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許昌).
한때 후한의 수도였던 곳.
하남의 중심에 가깝게 위치한 도시이며, 상업이 발달한 도시.
“허창은 물류가 모이는 도시라 물가가 높기로 유명하다던데.”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 묵어가기도 어려운 곳이라고…”
돈이 없지는 않은데…
거의 보름가량을 이곳에서 묵으면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겠네.
“좋은 객잔에 들어가기는 힘들겠군.”
“그래도 외곽으로 가면 저렴한 곳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도시는 외곽도 비싸.”
혜령이의 말대로 외곽에 있는 객잔을 찾는 게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물가라는 게 한 도시에서 어딘 싸고 어딘 비싸고 할 수가 없지.
그래도 무한만큼 물가가 비싸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수백 년 전이면 모를까, 지금의 허창은 옛날의 유명세에 비하면 다소 빛이 바랜 도시였으니까.
“일단 내려가자. 허창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할 테니. 묵을 곳은…상황에 따라선 방 두 개를 잡는 건 어렵겠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냐.
바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기원전부터 튀어나온 중원 아닌가. 부부가 아닌 이상에야 남녀가 같은 방을 쓰면 말이 나오는 법.
이런 걸 지적할 만하건만, 혜령이는 같은 방을 쓴다는 말에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무슨 생각은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러지 마라. 아직은 일러.”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일을 치를 생각은 없다. 재수 없으면 미망인 하나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전쟁터에서 남편 잃은 여자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니 그런 일을 섣불리 벌일 수는 없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확신하는 것은 그저 오만함일 뿐이니.
“알았어요.”
“응석 부리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그 이상은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면…알았지?”
“…저도 있습니다.”
“그래.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니…”
그렇다고 목경이 째려보진 말고. 목경이도 어색해하잖아. 나는 혜령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곤 허창을 향해 나아갔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도착해야 숙소를 구할 수 있을 테니.
“자, 가자.”
두 사람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람이 엄청 많아요!”
“하남의 물류가 모이는 곳이니까.”
“무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적은 걸 보니, 이 근처에는 무가가 없는 모양입니다.”
목경이의 말대로, 길거리에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무림인이 이곳에 올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인가.
보이는 무인들도 대부분 상인의 호위무사들뿐이니, 우리 같은 무인은 이곳에 올 일이 별로 없다고 봐야 했다.
“…여기 물가가 일반적인 무림인은 못 견뎌.”
우리는 이런저런 일로 평범한 무림인치고는 부유한 편에 속하지만, 무림인이라는 게 유명한 세가의 자식이나 상가의 자식이 아니면 돈이 많을 수가 없는 직업.
세가의 경우도 지방 호족 출신이라 지주 노릇으로 돈을 벌든가, 아니면 아예 상단을 만들어서 그걸로 돈을 벌든가.
아니면 구파일방처럼 기부금을 받든가.
그래서 오대세가를 제외하면 정파가 돈이 많은 집단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범죄자 출신이 많은 사파쪽이나 아예 자체적으로 신도를 굴려 없는 돈도 쥐어짜 내는 마교에 비하면 낫기는 하겠지.
“저, 정말이네요. 여기 당호로가 무한보다 비싸요!”
“그걸 당호로를 보고 확인하는 너도 정말 어지간하구나.”
얼마나 단 음식에 미쳐있는 거야. 팽가에서 후식으로 내놓은 당과에도 눈을 빛내더니.
“하지만 당호로는 맛있단 말이에요.”
“알았으니까 일단 움직이자.”
“네에~”
우리는 계속해서 허창 시내를 돌아다녔다. 아쉬운 점은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사람이 붐비지 않는 객잔은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도 건물 외관이 화려한 게 노골적으로 부유한 사람만 받겠다는 의도가 엿보여서 우리는 점점 더 외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은공. 이대로 잘 곳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맞아요. 우리 노숙해야 하는 거 아니겠죠?”
“글쎄.”
나는 푹 눌러쓴 삿갓을 만지작거렸다.
내 생각이 맞고 일이 잘 처리됐다면, 이렇게 돌아다니기만 하는 게 제일 좋은 숙소를 구하는 방법일 텐데.
그렇게 생각한 찰나, 내 어깨에 왜소한 몸집의 남성이 살짝 부딪혔다.
“아이고 나으리. 죄송합니다. 쇤네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연스럽게 잡힌 손바닥. 손바닥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아이고, 나으리…감사합니다.”
남성은 곧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나는 그 상태로 인적이 드문 곧까지 이동한 다음, 조심스럽게 남성이 건넨 쪽지를 열어보았다.
“시로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하거든 죽어도 쉬지 아니하리로다(語不驚人死不休)…라. 뭔소리야?”
시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목경이가 쪽지의 내용을 해설해주었다.
“두보의 시입니다.”
“이 시랑 관련된 객잔을 찾으면 되는 건가.”
“아마 자미(子美)라는 이름을 쓰고 있을 듯합니다. 호나 이름을 객잔의 이름으로 쓰기엔 꺼림칙하니 말입니다.”
그런가?
나는 이런 건 잘 모르니까 목경이 말을 따르면 되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으니, 혜령이가 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저씨, 방금 그 사람은…”
“하오문이야.”
“하오문이요…?”
하오문이라는 말에 혜령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하오문이 나오니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당장 무한지부에 있는 지부장이 하오문주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을 테고, 하오문이 내 이동 경로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허창에 오면 알아서 숙소를 제공할 거라는 추측이었다.
…틀리면 아주 곤란해졌겠지만 맞았으니 된 게 아닐까.
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자미라는 이름이 붙은 객잔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객잔은 쪽지를 몰래 받은 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중심부에 있는 화려한 객잔보다는 덜해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객잔이었다.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위치기도 하고.
“여기서 묵는 거예요?”
“좋은 객잔이군요.”
“이래서 인맥이 중요한 거지.”
사람이 많지만, 자리 몇 개 정도는 있는 객잔. 적당히 붐비는 객잔 구석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조용히 다가오는 점소이…가 아닌 객잔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을 쳐다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사자검협이십니까…?”
“맞는데.”
“안내를 받으신 모양입니다.”
“아, 그렇지.”
나는 쪽지를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는 그 쪽지를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비용은 하오문주께서 내셨으니, 일이 벌어질 때까지 푹 쉬시면 됩니다.”
“통이 크시군.”
“고용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귀한 분에게 대접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좀 더 좋은 곳으로 모셨을 겁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다행입니다. 그럼 식사를 차려드릴 테니 드시고 나면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맙게 받지.”
“그럼…”
객잔 주인이 떠나가고, 점소이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양도 질도 훌륭한 요리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
허창에서의 나날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외출을 삼가하는 것도 있었지만, 방 안에서 명상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얻은 경험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쓰느라 바쁜 것도 있었다.
삼보검결.
무한에서 하남까지 경공을 쓰며 얻은 시행착오.
태허진인이 내린 가르침을 검술에 녹여내는 것.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작업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방 구석에서 명상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니면 자미객잔 지하에 숨겨진 공간에서 애들과 비무를 하거나.
“아저씨 너무 강해요!”
“그야 경지 차이가 펭귄과 독수리만큼 벌어져 있으니 당연하지.”
“그 펭귄이 뭔데 저한테 붙이는 거예요?!”
사진이 있었다면 바로 보여줬을 텐데. 나는 팔을 파닥이며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혜령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귀엽게 생긴 놈 있어.”
“귀엽게…”
얼굴 녹는 거 봐라.
나는 헤실거리는 혜령이를 내버려 두고 목경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경아. 다음은 너다.”
“연전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별로 안 힘드니까 괜찮다.”
혜령이가 아무리 또래보다 실력이 좋다지만 기껏해야 일류. 요 근래 나와 비무를 하면서 실력이 꽤 좋아졌다지만 나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당장 혜령이 수준의 무인 백 명이 달려들어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게 초절정이니까. 괜히 무림에서 초절정의 무인들에게 거창한 별호를 달아주는 게 아니다.
“혜령아. 저기 구석에 가서 웃고 있으렴.”
“네!”
혜령이는 산뜻한 걸음걸이로 구석으로 이동했다.
나와 목경이는 비무를 시작할 환경이 갖춰지자 서로를 향해 포권을 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한 수 가르쳐주지.”
초절정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은 자와 넘지 못한 자.
나와 목경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에피소드 주인공 일행 이동거리가 한반도 직선거리로 찍고오는 수준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