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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공작저로 돌아온 나는 즉각 프란체의 방으로 왔다.

       

       프란체는 룬어 해독에 몰두. 헬레나는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공녀님.”

       

       내 부름에 휙 고개를 돌리는 프란체.

       

       “왔구나? 앉으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프란체와 마주보고 앉았다.

       

       “어떻게 됐니? 다들 파티에 온다니?”

       “아니요, 구성은 저번과 차이 없습니다.”

       

       프란체는 눈썹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내가 초대하는 건데 거절한 거야?”

       

       말투를 보아 심기가 불편하다거나 기분이 상한 건 아니다.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

       

       “엘반 자작님은 가족과 같이 보내기로 하셨고, 안드레아는 친구들과 보낸답니다. 엑시드는 뭐, 말할 것도 없고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수확제 같은 축제 날에 회사 사람들이랑 보낸다고 생각해봐라. 누구라도 기겁할 것이다.

       

       ‘우리가 그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회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불편함은 어쩔 수 없는 법. 원래 이런 축제 날에는 마음 편한 사람들끼리 있는 게 최고다. 좋은 날이지 아니한가?

       

       이는 프란체도 알았는지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쩔 수 없구나. 다들 수확제니 친근한 사람들과 보내고 싶었겠지.”

       

       그래. 케일, 라데아 자매, 카자르가 여기에 친구가 없어서 우리랑 보내는 거지.

       

       “파티는 공작저에서 열면 될 거고. 전보다 더 성대하게 준비해야겠구나.”

       

       참여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보다 더 성대하게 여신다고요? 저까지 포함하면 여섯 명 아닙니까?”

       

       내 질문에 프란체는 픽 웃었다.

       

       “당연히 별채에서 온 사용인들도 챙겨야지. 수확제는 모두가 즐기는 날이잖아?”

       

       아, 그렇구나.

       

       역시 프란체는 군주가 될 자격이 있다.

       

       “제 생각이 짧았네요.”

       “그렇게 갈 것까진 없지.”

       

       싱긋 웃고는 다시 룬어 해독에 들어간 프란체. 그런데 공작령 일은 다 해결된 건가?

       

       “공녀님, 다른 업무는 다 끝난 겁니까? 이전 공작님을 봤을 때 공작령 일이 많아 보이던데요.”

       

       집무실에 처박혀서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공작이다. 일이 엄청 많을 거 같은데…….

       

       “놀랍게도 공작은 일을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었단다.”

       

       나는 “만들어서요?”하고 물었다.

       

       “너도 바렌베르크의 왕족이었으니 알 테지만, 영지 업무는 토지 관리, 세금 징수, 법과 질서, 군사적 의무, 사회적 역할이 있잖아?”

       

       프란체는 검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공작령은 치안이 좋고 엑시드가 있는 터라 법과 질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군사적 의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면 토지 관리와 세금 징수. 사회적 역할만 하면 된다는 건데.

       

       ‘세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연례로 징수하고…….’

       

       공작령의 토지는 이미 전부 관리돼 있으니. 특별한 게 있지 않은 이상 생각보다 할 일이 별로 없다.

       

       “공작도 참 꽉 막힌 사람이야. 어떻게 영지를 관리하는데 감독관 하나 뽑지 않을 수가 있어?”

       

       나는 “감독관이라 하시면?”하고 물었다.

       

       “세무적인 일이나 영지 개발 같은 걸 전부 혼자서 처리했다는 말이야.”

       

       말 그대로 일을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었군.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신기한 사람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일하지 않고서 못 배겼던 걸까.”

       

       그리 말하곤 씁쓸하게 고개를 휘젓는 프란체. 계속 뒤척이고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내가 없던 사이에 뭔가 있었던 모양이다.

       

       “공녀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

       “얼굴에 다 티가 납니다.”

       

       프란체는 피식 웃으며 마법서를 덮었다.

       

       “이젠 내 얼굴만 봐도 기분을 알아차리는구나.”

       

       내가 얼굴만 보고 사람의 기분을 파악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이런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프란체의 표정에서 감정이 새어 나왔다.

       

       “사실 아까 에덴이 깨어났어.”

       “그렇습니까? 일주일 좀 넘게 걸렸군요.”

       

       뒤지게 패고 소멸의 오러까지 사용해서 팔까지 잘라냈는데 일주일 만에 회복할 줄이야.

       

       “그 사람이 깨어나자마자 비웃어주려고 바로 찾아갔단다. 그런데 하는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프란체는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후계자를 내가 이어받는다니까 체념한 얼굴로 데카르트를 잘 부탁한다더라.”

       

       음? 에덴이라면 좀 더 화를 내고 그럴 줄 알았는데.

       

       “자세하게 이유를 캐물었더니 정말, 내가 비참해지는 거 같았어.”

       

       내가 “이유요?”하고 물으니 프란체는 에덴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나를 싫어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고, 그거에 대해 사과하고, 평생 원망하고 저주하라고. 용서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거 웃기는 소리네. 나한테 뒤지게 처맞으면서 팔 한쪽 잃어서 머리가 돌아간 건가? 나는 물었다.

       

       “그런데 싫어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뭔가요? 예전에 말씀하셨던 이유가 아니었던 겁니까?”

       

       프란체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공작님이 광란의 저주를 받으셨다더라.”

       

       광란의 저주.

       

       ‘망할 황태자랑 동성애자 카서스가 가지고 있었지.’

       

       저주의 영향이 각자 다르지만, 심하면 광전사가 되어 버린다. 황태자와 카서스는 미약해 분노 조절 장애 정도였다.

       

       “근데 저주가 엄청 심했나 봐.”

       

       프란체는 에덴에게 들었던 얘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공작은 광란의 저주로 인해 에덴과 라인에게 폭행을 일삼았고, 굶기거나 마수가 득실거리는 사지로 내몰았다고.

       

       그런데 유일하게 공작이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프란체. 에덴과 라인은 이때부터 프란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잠시만요. 그런 이유로 공녀님을 제가 오기 전까지 계속 괴롭혔던 겁니까?”

       

       프란체는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18살부터 좀 뜸해지긴 했지. 그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건 변치 않았지만.”

       

       어린 시절의 증오가 각인되어 성인까지 이어진 건가. 그러나 용서는 없다.

       

       프란체가 받은 취급은 가축만도 못했으니.

       

       “그러고는 뭐랍니까?”

       “치기 어린 실수였대.”

       “…예?”

       “치기 어린 실수.”

       

       와, 진짜 미친놈이었네.

       

       “그간 미안했다, 자신은 가문을 떠날 거다,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 자신을 평생 원망하고 저주해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러고 대화가 끝났어.”

       

       데카르트의 후계자에서 밀려나고 책임질 것도 사라지니 모든 걸 내려놓은 건가.

       

       “그렇게 체념한 모습을 보여주니 찝찝한 기분이야. 그리고 공작이 광란의 저주에 걸린 것도 내 영향이 있으니… 복잡한 기분이구나.”

       

       그럴 만도 하다. 전혀 관계없으면 둘 다 증오하고 말았겠지만, 인과 관계에 프란체가 엮여있으니.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아.’

       

       그들이 행한 건 엄연히 가정 폭력이다. 공작이 모든 일의 원흉이고, 두 아들은 그 분노를 프란체에게 돌린 거다.

       

       ‘그나저나 에덴과 라인이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로판소’에서는 소미레와 엮이는 남캐가 아닌 이상 타인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다른 캐릭터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서브 퀘스트나 간단한 캐릭터 소개글이 전부였지.’

       

       스토리가 있는 소울 라이크라곤 하지만, 핵심은 ‘역하렘’이었기 때문이다.

       

       “공녀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여기서는 그 누구의 의견도 아닌, 프란체의 생각이 중요하다.

       

       “…잘 모르겠어. 그 세 명을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여러 생각이 충돌해서 망설임을 만들고 있군. 하지만 그건 물렁함이지, 자비가 아니다.

       

       “그들의 처벌은 공녀님의 마음입니다. 그 누구도 공녀님의 결정에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세계의 배경은 중세 귀족 사회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세 명이다. 프란체가 어떤 결정을 하든 사소한 가십거리로 남지,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곧 데카르트의 주인이 될 테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프란체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지만… 뭐, 시간이 지나면 나오는 게 해답이다. 급할 필요는 없겠지.

       

       프란체는 픽 웃더니 “이 얘기는 이제 됐고.”하곤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데카르트 의회가 열릴 거야. 가문의 원로들과 가신들이 모이겠지. 후계자가 저 꼴이 되기도 했고, 공작은 곧 퇴위하니까.”

       

       그러고 보니 의회도 있었지. 뭐, 그건 프란체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거다. 지금껏 경험이 있고, 내게 배운 게 있으니까.

       

       ‘무엇보다 프란체의 힘이 가장 강하고.’

       

       이제 내가 프란체에게 해줄 건 조언과 가르침이 아닌, 칭찬밖에 남지 않았다.

       

       “데카르트 의회는 금방 끝날 거야. 좀 강압적으로 나오면 되겠지.”

       

       이젠 힘도 막 사용하는구나.

       

       “그러니 다 같이 즐길 수확제나 생각하자?”

       “좋습니다. 수확제는 저도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수확제에서 있을 파티, 마법의 무대, 공작령의 축제. 볼거리가 많겠군. 돌아다닐 곳도 많겠고.

       

       “근데 수확제 때 말인데…….”

       

       프란체가 말끝을 흐리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작저에서 열리는 수확제 파티는 알아서 즐기라고 하고 단둘이 공작령을 거닐지 않으련…?”

       

       수줍은 데이트 신청. 풋풋함에 픽 웃음이 나왔다.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나야 좋지. 그게 마지막일 테니.

       

       “좋습니다. 근데 파티는 아예 참여 안 하시는 건가요?”

       “아니, 내가 주최자니까 당연히 참여는 해야지. 잠깐만 있다가 나가자는 거야.”

       “그렇군요. 모두에겐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때가 되면 다들 술에 취해서 우리가 사라진 줄도 모를걸?”

       

       그렇긴 하겠다. 원래도 정신이 없는 애들이었으니.

       

       “카자르와 헬레나는 눈치가 빠르니 신경 쓰지 않을 거고… 라데아는 의문을 가지겠구나.”

       

       라데아가 눈치 없는 편은 아니지만, 경험이 많이 없으니…….

       

       “카자르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넌지시 눈치를 주겠죠.”

       

       프란체는 “그렇겠지.”하곤 싱긋 웃었다.

       

       “수확제가 기대되는구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프란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대화도 나누고, 마법의 무대라고 불리는 폭죽놀이도 보고.

       

       내게 있어서 다시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될 거다.

       

       “그럼 저는 숙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갑자기?”

       “따로 준비할 게 있어서요.”

       “그래…? 그러렴.”

       

       프란체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인사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이젠 텅 빈 연무장과 기사단 숙소. 아마 곧 라데아와 케일이 이쪽으로 오겠지. 단장과 부단장인 만큼 개인 방도 받을 거다.

       

       ‘기사 작위도 받고 얼마나 좋아.’

       

       뭐, 아무튼.

       

       ‘프란체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준비해야지.’

       

       모옥에서 가져온 보석 중에 발견한 에메랄드를 꺼냈다. 프란체의 눈과 잘 어울리고, 그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인지라 이거로 정했다.

       

       ‘크기가 좀 크네.’

       

       성인의 주먹만 한 크기. 이건 소멸의 오러를 사용해 깎으면 될 거다.

       

       ‘목걸이가 좋겠군.’

       

       커다란 에메랄드를 소멸의 오러를 사용해 모양을 만들었다. 전문 세공사에게 맡기는 게 좋지만, 내가 직접 하고 싶었다.

       

       ‘음.’

       

       손재주가 있는 편인지라 나쁘지 않다.

       

       ‘이대로 구멍을 뚫어서……’

       

       에메랄드빛과 잘 어울리는 보석들을 깎아 사슬 형태로 만든다. 집중력이 극도로 필요한 작업인지라 식은땀이 앞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됐다.’

       

       옅은 노란색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에 걸린 에메랄드. 내가 생각하는 프란체의 상징이다.

       

       ‘살짝 투박하지만, 괜찮네.’

       

       나는 목걸이를 바라보며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이 목걸이를 전해 줄 날이 다가왔다.

       

       수확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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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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