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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1

    통역사는 ‘생각보다 안전해서 괜찮네!’라고 안일한 생각을 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황금 사신이 가져다주는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괴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다니!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이 장소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같은, 이런 생존에 필수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바다처럼 파도치고 꿈틀거리는 검은 바다로 뒤덮인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먹빛 점액으로 가득 찬 대지.

    하늘과 땅이 마치 하나의 공간처럼, 위아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풍경.

    하지만 이 모호함 속의 평온함은 예고도 없는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거대 해파리가 불러낸 것으로 보이는 폭풍은 자연의 법칙을 뒤엎고 하늘과 땅의 자리를 마구 뒤집으며 난장판을 만들어버렸다.

    강력한 폭풍이 불어와, 하얀 대지 채로 사람들을 하늘로 집어 던졌고, 하늘과 땅의 검은 액체는 마구 뒤틀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거기다 더해서 중력의 방향이 마구 뒤집혀서 점점 위아래를 구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 혼란 속에서 통역사의 목숨을 지켜주는 것은 딱 두 가지만 남아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통역사의 어깨에 붙어있는 황금 사신.

    그리고 통역사를 둘러싼 물방울 보호막.

    기절할 것 같은 무서운 상황에서 통역사는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고, 살아남기 위해 사방을 계속해서 살폈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내리꽂히고.

    중력이 뒤집혀서 끝없이 낙하하는 공포스러운 상황.

    마치 거대한 세탁기 통에 빨려 들어가 위아래를 가늠할 수 없이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늘과 땅, 어느 쪽이든 돋아나 있는 촉수들은 호시탐탐 공격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인간의 뼈와 살은 간단히 녹여버리는 검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그때 하얗게 빛나는 아귀가 짧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통역사를 향해 날아왔다.

    통역사를 노린 것처럼, 일직선으로.

    “안 돼, 오지 마!”

    이빨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하얀 아귀가 날아오는 것은 공포스러웠다.

    통역사 생각에 거대 해파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거대한 오브젝트와 충돌한다면 운이 좋으면 깔끔하게 사망.

    운이 나쁘면 전신 골절 식물 인간이었다.

    아귀는 통역사가 가까이 오자, 마치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커다란 입을 벌려서 통역사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으아아아악! 안 돼!”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패닉에 빠진 통역사는 입안에 삼켜지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통역사를 마지막으로 아귀가 사람들을 입속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사실 처음에는 미니 사신 정원을 펼쳐서 사람들을 세희 연구소로 보내려고 했는데, 해파리의 공간이라서 그런지 잘 안됐다.

    야금야금 공간을 파고드는 것은 쉽게 됐는데, 규모를 늘리려고 하면 너무 장작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황금 사신이랑 푸른 사신만 믿기에는 살짝 부족해 보여서, 하얀 아귀에게 죄다 입속에 집어넣어서 보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얀 아귀도 미니 사신처럼 설득과 조율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묵묵히 명령을 수행해 줬다.

    하얀 아귀 편해!

    그리고 맛있어!

    거대 해파리는 갑자기 난동을 피우면서 공간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서 하얀 아귀는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날아다녔고, 황금 사신은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즐겁게 웃으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황금 사신은 언제나 즐거워 보이네.

    황금 사신은 집어 던져도 좋아하는 걸 볼 때, 세탁기 같은데 넣어도 좋아할 것 같다.

    나중에 한 번 해봐야지.

    위아래 구분이 무의미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폭풍.

    <말을 할 수 없지만 말이 많은 해파리를 죽이고, 폭풍의 눈에서 밤의 진주를 부숴라.>

    아마 지금 상태가 ‘말이 많은 해파리’가 죽은 뒤에 나타나는 ‘폭풍’이라는 현상이 아닐까 싶었다.

    폭풍의 눈은 어디일까. 

    거대 해파리가 일으킨 거니까, 거대 해파리가 폭풍의 눈일까?

    거대 해파리는 이 중력이 뒤집히고, 위아래가 뒤집히는 와중에도 정방향을 유지한 채 고고하게 떠 있었다.

    그냥 저 해파리를 공간 채로 찢어버리면, 밤의 진주가 부서진 걸로 해주면 좋겠는데….

    생각난 김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뀩.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그대로 해파리의 방향으로 휘둘렀다.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서, 하늘이 갈라졌다.

    검은 거품 같은 하늘이 찢어지고 보이는 것은 더욱 어두운 공허.

    그리고 손가락의 궤적과 거대 해파리가 만나자, 해파리도 다섯 줄기로 쪼개졌다.

    끼이이익.

    왠지 기계적이면서도 듣기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해파리는 터진 풍선처럼 흐느적거리면서 검은 바닷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어? 설마 이걸로 끝이야?

    하지만 거대 해파리는 내 기대를 배신하고 바닷속에서 완벽하게 부활해서 다시 고고하게 떠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역시 안되는 건가.

    오브젝트는 파괴 조건을 채울 수밖에 없는 것 같네.

    아마 공간 압착으로 찌부시켜도 재생하겠지?

    여유가 있으면 실제로 시도를 해볼 텐데, 저 해파리는 너무 큰 데다가 공간 침식에 저항력도 가지고 있어서 필요한 장작이 너무 많아.

    공간 압착 테스트는 다음에 좀 작은 녀석을 만나면 해봐야겠다.

    거대 해파리의 파괴 조건을 생각해 보면 ‘폭풍의 눈’을 찾는 게 선행 조건이다.

    중력이 위아래로 요동치고 강렬한 소용돌이 때문에 몸도 마구잡이로 회전하는 도중, 유독 커다란 용오름을 하나 발견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수많은 용오름 중에서 유독 두꺼워서, 세로보다 가로가 두꺼워 보이는 비만 용오름.

    비행 능력이 없으니까, 장작 소비를 감수하고 공간을 잡고 용오름을 향해 날아갔다.

    뀩.

    공간을 잡고, 공간을 찢지 않고 그대로 몸을 앞으로 날려 보냈다.

    공간에 간섭하자, 장작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이 느껴지면서 엄청난 속도로 용오름을 향해 돌진했다.

    용오름 속으로 들어오자, 나를 반긴 것은 바람도 소리도 중력도 없는 평온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혼란스러운 공간과 대척점에 있었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마치 다른 차원에 들어온 것 같은 무중력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겉에서 볼 때보다 100배는 넓게 왜곡된 공간은 정체된 공기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용오름 내부의 하늘과 바다는 두 곳 모두 광활한 칠흑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광활하게 펼쳐진 두 개의 어둠의 바다 사이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은 바다에는 진주처럼 새하얀 달이 위아래로 비치고 있었다.

    설마 저게 ‘밤의 진주’인 건가.

    달이 없는데, 비치는 달의 반사된 모습만 두 개.

    게다가 사방에는 거울처럼 생긴 흑요석들이 잔뜩 떠다니고 있었다.

    부술 수 없는 수면에 비친 달 두 개, 그리고 빛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울.

    음, 퍼즐 같네.

    그것도 꽤 어려워 보여.

    ***

    하얀 아귀에게 잡아먹혀 입속으로 들어온 제임스는 생각보다 안락한 분위기에 약간 놀랐다.

    곳곳에 위치한 황금 사신들이 조명처럼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황금 사신의 편안한 빛 덕분에 아귀의 배 속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엄청 넓었다.

    그리고 말랑말랑하고 주먹만 한 공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마치 볼풀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공들을 살펴보니 팔다리가 훨씬 짧아진 하얀 아귀 모양 공이었다.

    이런 게 왜 배 속에 있는 거지?

    제임스가 하얀 아귀 볼을 손에 들고 꾹 누르자 재미있는 소리가 났다.

    뀨.

    누르면 ‘뀨’ 소리를 내는 공들이 가득한 볼풀.

    그 안을 폴짝폴짝 즐겁게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들.

    생각보다 유쾌한 공간이었다.

    기절한 통역사가 볼풀 안으로 던져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무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이 안은 안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외부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제임스는 볼풀 안에 편안히 누워서 오늘 본 것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스마트워치의 녹음 기능을 켜고, 오늘 본 것들을 언급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회색 사신은 0호 유물을 흡수했다.”

    “회색 사신은 아귀를 파괴하고 하얀 아귀로 재탄생시켰다.”

    “회색 사신이 실행한 ‘해파리 고문’은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으로 보인다. 재미로 했다고 보기엔 귀찮아 보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이 제임스의 뇌리를 흘러갔다.

    갑자기 춤을 춘 회색 사신이라던지, 하늘에 떠오른 붉고, 푸른 달들.

    그리고 가볍게 가설을 세웠다.

    “회색 사신은 오브젝트를 파괴하고 자기 것으로 바꿀 수 있다.”

    “회색 사신은 오브젝트를 파괴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 가설을 증명할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인가.

    녹음을 마치자, 제임스는 진지한 얼굴을 풀고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황금 사신들을 주워서 놀아주기 시작했다.

    ***

    통.

    고요한 공간을 유영하며 거울 하나를 두들기자, 거울이 빙글빙글 돌면서 위치를 바꿨다.

    건드린 거울 말고도 3개의 거울이 추가로 그 위치를 바꿨다.

    거울은 서로가 모종의 규칙으로 묶여있는지,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거울 몇 개가 같이 움직였다.

    확실히 퍼즐이야.

    이 거울을 잘 움직여서 수면에 뜬 달 두 개를 없애라는 것 같은데….

    이런 퍼즐은 생각하기가 귀찮아서 마구잡이로 건드리면 알아서 풀리던데, 아무리 해도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표면에 비친 달을 없애면 되겠지?

    나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머리를 덜 쓰기로 했다.

    공중에 누워서 양손을 벌리고 양 손바닥을 펼쳤다.

    광활하게 펼쳐진 위아래의 검은 바다의 공간을 잡았다.

    뀩.

    그리고 양손을 움켜쥐어서 바다를 지워버렸다.

    그 순간, 사방을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던 용오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장벽이 사라지자 익숙한 중력이 돌아와서,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자유낙하.

    바람을 가르면서 시원하게 떨어져 내리는 도중,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보였다.

    한때 중국의 상공을 지배했고, 지금 관악구를 폐허로 만든 거대 해파리가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대 해파리는 천천히 분해되었고, 한때 고고했던 모습과 달리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익!

    거대 해파리의 죽음은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깊은 슬픔이 묻어나는 소리를 동반했다.

    그것은 단순히 죽음의 단말마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절규처럼 들렸다.

    그 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졌고, 마치 거대 해파리의 존재감이 실린 것처럼 공간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비명은 점점 작아졌고 그 비명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어두운 하늘을 뚫고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머리가 편한 쪽이 정답이야.

    히히.

    그리고 저 멀리서 언론사들의 헬기들이 잔뜩 보였다.

    상당한 숫자의 헬기들이 낙하 중인 나를 촬영하고 있었다.

    헬기들을 바라보면서 이번 사태의 종결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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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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