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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2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어제… 그러니까 일요일에 버멜을 찾아 아카데미 내부를 이 잡듯 뒤져 보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걸 알아차린 로테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걸 대가로 로테를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교환학생으로 보낼 수 있으니 다행이다.

       

        하루 이틀 늦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오늘 수업 끝나고 이사장실로 찾아갈 예정이다.

       

        “얘들아. 주말은 잘 보냈니?”

       

        헤를라인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아뇨.

       

        “한 주의 첫날부터 너희에게 알려줘야 할 소식이 하나 있어. 다들 놀라지 말고 들으렴.”

       

       그 소식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귀가 쫑긋 세워진다. 

       

        “호르데 군이 자퇴했단다.”

       

       헤를라인 선생님의 폭탄 선언에 나와 친구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 새끼 튀었다고? 진짜로?

       

        “버멜이 학교를 떠나요? 왜요?”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말했단다.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는 말 전해달래.”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 뭔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해. 하다못해 귀띔이라도 남겨주던가.

       

       

       나와 그런 약속한 지 몇 개월 지났다고 벌써 어기냐고.

       

        비록 버멜과는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지구인이고 한국인이다.

       

       

       우리 둘 다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를 필요로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나에게 귀띔조차 해 주지 않고 꽁무니를 뺐다는 건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나 마찬가지.

       

       로즈마리가 들어온 걸 보면 정삼참작하지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선이라는 게 있다.

       

       

       불안한 마음에 책상에 놓인 텀블러를 홀짝인다. 시럽을 탄 루왁 커피가 오늘따라 똥 맛으로 느껴진다.

       

        “아…. 안타깝게 됐네요. 엘프 유학생 분과는 꼭 한번 만나뵈고 싶었는데.”

       

        공작새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처럼 부채를 흔들던 로즈마리는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주 약간의 가식이 남아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몇 번이고 되짚어 봐도 이해가 안 간다.

       

       동업하자고 처음 얘기했을 때 단독 행동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정도는 주고 움직이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 그리고 얘들아. 오늘은 공지가 하나 더 있어.” 

       

       

       터억.

       

       

       이리저리 어지러진 생각을 정리하던 중 헤를라인 선생님이 두꺼운 종이 한 묶음을 교탁 위로 떨어뜨렸다.

       

        “2학기부턴 선생님들이 너희 진로에도 신경을 써야 하거든. 이건 그 설문지야. 크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오늘 하교할 때까지 써서 제출하렴.” 

       

        그러면서 헤를라인은 맨 앞줄에 있던 나에게 손짓했다.

       

        “에테르가 받아서 뒤쪽에 전달하렴.” 

       

        가장 위에 놓인 설문지를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이름과 학번을 적는 칸에 연한 색 연필로 무언가가 이미 적혀있다.

       

        [끝나고 교양관 지하실로 올 것.]

       

        맨 앞장을 가지고 나머지를 뒤로 넘겼다. 바로 뒤에는 로즈마리가 있었다.

       

        재빨리 지우개를 꺼내 문구를 지우고 포인트 펜으로 내 이름 석 자를 써넣었다.

       

        종이를 못 받은 사람이 없는지 헤를라인이 확인하는 동안 먼저 받은 아이들은 곧바로 몇 자 끄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귀찮은 거, 후딱 쓰고 내 버리자는 심산이다.

       

        “이런 걸 굳이 해야 하나….”

       

       그런 급우들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로즈마리가 종이를 팔랑거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당연하죠, 공녀님.”

       

       로테가 로즈마리에게 그 이유를 친절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로 탐색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해요. 아카데미 졸업하면 뭘 하고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니까요. 단순히 학교 이름만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답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풍조가 있긴 하다.

       

        대학 네임벨류만으로 좋은 직장을 얻는 세상은 지났지. 애당초 좋은 직장이 무엇인지는 감도 안 잡히지만.

       

        …어디 보자.

       

        설문지는 크게 두 문항으로 나뉘었다. 

       

        [1. 졸업 후 희망하는 직업군]

        [2. 구체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뿐이구나.

       

        지구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더라면 척척 써냈겠지. 아니, 아니다. 지구에서는 그 목표를 웬만큼 이루었으니 쓸 것도 없다. 그 상태에서 여기로 끌려왔으니 복장이 안 터지나. 내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갔는데….

       

        어떤 변명거리를 써야 하나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썼다!”

       

        의외로 제일 먼저 펜을 내려놓은 건 프레이였다. 뭘 써야 할지 고민하던 급우들이 하나둘 그녀 곁으로 모여들었다.

       

        “뭐라고 썼는데?”

        “히히. 안 알려주지롱.”

       

        프레이는 종이를 접어 책상 아래로 넣었다. 불길한 기운이 든 건 다음 순간이었다.

       

        “급우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거라도 되시나요?”

       

        육감은 틀리는 법이 없구나. 로즈마리가 피식 웃으며 프레이를 쪼아댔다. 

       

        로즈마리의 도발에 제대로 걸려든 프레이는 살쾡이처럼 갸르릉거리며 로즈마리를 쏘아보았다.

       

        “야! 넌 또 왜 갑자기 시비야?”

        “저번 주에는 당신이 저한테 이랬잖아요. 뭐 잘못됐나요?”

        “흥이다.”

       

        프레이는 크게 화내는 일 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생각보다 성질을 많이 죽이고 있다. 제법 생각은 있다. 그래,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라니까.

       

        “어머. 고개 돌리는 것도 꼬맹이 같아요. 귀엽네요.”

        “너 진짜아아아!!”

       

        하지만 발작 버튼에는 인정사정없는 모양이다.

       

        “공녀라도 안 봐줄 거야!”

        “진정해, 프레이.” 

       

        슈퍼카 액셀을 밟은 것처럼 튀어 나가려는 프레이를 로테가 번쩍 들어서 제자리에 앉혀놓는다.

       

        씩씩거리던 프레이는 다시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대충 무슨 내용인고 하니, 세상 모든 종족을 평등하게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인간과 엘프를, 엘프와 수인을, 수인과 금안족을, 금안족과 정령을.

       

        아렌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대견하고, 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는 낯 뜨거운 포부다.

       

        “어라. 키 좀 크게 해주세요, 라고 쓰여 있을 줄 알았는데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 정도는 가려!” 

        “아니, 아니죠. 후흐. 이건 너무 거창한 거 아녜요?”

       

        로즈마리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 모든 종족이 어떻게 다 평등해요? 태생부터가 다른데.”

        “종족이 다른 게 뭔 상관인데!”

        “종족이 다르니까 그렇죠.”

        “그냥 너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얘기하지 그러냐?”

       

        프레이로서는 억울할 것이다.

       

        그녀가 속한 수인족은 예로부터 차별받아왔다. 단순히 인간의 몸에 귀와 꼬리만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짐승 냄새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야만적이라 불렸으며, 금안족처럼 생존권을 빼앗기고 상당수가 노예로 전락하길 수백 년이다. 그나마 엘프들이 기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라 숨통이 트여 망정이지.

       

        그중에서도 요호는 심할 것이다. 얘네는 실제로 약탈을 하니까. 인간과 부대끼며 살 때마다 서로 앙금만 남고 말았을 터.

       

        그러나 프레이는 그런 감정을 삭인 채 틸레트로 왔다고 했다.

       

        종족의 부흥을 위해. 요호의 문명화를 위해. 모두가 다 같은 지성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비록 커다란 모자로 자그마한 여우 귀를 숨기고, 드워프니 뭐니 컨셉질을 하지만 실상은 인간 하나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 여린 여우다.

       

        “잘 들어요, 꼬맹이. 인간 사회에도 귀족과 평민이라는 질서가 있듯이, 종족 사이에서도 질서와 위계가 있어요. 인간보다 수인이 열화된 종족이라는 건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 아닌가요?”

       

        성인이 되었어도 어린이처럼 천진함을 지닌 아이에게 꿈을 포기하라는 것만큼 나쁜 말이 없다.

       

        “저기요. 듣고 있어요?” 

       

        프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모자를 꾹 눌러쓰기 위해 어깨까지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니까 그건 지우고 조금 더 현실적인 걸 목표로…….”

       

        따악!

       

        “아얏!”

        “그쯤 하시죠, 블랜튼 공녀님.”

       

        딱밤을 맞은 로즈마리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는 얼굴도 아니다. 구천지대계답지 않은 얼빠진 상판이다.

       

        “언니…?”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로즈마리. 별로 세게 때리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시답잖은 연기를 하다니.

       

        표면상 그녀는 공녀고, 나는 일개 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즉 로즈마리는 이 건을 잡아 날 담가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위계’란 종족 간의 우열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일 테니까.

       

        “제아무리 공녀님이라도 반 친구를 놀리는 일에는 좋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니……. 역사를 보면 알잖아. 노예가 되는 종족과 노예를 부리는 종족은 늘 따로 있었어. 이상한 게 아니라고!”  

        “그러면 금안족은 수백 년간 노예처럼 굴려져 왔으니 열등한 종족이겠네.”

        “…….”

       

        조금 전 프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로즈마리도 입을 닫았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건 프레이와 로즈마리 둘 다 매한가지.

       

        우리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일방적으로 내가 로즈마리를 쏘아본 것에 가까웠지만.

       

        “…자자, 모두들 아침부터 화내지 말고.”

        “맞아요. 공녀님, 너무 나가셨어요. 프레이에게 사과해 주세요.” 

       

        박살이 난 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메이릴과 로테가 나선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이 있는 건지 이 레이시스트는 입을 우물거린다. 하는 짓이 저번 학기 클리온 황자와 판박이구나. 

       

        “그, 그…….”

       

        말을 쉽게 안 하려는 모양인데.

       

        안 되겠다.

       

        “잠깐. 공녀님 말대로 조금 더 해 보자고.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종족은 용이 되는 건가?”

       

        용이라는 말 한 마디에 로즈마리의 안색이 썩어들어 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순 얼굴에 드러났다. 보나 마나 1석을 생각하는 거겠지. 학기 끝나고 그녀에게 제어봉으로 후드려 맞는 자신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 전 발언은 그걸 노리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뒷이야기를 아는 건 나와 로즈마리 정도. 프레이조차도 감히 연관성을 찾진 못하겠지.

       

        “비웃어서 미안, 해요….”

       

        입술을 꾹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는 로즈마리.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

       

       

        더러운 수인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로즈마리는 이를 갈았다.

       

        ‘친구, 친구라….’

       

        억울하다. 큰 언니가 설마 자신이 아닌 건방진 요호족 꼬맹이의 편을 들어줄 줄이야.

       

        저 꼬맹이와 언니가 이리도 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기억을 잃어도 그렇지, 자신과 언니는 수 세기를 함께 한 사이인데. 멋모르는 애새끼한테 언니를 빼앗긴 것 같아 머리가 얼얼하다.

       

        ‘쉽겐 못 죽이겠어.’ 

       

        던전 실습 때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러면 문제가 한층 복잡해진다.

       

        가식적인 사과가 끝난 후 로즈마리는 펜을 부러질 듯 쥐었다. 책상 위에는 진로 탐색 설문지가 놓여 있다.

       

        물어보는 건 두 가지.

       

        1. 장래희망이 무엇이냐.

        2. 구체적으로 무얼 하고 싶으냐.

       

        진짜 목표를 적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대충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나라 한둘 멸망시켜 본 게 아니다. 이런 템플릿이야 몇 개씩 만들어두었다.

       

        그러다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언니는 뭐라고 적었을까?’

       

        로즈마리는 에테르의 등을 꾹꾹 누르며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화났어요?”  

        “…….” 

        “…언니?” 

        “아니.”

       

        ‘존나 화났다는 거잖아.’

       

        기억을 잃었건 잃지 않았건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제 언니는 화를 낼 때 말수가 줄어들고 차분해진다.

         

        “언니는 진로란에 뭐라고 썼어요?”

       

        로즈마리가 물었고.

       

        에테르는 아무 말 없이 뒤쪽으로 종이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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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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