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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노스트럼 왕국 중부, 세이레네로 가는 가도.

     제국의 마스터이자 후작, 클레이돌 후작은 눈앞에 앉은 남자의 모습에 진심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후후, 후후후.”

     마도 기계의 나사가 빠진 것처럼 흘러나오는 미소.

     클레이돌 후작은 마스터이기에, 마스터급 상대가 표정에 감정을 숨기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난 삼십 년 넘게, 어린 시절부터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라는 남자를 봐왔으나-

     “후후후….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군.”

     이 남자가 이렇게 ‘진심’으로 웃는 건 처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전하?”

     “응?”

     다른 이들이라면 두려워하며 넘어가려고 했겠지만, 클레이돌 후작은 에둘러 묻지 않았다.

     “오는 내내 미소가 끊이질 않으시던데.”

     “아아, 별 건 아니네. 좋은 인연을 만나서 그렇지.”

     “이사벨라 황태자비를 또 발작하게 만드실 겁니까?”

     “무슨 소리인가. 후작의 말은 꼭 내가 왕국에서 만난 여자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 같다는 말이군.”

     “지금, 딱 그런 표정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황태자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후작이 보기에 내가 그랬다고?”

     “예. 사랑에 빠진 청년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사랑이라…. 그렇군, 이 감정. 사랑인가?”

     “전하…?”

     “아니. 사랑인데,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황태자는 단호했다.

     “왜냐하면 상대는 남자거든.”

     “…….”

     “그레이 지브롤터.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너무나도 인상적인 만남이었어.”

     “아아, 그 맹랑한 꼬맹이 말씀이군요. 제법 싹수가 좋아 보였습니다.”

     

     황태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후작은 그레이 지브롤터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지? 7년 전이었나?”

     “아니요. 그때는 병사들을 이끌고 사진을 찍으러 갔던 때였죠. 수년 뒤에, 아이페리아 회장의 부탁으로 호위로 나섰을 때 만났습니다.”

     “아아, 그때였군.”

     “기세는 숨기고 있었지만, 그때 대략 하급 기사만큼의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던데….”

     “검사로서는 끝났어. 오른쪽 다리의 마나 혈맥이 제대로 꼬였더군.”

     “아아….”

     클레이돌 후작의 입에서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건방지기는 했어도 능력은 확실해 보였는데….”

     “그래도 다리와 별개로 따로 수련은 하는 모양이더군. 기세를 잘 숨기고 있었어.”

     “어느 정도였습니까?”

     “글쎄….”

     황태자가 한 손을 차례차례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제어하지 못하는 기세만 따지고 보면 상급 정도는 되던 것 같던데.”

     “17살에 한쪽 다리의 마나가 흐르지 않는데도 상급이라고요?”

     “그 정도 재능은 있어야 나를 죽이느니 마느니 그런 이야기를 할 자신감의 근거가 되지 않겠나?”

     “…황태자 전하를 죽이겠다고 했습니까?”

     클레이돌 후작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황태자는 뭔가가 떠오른 것처럼 낮게 웃었다.

     “황태자 전하. …크흐흐.”

     “그렇게 웃지 마십시오. 진짜 소름 돋습니다.”

     “아아. 미안하네. 그냥, 마음 같아서는 왕도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도 들 정도라서.”

     “엄청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머리는 똑똑해 보였어도 제가 만났을 때는 그냥 꼬마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어른이지. 나도 모르게 어른으로 대하고 말하게 되었다니까. 그 바람에 실수도 하고.”

     “전하께서 실수를…?”

     “사소한 실수지만, 뭔가 모르게 상당히 편했어. 그래, 그건 마치….”

     황태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들이었으면 딱 좋았을 녀석인데.”

     “아들이 100명도 넘으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들이면서 동시에 나의 후계자로서 내세우기 적당한 자. 이 합스베르크의 뒤를 잇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

     “다리는 망가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여튼….”

     황태자는 진심으로 짜증스럽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깟 몸 좀 한군데 망가졌으면 어디 덧나나?”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십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욕을 먹었다고 화내는 청년처럼.”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황태자는 손을 휘저었다.

     “검과 창이 천하를 지배하는 시대도 이제는 좀 끝나야지. 그리고 그 정도면 자기 지킬 정도로 충분히 강해.”

     “하지만 마스터는 아니잖습니까.”

     “항상 옆을 지키는 마스터 한 명 붙여두면 그만이지.”

     “그런 자가 있습니까?”

     “마침 딱 적격인 사람이 있지. 내가 뭔가 하지 않아도, 당사자들도 딱 맞게 달라붙을 예정이고.”

     “…설마.”

     클레이돌 후작은 잠시 사색이 되었다.

     “진심으로 그레이 지브롤터를 아스타시아 황손녀의 짝으로 삼을 생각이십니까?” 

     “그 반대야.”

     “예?”

     “아스타시아를 그레이 지브롤터의 짝으로 만드는 걸세.”

     “……무슨 차이인 겁니까?”

     “후작은 내가 주변에서 뭐라고 한들,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고 한 목표와 그에 따른 결정을 바꾸는 걸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없죠. 전하의 고집을 누가 꺾겠습니까?”

     “그레이 지브롤터도 마찬가지야. 녀석은…그래.”

     순간, 황태자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씩 웃었다.

     “나를 닮았어.”

     “…….”

     “아마 본인도 느꼈겠지. 자신이나 나나 다를 바 없는 자라는걸.”

     “어, 크흠….”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삐뚤어진 자.”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뭐 그런 겁니까?”

     “천재가 아니라…그래. 요즘 제국신문에 나온 신조어로 이야기하자면.”

     덜컹.

     마차가 크게 들썩였다.

     “싸이코는 싸이코끼리 통하는 게 있지.”

     “…제가 그건 잘 몰라서. 뭡니까?”

     “나중에 찾아보게. 하여튼 그레이 지브롤터는 제법 괜찮은 인간이야. 만일 제국에서 태어났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면…그래. 재상으로 두고 써먹기 딱 좋은 녀석이지.”

     “재상…? 확실히 어울리기는 합니다만.”

     “그래. 황제 자리는 안 되니까.”

     “…….”

     잠시 클레이돌 후작은 숨을 헛들이키며 말을 멈췄다.

     “황제는 나고, 그 아래에 두고 옆에서 일을 시키면 투덜거리면서 누구보다 완벽하게 처리할 인간이거든. 그런 인간은.”

     “만일 아니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 눈이 옹이구멍이었음을 인정하게 되는 거고, 다른 재상을 알아보는 거지. 하아.”

     황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였으면 좋았을 것을.”

     “…17살짜리를 덮쳐서 임신시키기라도 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응? 무슨 소리인가.”

     클레이돌 후작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 정도는 아닌 겁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예?”

     “둘 다 남자인 게 아쉽군. 한쪽이 성이 달랐으면, 육체관계로라도 어떻게 내 것으로 확실하게 만들었을 것을.”

     “……그.”

     클레이돌 후작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편견은 없습니다만, 황태자님. 아무리 그래도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는….”

     “만일. 그레이 지브롤터가 게이라면.”

     “…….”

     “그렇다면, 그레이 지브롤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생각은 해볼 수 있겠지만.”

     황태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레이 지브롤터는 여자를 좋아하고, 나도 게이가 아니지. 뭔가. 그 표정은.”

     황태자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본인은 게이가 아니야.”

     “아, 예.”

     “그리고 그런 게이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알아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내가 그런 변수를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지. 그레이 지브롤터가 바라고, 그걸 위해서라면 나조차도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덜커덩.

     마차가 가도를 지나, 지브롤터 영지에 진입했다.

     “피를 섞는다. 이것만큼 확실한 결합이 또 어디에 있겠나.”

     “그레이 지브롤터와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꼭 아스타시아가 아니어도 괜찮지만, 가장 가능성이 큰, 아니 확실한 카드는 아스타시아가 분명하지. 정말이지, 기대되는군.”

     히죽.

     “둘 사이에서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벌써 손자 손녀 이름까지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미리미리 생각해둬야지. …아.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무슨 이야기를…?”

     “나중에 또 만나면, 100점 만점이었다고 알려줘야겠어. 흐흐흐.”

     황태자는 창밖, 왕도 방향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 * *

     3월 1일, 저녁.

     “그러면 다들 각자 방으로! 내일도 잘 부탁해!”

     아스타시아가 제국 유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승강기의 버튼을 누르고 4층으로 향했다.

     덜커덩, 덜커덩.

     아주 천천히 올라가는 승강기.

     승강기가 올라가기 직전 유리창 너머로 스친 제국 유학생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지만, 아스타시아는 애써 모른척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후….”

     이곳에 오기 전, ‘그 남자’가 말했다.

     반드시 성공시키라고.

     그리고 그 말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는지, 그레이 지브롤터를 데리고 따로 식사하러 갔다는 소문이 첫날부터 바로 퍼졌다.

     협곡의 버려진 장남과 제국 황태자의 만남.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그레이라는 인간이 벌써 제국에 넘어가려는 게 아니냐는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설레발로 끝난다면 그걸로 끝.

     하지만 만일.

     그레이 지브롤터가 제국 유학생 중 누군가와 눈이 맞아서 연인이 된다거나, 혹은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예상, 이네.”

     아스타시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승강기가 열리자마자 자신의 방문으로 다가갔다.

     

     철컥.

     제국식 마도 자물쇠가 설치된 잠금장치에 손을 대자, 아스타시아를 인식한 잠금장치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스륵.

     아스타시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와….”

     전체적으로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인테리어.

     제국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는 인테리어 설계사가 와서 보더라도 ‘이건 배워가야겠다’라면서 설계자를 찾을 것 같은 방-

     “이건 방이 아니라 집인데…?”

     한 명을 위한 집은 너무나도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아, 여기에서 신발을 벗으라는 거네.”

     아스타시아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는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

     수직으로 휘어진 복도를 지나 들어간 거실에는 소파와 식탁, 그리고 몇 가지 마도공학 기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완전히, 살림을 차려두셨네…. 심지어 가구까지 전부.”

     아스타시아는 거실 옆에 캐리어를 내려놓은 뒤, 식탁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솜누스 꽃이 장식된 나무패.

     그 뒤에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안쪽 방으로 들어오시오? 흐흥, 얼마나 놀라게 하려고 이런 걸 준비하셨대?”

     아스타시아는 주변을 훑었다.

     “창으로 들어오려나, 아니면 옥상으로 들어오려나. 옥상으로 들어오려면 저기 공용 계단을 써야 할 텐데~”

     

     아스타시아는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와아….”

     방 전체를 가득 채울 것 같은 넓은 침대 하나.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아니 세 명이 누워 자도 거뜬할 것 같은 침대.

     “어디계셔요~ …아, 여기에서 더 안으로?”

     침실의 안, 좁은 통로를 향해 아스타시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옷장처럼 이루어진 장소.

     그 끝에는 굳게 닫힌 또다른 문이 하나 더 있었고, 아스타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덜커덩.

     두께가 수 cm는 될 법한 두꺼운 문을 당기자, 그 너머에는 사람 수 명이 간신히 들어갈 작은 공간이 있었다.

     “……?”

     보이는 것은 그저 회색의 벽.

     아니, 건물 내부에 있는 제법 큰 기둥.

     “…아.”

     아스타시아는 벽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덜컹.

     어딘가, 승강기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주님.”

     사락.

     “기둥 뒤에, 공간 있습니다?”

     벽-으로 보이던 벽지가 걷히며, 붉은색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마법인가요?”

     “아니요. 패닉룸의 원리를 이용한 마도공학과 잔재주로 만들어 낸 긴급대피로일 뿐입니다.”

     “이 승강기는….”

     “지하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죠. 지하 1층에서 이곳 4층으로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

     벽지를 뚫고 나온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별거 없고, 그냥 지하를 통해 저기 장학회 건물에 있는 제 침실이랑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죠. 마법의 통로 같은 겁니다.”

     회색 청년, 그레이가 아스타시아를 향해 다가가며 검지를 들었다.

     “쉿.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이 통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니까.”

     “즉….”

     “예.”

     검지가 아스타시아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우리만의 비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제국 유학생 기숙사 책임자 : 그레이 지브롤터
    아스타시아의 방은 합스베르크력 7년 기준 84m2, 지브롤터 스타일로 제작되었습니다.

    #2
    황태자는 게이 아닙니다. TS되지도 않습니다.
    그레이가 둘 중 하나라도 해당사항이 있었다면 식사 자리가 아니게 되었겠지만, 그레이도 둘 다 아니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4권이 끝났습니다.
    121화부터는 5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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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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