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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그럼 현금을 많이 쌓아둔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세요. 수수료는 넉넉히 챙겨드리죠.

       

       “돈 없는 이브 씨에게는 볼일 없어요.”

       

       “……!”

       

       꼬리를 뽑힌 오리너구리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 이브. 그런 그녀의 표정에 뒤늦게 깨달았다.

       

       내 속마음과 대사가 바뀌었다는 것을…!

       

       반 박자 늦게 올라오는 낭패감.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 탓으로 치환된다.

       

       이게 다 오늘 가챠를 돌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가챠 금단 증상이 치사량에 다다랐기 때문이라고!

       

       다들 기억하길 바란다. 이렇게 가챠가 위험하다는 것을.

       

       ……좋아. 현실도피도 끝났으니 이제 어떻게든 수습해 볼까.

       

       빵긋.

       

       내가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련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는 이브. 설마 내가 이대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돌아가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살짝 상처받은 마음을 티 내지 않으며 그대로 이브의 옆에 붙어 앉았다.

       

       “…아?”

       

       멍청한 표정으로 입만 뻐끔거리는 이브. 그런 그녀의 한쪽 팔을 끌어안듯 앵기며 고개를 들었다.

       

       살짝 올려다보는 각도. 내 배에 닿는 이브의 팔꿈치. 눈치 좋게 발동하는 미용 권능인 향기로운 체취와 촉촉한 피부.

       

       구도는 완벽하군.

       

       마지막으로 소악마 계열 후배 캐릭터를 이미지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목소리를 평소보다 한 톤 내지는 두 톤 정도 높이고, 말하는 중간중간에 숨소리를 섞는 것이다.

       

       “막 이래. 농담이랍니다.”

       

       “…후, 후후후.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나를 흔들어 보려는 그 얄팍한 계획은 진작에 눈치챘다(X)

       

       전혀 몰랐다(O)

       

       이브의 실눈이 한층 깊어지고,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른다.

       

       궁지에 몰릴수록 허세를 부리는 요상한 습관을 가진 이브다. 지금 겁나 당황했다는 뜻이겠지. 물론 이를 아는 척 해서는 안 되겠지만. 

       

       여기서는 이브에게 놀란 듯 띄워줄 차례다. 남자는 칭찬과 인정에 약한 생물이라는 말이 판 대륙에서는 여자에게 해당되는 말이거든.

       

       “와아! 대단해요! 다들 이런 식으로 장난치면 화내던데. 역시 이브 씨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네요!”

       

       “그야 저는 한때 여왕의 자리에 있었으니 말이죠.”

       

       본 여왕을 시험하려 들지 말거라 잡것(X)

       

       와, 씨! 엿 될 뻔했네!(O)

       

       식은땀을 통해 전해지는 속마음을 모른척하며 잠깐의 감탄과 칭찬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포인트는 다른 여자와는 다르다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

       

       이브가 자신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브쯤 되면 이런 얕은 수작은 전부 보이겠지만…알면서도 당하는 게 아부라는 녀석 아닌가.

       

       슬슬 특별함 어필의 약빨이 떨어질 무렵. 목소리를 조금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하아…그치만 곤란하게 됐네요. 이번에 제가 ‘처음’으로 이만한 전리품을 벌어봤거든요. 당연히 ‘처음’으로 처리하는 거라 가장 믿음직스럽고 ‘처음’ 제 전속이 되어주겠다 말씀하신 이브 씨를 찾아온 건데…현금이 부족하시다면야….”

       

       이번에 강조하는 것은 처음.

       

       그동안 판 대륙에 적응해 살며 느낀 것이 있다. 바로 이 세계의 여자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남자의 처음에 집착하고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남자의 경험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처녀막처럼 확 티가 나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시대적 배경. 한번 망했다 재건된 터라 빠르게 발전한 문명이지만, 아직 그 수준은 중세에 불과하다.

       

       거기에 이 시대의 유일한 신앙은 무려 사랑의 여신 아닌가.

       

       비동정을 죄악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그 대신 동정을 올려치기라는 걸 넘어 거의 신성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브.

       

       야스 경험이 없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첫 경험에 큰 환상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헌데 이브는 무려 천 년 묵은 처녀다. 사실상 노괴라는 말도 아까운 요괴에 가까운 나이.

       

       물론 노괴건 요괴건 이브 같은 얼굴과 몸매라면 얼마든 웰컴이지만….

       

       아무튼 이브가 어마어마한 처음이라는 말에 어마어마한 기대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특별한 사람’, ‘처음’으로 이어지는 콤보에 헤롱헤롱해하는 이브.

       

       여전히 겉모습은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담글 것처럼 살벌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아무튼 헤롱헤롱해하는 것이다.

       

       슬슬 예열은 충분한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은근슬쩍 이브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대체로 빼빼 마른 엘프들과 달리, 온갖 가호를 받고 태어난 하이엘프라 그런지 제법 육덕진 감촉.

       

       손에 착 달라붙는 감각을 즐기며 한층 더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단순히 귓가에 속삭이는 것을 넘어 숨결이…아니, 체온이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하지만 정작 입술이 귀에 닿는 일은 없도록 미세한 조정에 조정을 거듭하며 허리를 가볍게 뒤틀었다.

       

       노골적으로 이브의 팔꿈치에 배를 문대며 말했다.

       

       “제가 지금 급하게 현금이 필요한 터라 이브 씨가 도와주시면 정말 고마울 것 같은데…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어머. 이런다고 없는 방법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랍니다.”

       

       말로 얼버무리려 하지 말고 상응하는 대가를 가져와라 애송이(X)

       

       인간의 수명은 어림잡아 100살이니 아이는 100명 정도 낳는 게 좋겠다(O)

       

       실로 두렵고 무시무시한 번역기 내용만 아니었으면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을 분위기.

       

       즉, 조금 더 비벼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내려 지근거리에서 이브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안 되나요? 아무런 방법도 없어요? 제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제가 진리에 닿은 연금술사도 아니고 금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니 어쩔 수 없지요.”

       

       “전부 현금이 아니라도 좋아요. 상응하는 금액의 마석도 받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내로 처분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정말 좋은 거 해드릴 자신 있는데…….”

       

       “…….”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면서도(곤란해하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던 이브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그 가느다란 실눈을 슬며시 끌어올리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드러낸다.

       

       “요나 씨. 방금 그 말. 진심인가요?”

       

       “???”

       

       이게 진실의 눈까지 써가며 확인할 일인가…?

       

       조금 어이가 없긴 하지만 그녀의 눈에 대고 맹세하듯,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넹. 진짜로 좋은 거 해드릴게요.”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렇게 나를 에덴에 방치해두고 어딘가로 사라진 이브.

       

       쇼파 위에서 뒹굴거리며 놀고 있자니 30분쯤 지난 뒤에야 돌아온 이브.

       

       그녀의 손에는 묵직한 주머니 2개가 담겨있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스태프, 각종 상급 포션, 방어용 마도구 둘, 공격용 마도구 넷. 전부 합쳐서 현금 92골드과 100골드어치의 마석으로 매입하겠습니다. 어떠신지요?”

       

       “192골드…!”

       

       모르가나의 지갑에서 나온 13골드가량을 합치면 무려 205골드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거금이다.

       

       이 정도면 이 땅값 비싼 판 그레이브에서 당장 자가 마련이 가능한 정도.

       

       물론, 이 돈을 전부 내가 꿀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혼자 모르가나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니, 베니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누기로 했으니까.

       

       아니, 전리품을 판 돈은 반반으로 나누지만 로브는 그냥 나한테 주기로 했고, 모르가나의 마법서를 아무 상의 없이 폐기한 것도 넘어가 주기로 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내가 더 많이 가져가는 거긴 하지.

       

       어쨌든 그렇게 베니와 판매금을 나눠 먹는다 해도 수중에 100골드가 넘는 돈이 떨어진다는 소리다.

       

       세상에. 100골드라니.

       

       그럼 10연차를 무려 1000번이나 돌릴 수 있다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0+1 가챠니 11000번이나 가챠를 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

       

       너무 많은 숫자는 때때로 사람의 이성을 마비 시킨다.

       

       그 정도면 이번에 사랑의 여신이 가챠에 개입하며 생긴 반작용을 전부 해소하고도 한참은 남을 것이다.

       

       오늘이 5성 뽑는 날인 건가???

       

       뜨거운 쇳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척추를 찌릿하게 달구는 도파민.

       

       내 몸 어딘가에 이런 힘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전신에 활력이 돈다. 

       

       제자리에서 폴짝 튀어 오르듯 일어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좋아요! 감정가에 대한 교차 체크는 하지 않을게요! 이브 씨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셨겠죠! 아, 그래도 이거 하나는 물어봐야겠네요. 현금은 어디서 조달한 건가요?”

       

       “크레이들 상회의 꼬마에게 어린 시절의 빚을 갚으라 했죠. 그러고도 조금 모자라 나중에 제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하고 왔지만요.”

       

       네게 이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X)

       

       칙칙폭폭멈추지않는하프엘프만들기열차출발!(O)

       

       “그, 그렇게까지 하실 건 없는데….”

       

       설마 크레이들 상회에 지워둔 빚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역으로 지고 돌아올 줄은 몰랐다.

       

       거기에 나조차도 기겁할 정도인 뇌내 번역기 내용은 대체…?

       

       여기서 더 장난쳤다가는 진짜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들오들 떨며 이브의 손에서 금화와 마석 주머니는 낚아챘다.

       

       그리고는 뒹굴거리며 만든 ‘좋은 거’를 이브의 손에 쥐어주고는 잽싸게 도망치기로 했다.

       

       “그럼 좋은 거 드렸으니 저는 이제 가볼게요! 아, 유통기한은 따로 없으니까 부담 없이 편하실 때 써도 되니 걱정마세요!”

       

       “예? 자, 잠시만요 요나 씨. 저는!”

       

       “다음에 봐요! 안녕!”

       

       이쪽을 붙잡으려는 다급한 이브의 목소리에 호다닥 은신 스킬로 몸을 숨기며 뛰쳐나갔다.

       

       “요나 씨…!”

       

       허망한 표정으로 손에 쥔 ‘치킨, 안마, 귀 할짝할짝 풀코스 쿠폰’을 구기는 이브를 피해서 말이다.

       

       …아니,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니까?

       

       부담스러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야스 쿠폰을 줬더니 진짜 야스하려는 이브ㄷㄷ

    사실 오늘 휴재할 생각이었는데 새벽에나마 연재해봅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휴먼.

    다음화 보기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Gacha – Civilization’s Ultimate Game. Spin now for a shot at fortune. Spending that doesn’t disrupt your lifestyle? That’s virtually free-to-play. Keep spinning until you strike gold – success is guaranteed. … … Today, yet again, I’m at the gacha wheel. “Did I get a 5-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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