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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1

        괴상한 꿈을 꾸었다.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는 강산 너머로 어스름한 노을이 비친다.

       

        수평선 위로 시커먼 불기둥이 담배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중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태양도 검은색이었다.

       

        [보라. 이것이 네가 쌓은 위업이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으로 어느 곳을 쫓아도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귀에다 대고 직접 말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앞으로, 나아가라.]

       

        명령적인 어조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나는 초석 냄새가 나는 들판을 걸었다. 곳곳에 시신이 쌓여 들판 전체가 구릉처럼 보였다.

       

        지평선 너머로 다가갈수록 불기둥과도 가까워진다. 몸을 불사르는 듯한 열감이 올라왔다.

       

       한 걸음씩 내딛을수록 시체의 숫자도 늘어났다. 종족은 통일되지 않았다. 인간, 엘프, 수인, 금안족… 그리고 정령들까지.

       

        하늘의 색이 점차 변했다. 처음엔 검었다가, 새빨갛게 바뀌었다. 이내 희뿌옇게 일그러지더니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게 되었다.

       

        가로등 없는 한밤중 골목길을 걷는 듯 캄캄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불타 없어지고 있는 건물들이 하나, 둘, 셋.

       

       백, 이백, 삼백….

       

        상가, 주택가 할 것 없이 모든 건축물이 대지진을 만난 것처럼 휘청거리며 무너진다. 사람은 없었으나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 굉음이 시끄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평온하고, 레코드를 긁어서 듣는 교향곡처럼 진득하니….

       

        시간을 따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대로변이 나타났다. 길을 따라 시선을 쫓았다.

       

        대로변 끝을 장식하는 한 대학 정문에서 녹슨 간판이 홀로 덜렁거린다. 풍파를 맞은 것처럼 다 부서져 가는 머릿돌에는 흐릿한 글씨가 하나 남아있었다.

       

        ‘틸레트.’

       

        [이것을 보임이 너의 다음 과업이다.]

       

        “…….”

       

        헛숨을 삼키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지 같은 꿈에서 깨어났을 땐 로테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자는 내내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던데….”

        “별일 아냐. 그냥 조금, 악몽을 꿨어.”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힘든 노동을 한 것처럼 목 주변으로 비지땀이 흘렀다.

       

        “어떡해…. 병원 갈까?”

        “이 정도는 괜찮아.”

       

        나는 로테에게 슬쩍 웃어주었다.

       

       잠을 자고 나면 두통이 말끔하게 나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머리가 아릿하다.

       

        그나마 어제보단 나아졌다는 점이 위안거리였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에는 하도 어지러워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을 정도였으니까.

       

        “단순 몸살이라도 걸렸나 봐.”

        “그러면 안 괜찮은 거잖아!”

       

        로테는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었다.

       

        “기다리고 있어. 세피아 선생님께 약 타올 테니까.” 

       

        그러더니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저러니까 쟤가 내 엄마 같네.

       

        “자, 가져왔어!”

       

        쏜살같이 달려갔다가 금세 돌아온 로테가 약 봉투를 내민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알약이 얇은 봉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새다. 동네 내과에서 처방해 주는 감기약처럼 생겼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한숨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는 사람은 로테가 처음이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어쩐지 봉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가시는 듯하다. 

       

        “어디 보자. 하루 세 번 식후 30분마다 먹으라고 하셨거든?”

       

        꼬르륵.

       

        밥 얘기를 들으니까 굶주려있던 뱃속이 아우성을 지른다.

       

        “그러고 보니…. 어제 하교하고 나서 아무것도 안 먹었네.”

       

        소모한 에너지는 많았는데 보충한 건 없었다. 그나마 생수 몇 모금 마신 게 전부일까. 미네랄과 수분 말고는 섭취한 게 없다는 의미다.

       

        배고프다. 과장 좀 보태서 아사할 판이다.

       

        “이 시간에 구내식당 하려나?”

        “지금 12시 넘었는데?”

        “뭐…?”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한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그렇게나 퍼질러 잤다고? 하루 평균 3시간 수면을 유지하던 이 몸이?

       

        “오전에 도서관 가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학기 중엔 하루에 하나 마법 이론을 새로 익힌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못 지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 어제부터 컨디션 안 좋아 보였어. 그런데 도서관은 무슨 도서관이야? 다른 거 하지 말고 이번 주말은 푹 쉬자.”

        “하지만 할 게 많은데….”

       

        마도학 공부에, 수소폭탄 연구 진척에, 버멜 위치도 확인해야 하고 플레어 소형화도 해야 한다.

       

        이러니까 과제에 찌들어 살았던 옛날 시절이 생각난다. 역시 여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 같으니까.

       

        일단 끼니부터 해결하기 위해 구내식당에 도착했다.

       

        마법이라는 편리한 개념이 있다 보니 키오스크 같은 것이 있어서 편하게 식권을 예매할 수 있었다. 물론 전기로 돌아가는 기계는 아니다.

       

        금화 두 닢을 넣고 기다리자 안쪽에서 철컥거리며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뭔 놈의 음식 가격이 이리 비싸? 스프 하나에만 은화 두 장이 말이 돼?”

        “요새 물가가 이렇다는 건 알잖아.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돌림병 이후로 나라 재정이 바닥난 모양이더라고.”

       

        살인귀가 된 수도의 인플레이션은 이미 몇 번이고 체감했다.

       

        2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화 하나로 살 수 있던 물건이 은화 단위로 바뀌더니, 이제는 금화를 내고도 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음식 같은 생필품이야 학교에서 출혈을 감수하고 대신 일부 비용을 내주고 있다. 이마저도 너무 비싸서 학생들이 식당으로 찾아오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로테가 돈 좀 만지는 집안 자식이고, 내가 이사장에게 빨대 꽂고 학교 다니니 이 정도지. 평범한 서민들은 이 살인적인 물가에 메말라가는 중이었다.

       

        “황성에서는 뭐 안 한대?”

        “아르가나 공작님 주도로 화폐개혁을 하자는 상소가 올라갔나 봐. 잘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렇다는 말은….”

        “화폐개혁이 시행되면 금화나 은화가 다른 걸로 바뀔 수 있다는 거지. 예를 들어 엘프들이 쓰는 지폐라든가.” 

        “그게 가장 무난하긴 해.”

       

        경제 부문은 문외한이니 그러려니 한다. 잘 될진 모르겠지만, 일을 벌이려는 아르가나 공작이 이사장과 같은 편이니 별 탈 없기를 바라야지.

       

       …잘못하면 버멜 말대로 의회파 전체 모가지가 날아가 버리려나? 

       

       뭐, 그건 내일 오후에 알아보기로 하자. 엘프놈이 어디로 갔는지는 대강 유추가 되니 말이다.

       

        식사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와 로테는 트레이에 따끈따끈한 스프와 빵, 그리고 스테이크 한 점을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식사하러 오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요샌 재료만 사다가 직접 조리해서 먹는 애들이 과반이라고 한다.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뭔가 허전하네. 예전에는 조금 더 복작거렸는데.”

       

        1학기, 그러니까 흑사병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구내식당에는 발 한 번 들이기 힘들었다. 

       

        “아, 아깝네. 이거 돈 아껴서 연구비로 쓰면 좋을 텐데.”

        “먹는 거에 그렇게 인색하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든든하게 먹고 다녀.”

       

        아, 눈물 나네. 이런 건 부모님도 안 해주던 말인데.

       

        처음 이곳에서 로테와 같이 밥을 먹었을 때가 떠오른다. 푸석한 호밀빵 대신 크루아상을 베어 물었을 때 느꼈던 식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땐 정말이지, 혀가 설탕과 함께 사르르 녹는 줄 알았는데.

       

        스프는 또 어땠는가? 묽은 옥수수죽 대신 파슬리와 양송이가 얹어진 고기 스튜를 수저로 훑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게 엊그제 같았다.

       

        이젠 그런 식사가 일상이 되었다. 나도 참 진득하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은 채 볶은 콩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포크를 살살 흔들었다.

       

        “로테.”

        “응?”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내 친구.

       

        “이번에 일리야드 아카데미로 교환학생 신청하러 가는 거 있잖아.”

        “그런데?”

        “거기에 네가 지원하면 어떨까 싶은데.”

       

        로테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쪽에 가면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번 학기는 너랑 여러 가지 같이 하기로 했잖아. 아버지랑 약속한 새로운 마법 개발은 언제부터 시작할 건데?”

       

        내 후견인이 되어준 건 로베스피에르 이사장만이 아니다.

       

        독자적으로 우라늄 원석의 쓰임새를 연구하고 있던 살리에르 백작도 나에게 로테와의 공동 연구를 부탁했다. 어차피 핵무기 연구의 일환이라 마왕 잡으려면 해야만 한다.

       

        – 잘 들어. 마왕 못 잡으면 우리 둘 다 지구로 못 돌아가. 그게 메인 퀘스트야. 

       

        …걔가 그런 소리만 안 했어도 차일피일 뒤로 미루는 거였는데.

       

        “잘 먹었습니다.”

       

       가벼워진 쟁반을 들고 퇴식구로 향한다. 정수로 가볍게 목을 축인 뒤 나는 로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으로 가는 시늉을 했다.

       

        “글쎄, 몸 괜찮아질 때까진 쉬라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말해 봐.”

        “조금 전 말한 교환학생 신청해 줘.”

        “후우, 알았다니까. 제대로 된 연구는 겨울방학 뒤부터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아니.”

       

        내가 고개를 내젓자 그럼 뭐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로테.

       

        “가기 전에 끝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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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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