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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1

       며칠 후.

        이자젤의 등쌀에 떠밀린 나는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엔과 함께 세계선에서 나와 오랜만에 원탁회에 참석했다.

        본래 내 차례가 아니었으나 신혼생활을 즐기는 동안 독박참석을 해야 했던 스피카 관의 사감이 벼르고 있던 탓에 그의 대타로 들어온 것이었다.

        거 남의 기숙사 좀 대신 관리해준 것 가지고 유세 떨기는.

        물론 나는 지금껏 스피카 관의 문틈도 밟아본 적 없었다.

       

        “보고서 215페이지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선의 외부 세력 침입 조사 및 비 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정보 2과의 조사 내용은 아직까지 별다른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론이며…….”

       

        고루한 회의는 여전했지만 바로 앞자리에서 발표하는 시엔의 틈에 숨어 몰래 위치노트를 꺼내볼 수 있었으니 이득이었다.

        정보부의 정복을 빼어입은 뒤태를 보고 있자면 골반에 비스듬히 걸쳐둔 세검을 따라 점점 아래로 이동했다.

        이제 보니 아킬레스건도 나름의 예술성이 있군.

        신발 뒤축과 바짓단 사이로 드러난 절대영역이 당장이라도 크게 한 입 베어물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가.

       

        그러나 그 원초적인 끌림을 참고자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회의장 바닥에 누으려던 나의 행동은 예상치 못한 방해로 저지되었다.

        정보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치안부, 지금은 치안부장으로 승격한 첸돌 탓이었다.

       

        “향후에도 30층의 소유권이 확정되어 결계가 복구될 때까지 지속적인 관찰을…….”

        “이해하기 어렵군. 그럼 보고서에 써 있는 대로 정보 2과가 머물렀던 아스트로 학파의 관측대 근처에서 발생한 마력 파동의 원인은 어째서 기재하지 않았지?”

        “해당 건은 정보 2과의 임무와는 관련이 없는 정령술사의 마법이었습니다. 단발성으로 일대가 공백지대가 되어 이후 피해도 없었고요.”

        “그럼 왜 그곳에서 임무를 계속 수행했나? 자네가 말한대로 주변에는 미티어 학파밖에 없어서 조사할 건덕지가 남아있지 않았을 텐데.”

        “기밀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고개를 젓는 시엔.

        정보부의 기밀 임무는 행정부 의장의 승인이 있어야만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

        현재 의장은 베이커이고 그는 천문학파 소속이니 첸돌이 칠현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만이 있다는 듯 책상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잘난 첩보활동이 세계선의 질서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최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원탁회가 술렁이며 도처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첸돌은 엔으로부터 가면 하나를 받아들고 단상 위에서 들어올렸다.

        세계선에서 갤러리 유저 측을 식별하기 위해 부엉이와 뇌절이가 배포한 물건이었다.

       

        “얼마 전부터 세계선에 정체불명의 세력이 들어와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학파를 불문하고 그 수는 빠르게 늘어 혹자는 검은별의 뒤를 이을 ‘황금별’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지.”

        “과장이 심하십니다 첸돌 경. 조사 결과 지금까지 소속이 확인된 마법사들은 전부 마탑 내부의 인물들로 그들의 자유로운 참전을 막을 권한은 없습니다.”

        “부르봉 자네는 그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재질도 그렇고 절대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공역,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상층의 자원으로 제작된 물건이지. 갤러리의 수뇌부가 이 ‘개추가면’을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은 최소한…….”

        “개추, 푸흡!”

        “…….”

        “아, 죄송합니다. 계속하시죠.”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려 버렸다.

        그러자 마치 봇물이 터지듯 헛기침으로 애써 입가를 가리던 다른 이들도 조금씩 입꼬리를 올렸다.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지자 첸돌은 주먹으로 단상을 내리쳤다.

        그의 굳은 표정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자네들은 도대체 생각이란 게 없는 건가? 지금 마탑의 영토가 갤러리의 관리자 손에 넘어가게 생겼단 말일세!”

        “…….”

        “…….”

       

        그의 말대로, 세계선은 현재 개추가면을 쓴 마법사들이 반쯤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어 의아해했던 마법사들도 점점 자신들이 밀리기 시작하자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몇몇 학파의 미적지근한 대응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주도권을 상실해 버렸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첸돌 경, 현실적으로 그들을 몰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계선은 하층이지 않습니까. 공역처럼 가치 있는 재화가 쌓인 곳이면 모를까 중층 이상의 마법사들을 끌어다 쓸 만큼 매력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에 반해 황금별 소속 마법사 중 몇몇은 최소 상층 이상의 위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니 전력 차이가 심하죠.”

        “그렇다고 거기에 치안대를 보내겠습니까? 그건 그거대로 행정부가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다른 학파에서 반발할 텐데요.”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은 공문을 돌려 그 집단의 가입을 막는 게 최선의 수인 듯합니다.”

        “큭…….”

       

        좌절한 첸돌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샬롯과 엔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녀들의 시선을 받은 걸로 착각한 시엔이 슬쩍 고개를 피했으나 실상은 뒤에서 위치노트를 하던 나와 눈이 마주친 거였다.

        나 때문에 세계선의 결계가 파괴되었으니 결국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내 탓이라는 건가?

       

        억울하군, 애초에 그 누명은 이미 대학원생 신분과 함께 기숙사 지하의 이불 빨래용 세탁기에 넣고 깨끗이 돌려 버렸다.

       

        치안부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 했으나 대부분의 간부진들이 쉬쉬하여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회의는 종료되었다.

        딱히 그들이 겁이 많아서라든가, 갤러리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로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종의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고나 할까.

       

        “개추가면 팔아요! 정품은 아니고 가품이지만 품질은 똑같아요!”

        “세계선이 완전히 정복되면 주딱을 볼 수 있다던데 진짜야?”

        “몰라, 근데 이거 쓰고 가면 아무도 공격 안 해서 좋대.”

        “디자인도 자세히 보면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하나 살까?”

       

        이게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훤히 보이는 광경이었다.

        사실상 인싸들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각종 악세사리와 굿즈가 쏟아지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주딱이 복귀를 넘어 현실에 강림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그 기대치는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학파를 불문하고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금지하며 잡아넣을 수도 없는 것이 잘못하다가는 이런 사람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었다.

       

        “개추에요.”

        “네?”

        “개추에요, 사감.”

       

        근신을 끝내고 오랜만에 나타난 비나가 가면을 쓴 채 요상한 인사를 건넸다.

        지난 학기 호평일색이었던 극마법 수업을 다시 열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풀어줬노라 크리스티나가 말했건만, 전혀 성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가품을 샀는지 앞이 제대로 안 보여 벽을 향해 돌진하는 비나를 붙잡고 여분으로 구비해둔 진짜 가면을 씌워 주었다.

        검고 부드러운 면장갑에서는 여전히 좋은 향이 났다.

       

        “오랜만입니다 비나 님.”

        “개추…….”

        “그간 무탈하셨나요?”

        “개 추웠어요. 다시는 거기로 끌려가지 않을 거에요.”

        “그렇군요. 오늘 일정은 있으신가요?”

        “강의가 끝나면 세계선에 갈 예정이에요. 이걸 쓰고 공을 세우면 갤러리에서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다행히 니플헤이르는 말괄량이 막내의 일탈을 막을 정도로 30층에 관심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으니 무리하진 마세요.” 

        “사감은 같이 안 가나요? 필요하다면 제 것을 줄게요.”

        “으음, 일단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실 파딱들로부터 ‘슬슬 준비가 되었으니 올라오시죠’라든지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투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마탑의 행정부도 손쓸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안전 역시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가면 뒤에 숨어 누구에게도 정체를 드러낸 적 없는 이른바 샤이 분탕.

        내 복귀를 열렬히 기대 중인 갤러리 유저들 앞에 서서 딱히 해줄 말도 없었다.

       

        “비나 님이라면 뭐라고 말하시겠어요? 만약 전능한 존재가 되어 마탑의 모든 사람들에게 딱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메테오는 얼음…….”

        “그거 빼고요.”

        “…….”

       

        역시 별 생각 없나.

        실망하고 돌아가려던 차에, 비나가 입을 열었다.

       

        “마법은 신비로운 것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저희 마법사는 그 힘을 거머쥘 기회를 타고났으면서도, 신비를 재단하여 편협한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고요.”

       

        마치 가면 너머로 보이는 좁은 시야처럼.

        앞을 응시하며 그녀는 말했다.

       

        “저라면 사고에 얽매이지 말고 조금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애초에 제가 하층까지 내려온 이유도 학파의 적통성에서 벗어난 마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고요.”

        “메테오가 얼음마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나요?”

        “그건 비율로 따지자면 겨우 96%에 지나지 않아요.”

        “…….”

        “사감은 어떤가요? 무엇을 위해 마탑에 들어왔죠?”

       

        이곳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아니, 정확히는 탑을 부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고 마법사들의 눈을 대륙 전체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는 꼭대기까지 올라가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

        너희가 추구하는 신비는 결코 밤하늘 위에 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저 탑의 마지막 층에 있는 것은 전지(全知)나 전능(全能)을 품은 보물 따위가 아니라, 그저 과거부터 쭉 잠들어 있던 누군가라는 것을.

       

        “가봐야겠네요.”

        “앗, 사감 그 전에 한 가지…….”

        “좀 급해서요. 그럼 수업 때 뵙겠습니다.”

       

        나는 비나에게 인사하고 30층의 포탈로 향했다.

        가면을 쓰고 입장하자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수많은 인파가 산맥에 모여 있었다.

        하층에 있는 거의 모든 마법사가 모인 것 같은 거대한 구덩이는 일전에 정령학파의 칠현자가 산을 옮겨버린 지형이었다.

        그 위에서 올려다 보이는 아스트로 학파의 관측대 뒤편에는 어느샌가 자라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반쯤 뒤덮고 있었다.

       

        저렇게 빨리 큰다는 말은 안했잖아. 정말 육아에 재능이 있었던 건가?

        속으로 이자젤을 떠올리며 부엉이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즉각 답신이 도착했다.

        금방 데리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잠시 후, 절벽 위에서 나풀거리는 로브를 입은 녀석이 내려왔다.

       

        “어때 주딱? 주딱이 말한대로 싹 청소해놨어. 저 아래 모여있는 것들은 신경쓰지 마, 주딱이 누군지 얼굴이나 한 번 보려는 거니까.”

        “…….”

        “시, 싫으면 치울까? 그냥 내가 대공 하나만 불러내도 쓸려갈 텐데.”

        “됐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나는 부엉이의 안내를 받아 모두가 보이는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가면을 쓴 당축이, 뇌절이, 마리엘, 그리고 ‘저는 평범한 나무 관리인입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건 이자젤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나는 천천히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모든 파딱들이 나를 중심으로 한 발자국 뒤에 서 있자 사람들도 이내 위를 올려다 보았다.

       

        “뭐야, 설마 진짜 나온 거야?”

        “미친…… 저 사람이 갤러리의 주딱이라고?”

        “일단 남자에 키가 크고 머리는 검은색, 마력량은 근처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데…….”

        “멍청아, 인식저해 마법일 게 뻔한데 저 모습을 믿냐?”

        “꺄아아아악! 주딱이다!!”

        “개추! 개추! 개추! 개추!”

       

        혼란과 놀람, 그리고 기쁨이 혼재된 콘서트장 같은 광경이었다.

        마법으로 공격할까 망설이는 이들과 외부로 급하게 연락을 돌리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것도 잠시, 코웃음을 친 뇌절이가 하늘을 향해 손짓하자 벼락과 함께 모든 수정구가 파괴되었다.

       

        “말해라 주딱. 모두가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얘네 그냥 갤창인생 살던 애들 아니었나?

        이제 보니 좀 강한 것 같은데.

        그래도 곧 거의 모든 층에서 몰려올 마법사들을 상대할 정도는 아닐 테니 빠르게 할 말만 하고 빠지는 게 좋겠지.

       

        “으음…….”

        “뭐, 뭔가 말한다……!”

        “주딱! 주딱! 주딱! 주딱! 주딱!”

        “분탕의 신! 분탕의 신! 분탕의 신! 분탕의 신! 분탕의 신!”

        “초전도체은발미소녀님살려내!”

       

        이름이 연호될 때마다 저주명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면을 고쳐쓰고 목을 풀었다.

        4대 재앙을 쓰러뜨리고 마탑에 들어와, 갤러리의 주인이 되어 중층까지 올라온 지금.

        저들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

        “사실 이 탑에 숨겨진 비밀은…….”

       

        비밀은?

        비밀이 뭐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가면을 살짝 들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입니다.”

        “뭐?”

        “뭐라고 했어?”

        “으음,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 들렸나 보군요. 더 위로 올라오시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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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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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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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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