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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2

     

    “다시 말해봐. 라스가 어디로 떠나?”

     

    “히엑, 히에에엑.”

     

    아셀라가 윽박지르자 클로에가 바닥에 큰절을 올리고는 벌벌 떨었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황실 주치의가 말도 안 하고 주군의 곁에서 떨어진다니, 전례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허가도 안 했는데 어딜 갔단 말이야!”

     

    “…외부 활동의 허가는 폐하께서 내리셨다고 합니다.”

     

    시녀장이 그녀에게 문서를 전했다. 틀림없이 천황궁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아셀라는 손에 힘을 주어 문서를 꾸깃 쥐어버리고는 팍, 그것을 던져버렸다.

     

    “잡아 와, 당장.”

     

    “황녀님…”

     

    “당장!”

     

    있는 대로 성을 내는 아셀라였지만 그 성질과는 다르게 숨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한계까지 활성화된 교감신경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지금 팔을 주사기로 찔러도 아셀라는 눈치 못 챌 터였다.

     

    눈을 뜰 때만 해도 당연히 라스가 옆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픈 다음 날은 항상 라스가 함께했으니까.

     

    최근에는 자주는 아니어도 동침도 하고 있었다.

     

    잠들며 그의 체온을 느끼고, 일어나며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자신 몰래 이 황실을 벗어나 외부로 나가다니.

     

    그와 만나고 그가 자신의 주치의가 된 후로, 처음으로 찾아온 완벽한 분리였다.

     

    라스가 절벽 밑으로 떨어졌을 때는 그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반나절 만에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가 그의 의지로 자신의 곁에 있기를 거부하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최소한 몇 달은 볼 수 없다.

     

    전처럼 일이 잘못되어 그가 죽을 위기에 처하든가, 진짜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걸어 다니며 피를 쏟는 남자인데.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아셀라를 덮쳐오며, 뇌세포의 시냅스 하나하나가 끈적한 타르에 잠겨 사고가 마비되어갔다.

     

    “잡아 와!!”

    앵무새처럼 그 명령을 반복하는 아셀라였다. 기사들로서는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호위기사가 단장에게 연락을 넣으려던 찰나였다.

     

    “아, 아, 안 돼요 전하…!”

     

    클로에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는 아셀라의 다리에 매달렸다.

     

    “너.”

     

    아셀라의 피가 차가워졌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악녀로 돌아온 분노 서린 얼굴이 죄 없는 간호사를 압박한다.

     

    “지금 일개 간호사가 궁의 주인이자 황녀인 내 결정에 토를 다는 것이냐.”

     

    “서, 선생님께서…! 중요한 일이시라고…!”

     

    “넌 공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모, 몰라요…. 기밀이라, 저는 남아야 하니까, 모르는 편이 낫겠다고…”

     

    아셀라가 작정하고 고문하면 클로에는 버티지 못하고 불 수밖에 없다.

     

    그런 사태를 대비해 라스는 클로에에게 행선지를 비밀로 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전하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입 다물어.”

     

    싸늘한 명령에 클로에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셀라는 당장에라도 클로에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지금 화가 난 건 라스에게다.

     

    클로에를 총알받이로 써봤자 감정이 하나도 풀리지 않을 건 분명할뿐더러.

     

    ‘보고, 싶은데.’

     

    라스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은 더더욱 해결될 리 없고, 오히려 갈증이 심해질 것이 분명했기에.

     

    머리가 멍해진다.

     

    시야가 좁아진다.

     

    자신이 이렇게 바보였나, 멍청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아무 사고가 흘러가지 않는다.

     

    터벅, 터벅.

     

    아셀라는 기사나 시종들의 눈도 신경 쓰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난 맨발 그대로 자신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습관처럼 바로 옆 방.

     

    라스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창문이 살짝 열린 그의 방은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혹시나 그곳에 그가 기다리고 있고, 질 나쁜 장난이 아니었을까 하는 기대도 무색하게 무너진다.

     

    그 한 가운데에 서서, 입을 다물고 잠깐 움직임을 멈춘 아셀라는 별안간.

     

    “…아아아아악!!”

     

    ―콰아앙!

     

    비명과 함께 마나를 터트렸다.

     

    정돈되어 있던 그의 방이 폭풍에 의해 아수라장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풀썩, 아셀라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닐 거야.”

     

    설마, 내가 싫어서.

     

    내가 미워서 나를 떠난 건…

     

    “아닐 거야.”

     

    아셀라가 힘없이 되뇌었다.

     

     

     

    ***

     

     

     

    “오라버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최북단으로 향할 준비를 마치니 네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머리를 톡톡 두들겨주니 반작용으로 볼이 뿅뿅 튀어나왔다.

     

    “원정이 길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보급로는 준비해두마. 맡겨두거라.”

     

    아버지의 서포트도 든든했다.

     

    아무리 길어도 두 달 안에는 끝내야 한다. 황실까지 돌아가고 아셀라를 수술할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 정도는 있어야 여유롭다.

     

    더 좋은 건 천둥족 족장과 협상이 하루 만에 끝나는 거고.

     

     

    [No. 101 : 마력폭주 24% → 27% ]

     

     

    아셀라의 상태는 이걸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정 위급해진다 싶으면 작전을 물리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나와 휴고만이라도 귀환할 예정이다.

     

    “그런데 라스, 그 전에 잠깐 괜찮겠느냐.”

     

    “예, 무슨 일이신지요.”

     

    아버지가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네가 개발한 친자확인 인증 말이다만.”

     

    “예.”

     

    “그… 우리 집안은 미리 확인 증명서를 발급해 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기묘한 질문에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아버지의 말을 곱씹은 후에, 내가 그에게 타박하듯 외쳤다.

     

    “저 주워온 자식이었습니까?”

     

    “아니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아버지가 당황하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다, 혹시 몰라서. 왜, 괜히 누가 악의를 가지고 시비를 걸 수도 있잖느냐.”

     

    “켕기는 게 없으면 시비가 걸려도 역으로 이용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게 말이다.”

     

    켕기는 게 있으시구만?

     

    “네가 성인도 됐고, 자식을 낳을 때 즈음 알려줄 이야기였다만.”

     

    아버지가 불안하게 포문을 열었다.

     

    “고트베르크의 핏줄에 전대 성녀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 한참 전이죠.”

     

    “라스 네게는 고조할머니가 되시는 분이다. 그분은 슬하에 자녀를 아들과 딸, 둘 가졌었다. 고트베르크는 그분의 아들에서 이어진 가문이다.”

     

    “그래서 신성력 재능은 어느 정도 타고난 편이지요.”

     

    “그렇단다. 다만, 딸 쪽도 명맥이 이어져 내려온 모양이다. 족보를 정리하다 알아보게 되었지. 다만 모계 쪽이다 보니 남의 가문이거나 평민인 경우도 있어서 모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성녀의 피가 옅어졌다거나 했습니까?”

     

    “음, 사실상 맥이 끊겼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게 네리아였다. 어미는 죽고 수도원에 맡겨지기 직전이었지.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흠.”

     

    덤덤하게 핵폭탄을 투하하는 아버지였다.

     

    “네리아는 이 사실을 압니까?”

     

    “갓난아기 때 데려왔기에 모르고 있단다. 당분간은 보호하기 위해 유모에게 맡아 기르게 했었다. 네리아는 그녀가 친모라고 믿고 있단다.”

     

    “이거 원.”

     

    아버지의 말대로면 아버지와 네리아는 멀고 먼 친척,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니 친자검사에서 불일치가 나오고 만다.

     

    나와 네리아는 이복남매가 아니라 유전 상으로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고트베르크의 가문에 있어서는 상당한 약점이다.

     

    물론 내가 아니면 아무도 밝혀낼 수 없는 비밀이겠지만.

     

    “그래도 네리아는 제 여동생이죠.”

     

    “물론이다. 나도 친딸로 생각한다.”

     

    아버지와 내가 동의했다.

     

    뭐, 아버지가 평생 어머니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신뢰가 가네.

     

     

    그래도 이번엔 재능을 각성하지 않았으니 네리아가 성녀가 될 일은 없을 터다.

     

    저 나이에 벌써 사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경제 쪽에 감각이 있지 싶다.

     

    장차 가문을 맡는 게 좋겠지.

     

    흠, 그럼 이번 대에 성녀는 누가 되려나.

     

    “그쪽 계보에서 찾아낸 건 네리아가 유일했습니까?”

     

    “딱 한 분 계셨다. 네가 아는 분이다. 내의원에 계시지.”

     

    “내의원에요?”

     

    “앰브로시아 자매님이 아마 네리아와 같은 항렬일 게다. 자세히는 나도 족보를 살펴봐야 하겠다만.”

     

    어쩐지 볼의 감촉이 비슷할 것 같더라.

     

    내 느낌이 틀릴 리가 없지.

     

    나와 아버지가 한참이나 쑥덕대고 있으니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오라버니, 아버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셔요?”

     

    네리아가 심심했는지 슬그머니 우리 사이에 조그마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다 끝났어. 다음 명절 때 친척 누구를 초대할까 하는 시시한 이야기야.”

     

    “그래요? 친척 가문 이야기는 별로 못 들어봐서 궁금해요!”

     

    “연락해봐야 괜히 선물 줄 곳이나 늘지 않겠어.”

     

    “오라버니는 선물 교환을 싫어하시는군요. 즐거운 일인데…”

     

    네리아가 난처한 태도로 조그마한 손에 꼼지락거리던 무언가를 호다닥 숨겼다.

     

    “네리아에겐 예외지. 어디 보자.”

     

    마침 제도산 초콜릿이 하나 앞주머니에 들어있었다. 포장을 까니 네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므응!”

     

    입에 쏘옥 넣어주니 얼굴에서 불안감은 날아가고 행복감이 가득 찬다.

     

    미래에서 성녀 일을 할 때는 늘 씁쓸한 미소만 짓곤 했었는데.

     

    네리아는 역시 위험한 전장보다 귀족가가 어울리는 타고난 아가씨지 싶다.

     

    “저도 오라버니께 드릴 게 있어요!”

     

    “뭔데?”

     

    “부정한 기운을 막아주는 부적이에요. 도움이 될까요?”

     

    네리아가 내게 조그마한 보석들이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직접 만든 건가.

     

    이걸 주려고 여태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는 부적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감동적인데, 항상 지니고 다닐게.”

     

    “헤헷, 네엣!”

     

     

     

    “준비됐습니다, 선생님.”

     

    타냐가 내게 보고했다.

     

    최근 소드마스터와 일대일로 대련을 나누고 오더니, 그녀의 몸가짐은 한층 예리하고 절도가 들어차 있었다.

     

    “어디 보자.”

     

    헤이케의 기사 이백. 열을 맞춘 모습이 보기 좋다.

     

    고트베르크 가문의 치유사 마흔.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고용되는 자유로운 모험가 네 개 파티, 스물.

     

    그리고 휴고를 선두로 한 내 파벌의 의사 열둘.

     

    이들을 지휘할 지휘관은 나였다.

     

    짧게 명령했다.

     

    “진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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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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