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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이제 이유를 들었으니 꺼져 주겠나?”

        “쌀쌀맞긴, 용건이 끝나면 가겠다고 했잖아.”

        “용건이 뭐지? 여긴 실낙원에 들일 혼은 없다.”

        “내가 아니라 저 아이가 클라우디아 네게 할 말이 있는 거야.”

       

        리브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엔은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뇌제(雷帝) 클라우디아.

        칼레이도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현자 메릴린과 함께 최상층 공략대에 속해있는 마법사였다.

        마찬가지로 최상층에 있어 정보부의 손이 닿지 않는 비아지오를 붙잡기 위해서는 그녀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정보 2과의 시엔이라고 합니다.”

        “정보부의 사냥견중 하나가 엔리코의 직계 중 하나를 귀찮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좀처럼 물고 늘어져서 놓질 않는다더니 그게 너였구나.”

        “……연금학파의 최상층 공략대에 소속되어 있는 비아지오 바르시테는 명계의 문 사건, 검은별에의 의뢰 수주, 악의의 층에서의 범죄 혐의로 현재 수배 중입니다.”

        “순혈 마법사를 원탁의 재판장에 세우겠다는 건가?”

        “전례없는 일임은 알지만 그 첫발을 위해 여기 온 겁니다. 만약 칼레이도스의 공략대가 비아지오를 검거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저희도 등반 성공을 위해 최대한 협조할 예정입니다.”

       

        클라우디아의 시선이 가소롭다는 듯 가늘게 좁혀졌다.

        마탑 행정부에 최상층 공략대의 도움이 될 만한 인재는 없다.

        순혈 마법사들이 신비와 전지를 탐구하는 동안 탑 아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 아니던가.

        그동안 주딱을 잡으려는 여러 삽질로 치안부가 한 차례 해체되고 정보부가 개편되는 등 그 규모도 꾸준히 축소되어 왔다.

        비아지오를 두들겨 패서 눈앞에 대령한 들 그를 제대로 붙잡고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묘지기가 천칭을 쓰는 법은 안 알려줬나보군. 네게는 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동등한 대가가 없다.”

        “아뇨, 있습니다.”

        “뭐지?”

        “만약 클라우디아 님께서 도움을 주신다 약속하신다면, 제가 직접 공략대에 합류할 테니까요.”

       

        세계가 창조되었으니, 이곳에 적힌 경이로움을 따르라-.

        시엔은 허리춤의 검을 꺼내며 현자의 약관을 읊었다.

        검끝으로 하늘에 걸려있는 천칭의 저울을 기울이자 클라우디아가 처음으로 놀란 듯 작게 중얼거렸다.

       

        “호오.”

        “현재 89층 명부(冥府)에 머물고 있습니다.”

        “두 개의 신비를 쓰는 상층의 마법사라…… 중층의 시련은 전부 통과했나?”

        “네.”

        “어째서지? 마법 살해자의 출현 이후에는 계층지기들의 허락만 받으면 굳이 번거롭게 공략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전지를 추구하는 이, 탑에 안배된 기회를 스스로의 발로 밟고 올라서는 것이 마법사로서 옳은 행동이니까요.”

       

        시련을 거치지 않고 탑을 올라가는 방법은 공식적으로는 ‘급행’ 뿐이지만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마법사가 이명을 얻는 중층에 도달할 즈음이면 그들의 위계가 위상 전이나 공간 왜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마탑 안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실력까지 오르기 때문이다.

       

        시련은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는 구하기 힘든 마도구나 마법서, 혹은 신비에 대한 지식 같은 부류였다.

        그래서 과거에는 모든 학파가 차근차근 탑을 오를 것을 권했지만 한 미친 마법사가 가공할 속도로 모든 시련을 무시하고 상층을 돌파한 뒤에는 그 기조가 상당히 바뀌었다.

        지금은 공략대도 천변의 방처럼 꼭 필요하거나, 떨어지는 보상이 많은 시련 위주로 활동했다.

       

        등반에 목숨을 건 마법사들 중에 모든 시련을 통과하는 성실한 이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는 시엔은 클라우디아가 충분히 탐낼 만한 인재였다.

       

        평소였다면 기꺼이 그녀를 공략대에 합류시키며 이 거래를 받아들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등반의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우선 메릴린 님께 이야기는 해보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도록. 안타깝지만 난 더 이상 탑을 오를 생각이 없다.”

        “조금 전 말씀하신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인가요? 조사라면 저희 쪽에서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너희는 이 탑이 무너진다 해도 그분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럴 리가요! 정보부의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지금까지 단 한 명뿐…….”

       

        시엔이 열을 올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작은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위치노트를 꺼낸 클라우디아는 이내 메시지를 확인하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급한 일이 생겼다.”

        “네?”

        “이만 가봐야겠군. 시엔, 후일 연락이 오면 공략대에 합류하도록.”

        “간다니, 어딜?”

       

        콰르르릉!!

       

        미쳐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찬 뇌전이 귓가를 때렸다.

        리브라와 시엔이 눈을 떴을 땐 불탄 벽조목 한 그루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으, 짜증나. 매번 시끄럽다니까.”

        “…….”

        “애들 챙겨서 나가자. 여기 더 있다가 괜히 싸움에 휘말릴라.”

       

       

       

        *

       

        부엉이가 사라진 후, 나는 곧장 관측대로 돌아와 이자젤이 머물고 있는 방을 찾았다.

        대학원에서 헤어지기 전에 그녀에게 받았던 씨앗을 되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시엔이 돌아오면 분명 아니꼽게 볼 테니 늦은 시간이긴 해도 지금 만나는 편이 좋겠지.

        다행히 그녀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어머, 클락 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깨끈이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내의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십자수를 하는 모습.

        언질도 없이 새벽에 벌컥 방문을 열었음에도 규중 처녀같은 도도함이었다.

        밤마다 배를 드러낸 채 위치노트에 빠져있는 자칭 귀족영애와는 확연히 다르군.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이자젤과 누군가를 비교하던 나는 뒤에서 불타고 있는 산등성이를 보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줄 게 있어서 왔지.”

        “이 늦은 시간에요? 핫, 물론 제가 달이 비치는 창가 아래서 갑자기 찾아온 남성에게 깜짝 선물을 받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좀 더 무드 있을 때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아까 낮에 입에 들어온 그 샌드위치가 아직 안 잊혀졌거든요…….”

       

        얜 대체 싫어하는 게 뭐야? 

        그냥 내가 하는 행동은 죄다 좋다고 하는 것 같은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받아.”

        “어머, 이건…….”

        “나한테 떠넘기고 갔잖아.”

        “떠넘기다뇨. 제 순수한 마음을 담아서 드렸던 거라구요.”

        “그 순수한 마음이 날 세뇌하는 거였냐?”

        “코흠…… 방에 먼지가 많네~ 그, 그보다 이거 필요 없어요! 애초에 돌려받을 생각 따위 없었다구요!”

       

        내 손을 밀어내며 가문의 선조들의 원한이 서린 씨앗을 돌려받기를 거부하는 이자젤.

        그렇다고 내게 쓸만한 구석이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적당한 데다 묻어 버린다?”

        “차라리 여기는 어때요?”

        “세계선에?”

        “마침 근처 산들도 다 타 버렸겠다 환경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헤헤.”

       

        그 대부분을 본인이 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말끝을 흐린다.

        어쨌거나 주머니에 넣고 있으면 단순한 짐덩어리에 불과한 물건이니 이자젤의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용의 피’ 나무였던가.

        평범한 나무는 아닌 만큼 뿌리를 내리면 그 권역의 주인은 탑에서 꽤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 분명했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우리는 잠깐의 등산 후 양지 바른 땅을 발견했다.

        대충 이쯤에 심어야겠군.

       

        나는 창고에서 가져온 삽을 꺼냈다.

        적당히 흙을 판 후에 씨앗을 넣고 항상 배낭에 넣고 다니는 설화수 한 병을 위에 뿌려 주었다.

        발로 땅을 밟아 평평하게 만들고 뒤를 돌아보자 이자젤은 몇 걸음 뒤에서 생글거리며 타다 남은 초목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본인이 얇게 입고 나와놓고 춥다면서 은근히 어필해 빼앗은 내 로브를 몸에 두른 채였다.

       

        “괜찮겠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네? 당연히 다 자랄 때까지 지켜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야, 시엔만 돌아오면 바로 떠날 건데.”

       

        여기서 나무 키우고 있으면 등반은 언제 하나.

        나의 매몰찬 거절에 이자젤은 검은별이 그려진 손등으로 제 눈가를 훔쳤다.

       

        “흐윽, 이 위험한 곳에 클락님과 제 소중한 아이를 버리고 가시는 건가요?”

        “니가 태워먹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리고 내가 여길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데?”

        “생각해보니 제 인생에서도 클락님 옆에 있을 때가 항상 제일 위험했네요.”

        “…….”

        “농담이에요. 어차피 미티어 학파에 계속 있을 거니까 이 아이는 제가 돌볼게요. 돌아오실때 쯤이면 몰라보게 훌쩍 커 있을지도 몰라요?”

       

        어째 단신부임하는 남편을 떠나 보내는 아내 같은 말투였다.

        얘도 내가 어지간히 편해졌나 보군.

       

        어쨌거나 이걸로 세계선에 온 모든 용건을 끝마쳤다.

        그런데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숙소로 돌아온 내가 시엔이 돌아오기 전에 방으로 가려던 순간.

        이자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위치노트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기요 클락 님. 잠깐 이것 좀 보실래요?”

        “응?”

       

        ====

        벽력뇌제霹靂雷帝

        [공지다]

       

        다른 파딱들의 사정상 내가 대표하여 쓰는 것이니 양해 바란다

       

        현재 주딱은 살아 있으며 갤러리 역시 확인 중이다

       

        다만 최근 30층에서 벌어지는 학파들의 각축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다며 이런 말을 남겼다

       

        ‘세계선에 발을 들이는 자들에게 누가 이곳의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줘라’

       

        따라서 나를 포함한 파딱들은 주딱의 유지를 받들어 이례적으로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

       

        “혹시 저런 말 하셨어요……?”

        “아니……?”

       

        대충 파딱들이 세계선을 노리는 마탑의 모든 학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은 충격이었으나 놀라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놓고 세계선을 나의 영토로 만들겠노라 선언한 이상 참전하는 것만으로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릴 터.

        그런데 뇌절이가 쓴 딱딱한 공지의 끝에는 다소 어이없는 대책이 적혀 있었다.

       

        ====

        허나 직접 정체를 드러냈을 때 발생할 사회적 파장과 더불어 세계선에 있을 갤러리 유저들의 안전을 위해 한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사진)

       

        우리와 적대하지 않고 주딱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들은 이 가면을 써라

       

        정령의 회랑 입구에 포탈을 만들어 뒀으니 참전 의사를 밝히면 정령들에게 받을 수 있을 거다

       

        이상

        ====

       

        가이 포크스처럼 얼굴을 가리겠다는 선언이었다.

        인식저해마법도 있고 마족전담기구인 극채색도 공식적으로 쓰는 방법인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했으나 문제는 그 형태에 있었다.

        푸른색 원 안에 노란 오각형 별이 그려진 모습.

        어느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갤러리의 추천 버튼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

        — 개추가면이네

         ㄴ 앜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일단 개추

         ㄴ 너 이 자식 방금 개추라고

         ㄴ 지금 세계선 가면 저거 쓰고 돌아다니는 파딱 꼬라지 볼 수 있는 거냐 ㅋㅋㅋㅋ

        — 머리 누르면 개추 주는거냐 ㅋㅋㅋㅋ 웃기네

        — 저거 어디서 받음? 지금 받으러 감

        — 최초의 공식굿즈 아님? 이거 희소성 있거든요

        — 죽었나 했더니 이런 빅 이벤트를 또…… 역시 주딱이야 빠와 까를 미치게 하는 슈퍼스타

        — 전쟁선포라고? 파딱들 다 죽으면 누가 갤 관리하냐

         ㄴ 저번에 수장시켰던 금발미소녀님 도로 꺼내오죠?

        — 파딱중에 정령학파 출신 있나보네 근데 정령의 회랑 입구에 포탈 여는건 아무나 못하는 건데

        — 저기 가면 개인정보 털리는 거 아닌가요?

        ====

       

        당연히 해당 공지의 댓글창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전쟁을 걱정한다기보다 컬트적인 가면의 디자인을 놀리는 쪽이 주류였다.

       

        “아, 아하하……! 다른 파딱 분들이 재밌는 이벤트를 준비했나 보네요. 근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만 해도 지금은 미티어 학파 소속이니까 저 사람들 막아야 한다구요?”

       

        기껏해야 갤질에 심취한 마법사 한 무리가 세계선에서 가면놀이를 하는 거겠지.

        적당히 대형 학파들의 등쌀에 밀려 사라질 게 뻔하다.

       

        그런 심정이 드러나는 투로 웃으며 이자젤은 슬쩍 나의 눈치를 봤다.

       

        “설마 편 드실 건 아니죠?”

        “…….”

        “아니! 가신다고 했잖아요! 기억도 찾았고 씨앗도 돌려받았으니 이제 그만 가시라구요!”

        “…….”

       

        허나 그 미소가 절박함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면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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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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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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