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0

       펄럭이는 검은 커튼 사이로 어비스의 한기가 몰아닥쳤다.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이었다.

         

       거대한 마귀 한 마리가 그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등 뒤에 달린 하늘거리는 검은 천이 날개의 형상으로 퍼덕였다.

         

       사신, 누아-자카누바.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는 사람들은 차가운 송곳이 폐부를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마귀에 대해 문외한인 서커스 단원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앞서 나타났던 마귀들과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우, 우리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고 싶은데……바, 발이 얼어붙었어…….”

         

       사람들의 발등은 어느새 새하얗게 서리로 덮여 있었다.

       물론 이따위 얼음 알갱이이야 힘주면 부술 수 있었다.

         

       문제는 몸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맹수와 마주친 초식 동물처럼 그들은 전신이 굳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한기는 마귀가 그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올수록 강해졌다.

       두개골 투구의 틈새로 새어 나오는 핏빛 안광이 그들을 면면을 살폈다.

         

       그의 시선은 곧 그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는 두 남녀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는 유창한 인간의 말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요. 이 위까지 올라온 것은.”

         

       단원들이 놀라는 것에 비해 두 퇴마사는 침착했다.

       그들은 고위 마귀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절대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고위 마귀는 경험 많은 퇴마사들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가능한 한 살면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누아-자카누바는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강력한 마귀였다.

       이 정도 되는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추적대 6명 중 최소 4명은 모여야 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은 둘뿐이었고, 그나마 발렌티나는 신성력을 과용해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붙는다면 그들의 필패였다.

         

       “재미있는 조합이군요. 마신의 사도가 빛의 사제와 함께 일하는 겁니까?”

         

       그의 말투와 태도는 더없이 정중했다.

       목소리 역시 인간 여성의 것처럼 부드럽고 가늘었다.

       겉모습은 저 살육 토끼들과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단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을 가졌다.

         

       “나, 나쁜 마귀 같지 않은데…….”

       “어쩌면 살려주는 게 아닐까?”

       “그래.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자……. 우리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엘라는 그들의 순진한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친절하게 구는 악마’를 정말 처음 보는 거냐고 되묻고 싶었다.

         

       “여긴 뭐하러 나타난 거지?”

         

       바예르의 질문에 대한 사신의 대답은 엘라가 우려한 바 그대로였다.

         

       “먼저 간 우리 아이들이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인간의 피와 고기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조금 즐겨보려고요.”

         

       친절한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태연하게 입에 담는 마귀의 모습에 단원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엘라는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봐, 좀 봐주면 안 될까. 사도의 얼굴을 봐서……. 우리 넓게 보면 같은 편 아냐?”

         

       억지로 넉살을 짜내는 것 같은 바예르의 말에 마귀는 웃음을 흘렸다.

         

       “같은 편이라……. 그건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군요. 마신들과 저희는 거주하는 공간이 겹칠 뿐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신들은 동네에 집을 가진 주민들이고, 저희는 그 동네에 사는 들짐승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로 골목과 논밭을 돌아다니긴 하지만, 종종 집에도 들어가 살기도 하는……. 아시겠습니까?”

       “재밌군. 그럼 우리는 뭐지?”

       “마도사……. 당신들은 동네 주민이 기르는 가축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당신들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겁니다. 자기 가축을 해친 들짐승을 잡겠다고 주인이 몽둥이를 들고 설치면 저희도 고달프거든요.”

       “비유 한 번 정겹군. 어비스가 아주 목가적인 동네인 줄 알겠어.”

       “충분히 목가적입니다. 그 목가적이라는 말은 하루에 수만 마리의 소, 돼지들이 도축당하는 지옥에 당신들이 붙이는 수사이지 않습니까?”

         

       바예르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놈은 단순히 사람의 말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인간의 시선에서 비유를 하고 인간의 태도를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놈은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놈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우울한 소식이었다.

         

       실제로 누아-자카누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써 그가 계속 말을 거는 의도 역시 간파했음을 보여주었다.

         

       “시간 끌기는 충분히 되었습니까? 새벽 동이 트기까지 앞으로 2시간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깨에 짊어진 무기를 손에 쥐어들었다.

         

       칙칙한 검은 줄기가 여러 겹으로 휘감겨 만들어진 나무 자루 끝에 묵빛의 칼날이 초승달 형태로 박혀 있었다.

         

       사신의 낫.

       그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우울한 기분을 전파했다.

         

       “조심해. 사신의 낫에 찔리면 행복한 기억이 빨려들어간다.”

       “별미죠.”

         

       사신이 낫을 휘둘렀다.

       그의 무기가 허공에 그린 궤적을 중심으로 3연속 초승달 파동이 퍼져 나왔다.

         

       파동은 실체를 갖췄다.

       종이처럼 얇은 검은색의 참격.

       그것들이 허공을 가르며 그들에게 날아왔다.

         

       첫 번째 참격은 바예르가 권능을 써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참격은 발렌티나가 성정을 쏘아보내 소멸시켰다.

         

       세 번째 참격은 우몬의 뿔 하나를 잘라내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갔다.

         

       마을의 목책 위로 날아간 참격은 아까 자카누바 한 마리가 뛰어내렸던 3층 건물을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참격에 베인 건물의 층 하나가 통째로 사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쿠궁.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굉음은 그 뒤로도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건물을 베고 지나간 참격이 그 뒤의 건물들도 모두 베어낸 모양이었다.

         

       “우아아악!”

         

       뿔이 잘려 나간 우몬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것은 용기나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으로 인한 발작에 가까웠다.

         

       우몬의 손에는 피 묻은 대형 식칼이 들려 있었다.

       자카누바의 머리를 깨버렸던 그 물건이었다.

         

       “어이, 꼬맹이!”

         

       바예르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사신의 낫에 맞은 사람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행복한 기억을 흡수당했다.

         

       그는 방금 직접 칼날에 찔린 게 아니라 기억을 흡수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참격에 맞은 터라 분명 뭔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사신은 자신의 허리춤에 오는 우몬의 돌진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력으로 휘두른 그의 식칼을 맨손으로 받아냈다.

         

       그것도 손가락 2개로.

         

       “힘자랑입니까?”

       “이으으윽!”

         

       우몬은 악을 써가며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식칼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워들 모두가 경악했다.

       저 흉폭한 자카누바와의 힘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했던 우몬이었다.

       그런 그의 힘을 저렇게 가볍게 농락하다니?

         

       사신과 마주한 우몬의 새빨간 얼굴은 점점 시퍼렇게 죽어갔다.

         

       사신이 내뿜는 한기에, 그의 낫이 내뿜는 부정적인 기운에,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주는 공포에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만약 바예르와 발렌티나가 적절한 순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우몬은 그대로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헛되이 목숨을 낭비하지 마!”

       “당신들은 도망가지 말입니다!”

         

       땅거죽이 뒤집히고 빛의 창이 어둠을 밝혔다.

         

       두 사람이 시간을 끄는 사이 단원들은 기절한 우몬을 유라크네의 올가미로 잡아당겼다.

         

       “끝이다……. 이제 진짜 끝이야…….”

       “어쩌지, 부단장?”

       “일단은……물러나자. 우리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야.”

         

       그러나 사신은 그들이 도망가게 두지 않았다. 그는 등 뒤로 펄럭이는 검은 천을 움직여 퇴마사 둘을 쳐낸 후, 다시 낫을 크게 휘둘렀다.

         

       그가 처음 쓴 기술과 같았다.

       그러나 낫의 궤적이 만들어낸 검은색 참격의 크기가 달랐다.

         

       수십 미터 길이의 거대한 참격이 형성됐다.

         

       사신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투로 안심시켰다.

         

       “끼르르! 범위를 늘린다고 강도가 약해졌습니다. 악몽을 조금 꾸다 일어날 겁니다.”

         

       검은 칼날이 마을 앞 들판을 휩쓸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범위의 공격이었다.

         

       칼날에 적중당한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최악의 기억들을 마주했다.

         

       유라크네는 그녀의 남편이 죽던 날을, 다른 단원들은 각자의 기형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날을, 바예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던 날을, 발렌티나는 수도원의 다른 동자승들과 마을의 개를 훔쳐다 구워먹었다가 수도사 할아버지들한테 매 맞았던 날을 떠올렸다.

         

       두 퇴마사를 제외한 모두가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사신은 숨을 헐떡이며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퇴마사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제법이군요. 그럼 땀 좀 흘려볼까요?”

         

       새벽까지만 버티자.

       둘은 전력을 다해 사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싸움은 10분만에 결판이 났다.

       얼마 없던 신성력을 모두 소진한 발렌티나는 사신의 낫에 적중당해 기절했고, 바예르는 사신의 손톱에 베여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마지막에 사용한 반전의 권능 때문에 ‘들 수 있는’ 낫이 ‘들 수 없는’ 낫으로 바뀌어버린 사신은 낫을 바닥에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누아-자카누바는 장내를 둘러보며 자신의 전리품을 감상했다.

       낫으로 찌르고 찔러 행복한 기억을 모두 빨아들인 뒤, 어둠에 정신이 물들어 폐인이 된 인간을 잡아먹는 게 그의 식도락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신 키아랄의 언령이 풀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권능은 무한하지 않았다.

       그는 낫을 들 수 있는 즉시 여기 있는 인간들을 이용해 식사를 즐길 것이다.

         

       들판을 둘러보던 그는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마차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감지했다.

         

       “오호, 당신은 아까 기절한 척 한 거였군요.”

         

       마차 뒤에 웅크리고 있던 엘라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순수한 체술만으로는 그녀가 여기 있는 인물들 중 제일이었다.

       그녀는 사신이 참격을 날리는 순간 그 궤적을 보고 몸을 비틀어 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리고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몰래 마차 뒤로 기어가 숨었다.

       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신의 예민한 감각은 그녀를 포착해낸 것 같았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한 걸음으로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처음에는 미약한 기운이라 알아채기 어려웠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사도인 듯 사도가 아닌 듯한 이 기운.”

         

       사신은 엘라가 숨은 마차 앞에 섰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유령의 가면을 꺼내 쓰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까 참격을 피하면서 흘린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가 대꾸를 하든말든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문으로 들어본 적 있습니다. 마신의 세포를 수집해 ‘가짜 사도’들을 만들어낸 미친 과학자의 이야기를. 몇 명을 만들어냈다고 들었는데…….”

         

       엘라는 그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신의 붉은 눈동자가 마차 뒤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감지했다.

         

       “그중 하나가 당신이지요?”

         

       사신이 손톱을 휘둘렀다.

       그는 상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허리를 반쯤 끊어놓을 만큼 힘을 조절했다.

         

       엘라는 그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한기가 그녀의 몸을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눈앞에 번뜩이는 손톱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