한 질문.

     

    아셀라는 내심 기대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이어 후계자의 자리를 요청할 발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어엿한 승계권자이자 제국의 황녀로서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라스는 자신의 신하다.

     

    …혼약자이기도 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면 함께 가장 높은 경치에서 제국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대륙의 그 어떤 인간의 몸을 가진 자도, 제국의 황제만큼 부와 명예, 존경, 영광, 그 모든 걸 가지진 못했다.

     

    여황제의 남편, 국서.

     

    그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라스가 자신의 이름을 대답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치의 라스 고트베르크의 대답대로 제국의 차기 황제에 어울리는 후계자는 바로 저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뿐이옵니다, 폐하.’

     

    당당한 선언과 멋들어진 등장을 머릿속에 그리고는 아셀라가 발을 뗐다.

     

    “제국의 안녕과 평화, 더 나아가 대륙의 미래를 위해 소인의 소신을 감히 올리건대.”

     

    라스의 입이 떨어진 것도 동시였다.

     

    “헤이케 1황녀가 차기 황제로 가장 어울리는 인재라 아룁니다.”

     

    뚝.

     

    아셀라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조금도 가정해본 적 없는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손끝부터 새파란 오한이 온몸을 적신다.

     

    “음, 헤이케인가.”

     

    “그렇습니다. 헤이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판단하는 냉철함, 우수한 지휘력, 경제관념, 리더십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 제국을 사랑합니다.”

     

    “아셀라라고 대답하지는 않는가, 고트베르크.”

     

    “아셀라 3황녀는…”

     

    라스가 고개를 숙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물론 헤이케에 지지 않을 만큼 능력만큼은 우수합니다만.”

     

    “무엇이 걸리는가.”

     

    “주군을 욕보일 수 없기에 대답할 수 없는 소인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알겠다.”

     

    더 참지 못하고 아셀라가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라스…?”

     

    그가 아셀라를 발견하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거기서 내 이름이 안 나와?”

     

    “황녀님.”

     

    황제의 앞이다. 목소리를 키워서는 오히려 누가 된다. 겨우 최근 들어 월광궁과 자신의 변화한 모습으로 이미지를 개선하던 참이다. 여기서 깎아 먹을 수는 없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어도, 차오르는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다.

     

    피가 나올 정도로 꽉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아셀라는 홱 몸을 틀어 그 자리를 피했다.

     

    라스는 우선해야 할 예의가 있었기에 황제에게 표할 절도를 유지했다.

     

    “그대의 뜻은 잘 알았다. 이만 가보거라.”

     

    “배려에 황공하옵니다.”

     

    라스는 바로 아셀라를 쫓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녀님.”

     

    천황궁의 복도에서 라스가 아셀라를 따라잡았다.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던 아셀라가 홱, 몸을 틀어 라스와 마주 섰다.

     

    “무슨 생각이야?”

     

    “그게…”

     

    “너는 내 신하잖아. 누가 차기 황제로 어울리냐니, 그런 질문엔 당연히 주군인 내 이름을 대답해야지.”

     

    이번만큼은 라스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기 힘들었다. 사실상 배반이나 다름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No. 077 : 질투의 화신 22%]

     

     

    하지만 라스가 배신했을 때 일어나는 배드엔딩 확률 자체엔 변동이 없었다.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한 라스였다.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황녀님의 신하인 제가 황녀님의 이름을 대답하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순리이지요. 폐하는 그런 뻔한 대답을 원해서 굳이 저를 궁까지 불러 질문을 하신 건 아니실 게 분명합니다. 이해하시죠?”

     

    “그래서 아무 승계권자의 이름이나 뱉었다는 의미니?”

     

    “물론 황녀님은 차기 황제에 더없이 어울리는 재목이십니다. 저도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럼 왜 헤이케의 이름이 나오는데!”

     

    참다못한 아셀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제가 헤이케 황녀라 대답하면 폐하의 신뢰를 그만큼 더 살 수 있으므로, 차후에 월광궁에 더 도움이 될…”

     

    “아냐. 공자, 넌 솔직하게 대답했을 뿐이잖아.”

     

    아셀라는 그 순간의 라스의 반응만은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라스는 월광궁을 위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자신의 판단으로 아셀라가 황제가 되어선 안 된다고 여겼다.

     

    정확한 통찰이었기에 라스는 즉시 반박하지 못했다.

     

    아셀라는 황제로서 유능하다. 국가를 운영하는 능력만큼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 결말이 모두 멸망인 것이 문제다.

     

    아무 문제 없이 항해하던 배의 키를 스스로 틀어버려 해빙에 부딪혀 버린다.

     

    아무리 수술이 예정되어 있어도 그 결과로 아셀라가 고쳐질지, 망가질지, 후유증이 남을지, 이미 그녀가 얼마나 저주의 영향을 받았을지, 엔딩은 얼마나 지워질 것인지.

     

    미지수가 너무나 많다.

     

    아셀라가 자신이 아는 황제만큼 사악한 인격이 아닌 것 같다는 자신의 느낌이.

     

    어쩌면 조금 성격이 나쁜 평범한, 평범하진 않지만.

     

    인외의 영역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같은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정이 착각이라면 되돌릴 수도 없는 커다란 실수를 하는 것이기에.

     

    라스는 몇 중이고 안전장치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설령 아셀라가 악인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황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렴풋한 바람이 있었다.

     

    라스가 지켜본 황실은 이해관계가 얽혀 경쟁이 심화되고, 매일같이 암투가 벌어지며 인간성이 죽어버린 곳이었다.

     

    초기의 내의원만 봐도 알 수 있다.

     

    환자는 뒷전이고 승진과 실적을 위한 경쟁에 불이 붙어있다.

     

    지금도 라스의 파벌을 제외하면 그렇게 나아졌다고는 못 한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을 모두 관리하려면 더 이상 개인으로는 살 수 없다.

     

    황제는 그야말로 관의 무게를 버텨야 하는 자리다.

     

    아셀라가 그 수라장에 들어가 굳이 여생을 혹사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곤 했다.

     

    실제로 라우가는 저렇게나 인생을 즐기고 있고.

     

     

    그런 라스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아셀라는 원망스럽게 라스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었구나, 라스. 나보다 헤이케가 후계자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황녀님.”

     

    “나를 욕보일 수가 없어서 결점을 대답 못 하겠다고? 그 대답이 충분한 모욕이야. 폐하께서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어떻게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내게 이럴 수 있어?!”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잖아. 너는 나를 믿어야지! 너는!!”

     

    아셀라가 악을 쓰며 라스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헤이케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다.

    라스에 대한 실망이 아셀라의 심장을 찔러댄다.

     

    “나는, 너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왜 몰라주는 거야.

     

     

     

     

     

    ―미워.

     

    ―미우니까, 부숴버릴까.

     

    “윽…!”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셀라가 이를 악물었다.

     

    복통이 밀려온다. 장기를 안쪽부터 쥐어짜는 불쾌한 감각. 하염없이 새로 만들어지는 침은 소독약이 섞였는지 맛이 없다.

     

    “황녀님!”

     

    라스가 바로 아셀라의 상태를 깨닫고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라스…”

     

    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고, 아셀라는 혼절했다.

     

     

     

    ***

     

     

     

    “황녀님께선 푹 주무시고 계셔요.”

     

    밤, 아셀라의 발작 처치를 끝낸 나는 시녀장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월광궁을 나섰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에게는 진작 아셀라를 돌볼 때 주의할 점을 미리 전부 전해놨다.

     

    클로에도 남기고 가니 돌발 사태에도 대응할 수 있다.

     

    “황녀님께서 선생님을 찾으실 텐데…”

     

    “한시가 급합니다.”

     

     

    [No. 101 : 마력폭주 20% → 24%]

     

     

    낮의 사건 때문에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리미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중이다.

     

    “가시죠, 선생님.”

     

    월광궁 입구에는 무장을 끝낸 타냐와 브루노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문을 나선다.

     

    헤이케에게 빌린 1개 중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부로 출발한다. 목표는 야만족, 천둥족의 본거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승언_836님 후원 감사해요! 후원메시지가 고정이 된 게 참 아쉽네요. 전에는 뭔가 독자님들과 소통하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에요.
    건강 관련 문구로 보내주셨는데, 요즘 건강을 챙기기 참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독자님들도 조심하세요! : D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