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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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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은 순수하다. 그렇기에 더욱 잔혹하다. 마치 아이들의 순수함이 잔혹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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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모자이크 처리된 조수들을 외면한 채 얼빠진 표정으로 쓰러져있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유리 벽은 전부 없어진 상태였지만 기사를 억압하고 있는 밧줄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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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그의 앞에 주저앉아 마검을 단검 형태로 바꾸어 몸을 꽁꽁 묶고 있는 밧줄에 가져다 대자 기사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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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의 시선이 리안의 새하얀 머리카락과 영롱한 금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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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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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압하고 있는 대상의 마력을 잡아먹는 밧줄 형태의 마도구가 허무하게 잘려 나갔다. 발목에 묶여있는 줄까지 풀어내자 기사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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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꺄르르! ]
    [ 인간 고마워! ]
    [ 헤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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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에게 한껏 복수하고 돌아온 정령 일부가 리안의 어깨나 머리카락 근처를 날아다녔다. 몇몇 정령은 간지럽게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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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한 만큼 거칠게 장난을 치는 정령답지 않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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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예, 예!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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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정중한 목소리에 기사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시간 묶여있던 탓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돌아온 마력 덕분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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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여기에 잡혀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령들과 함께 내보내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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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가 강하긴 하지만 검과 갑옷까지 전부 뺏긴 상태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짐이 될지도 모르는 그를 데리고 다니는 것보단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령들을 데리고 밖으로 대피시키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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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야 무너뜨리기도 쉬울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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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 세계 주민다운 가치관과 다크 판타지의 잔인한 경험이 섞이니 파격적인 생각이 쉽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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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여…아니, 남자 보신 적 있나요?”
    “아, 크흠. 아뇨 저는 잡…히자마자 이곳으로 끌려와서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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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침울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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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끙,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하는데. 한 명 정도는 살려두라고 할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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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모자이크 처리된 조수를 흘긋 바라보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미 끝난 일을 붙잡고 있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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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노아를 찾아 떠나고자 기사에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주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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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봤어! 갈색 머리 녹색 눈 가진 인간! ]
    [ 나는 빨간 고양이 봤어 ]
    [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야! ]
    [ 아냐 인간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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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와 노아를 봤다는 말에 리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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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어디서 봤는데? 이 근처에 있어?”
    [ 으응, 아니! 쩌어기 멀리 있어! ]
    [ 이렇게 막 뻥 뚫려있는 대로 가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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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들을 수 없는 두루뭉술한 말에 리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머니’라는 말을 뱉었던 성숙한 정신을 가진 정령이 리안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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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들은 숲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
    “그게.. 여기서 보여?”
    [ 우리는 자연의 일부라서 가까운 거리라면 전부 볼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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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넓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정령들에게 연구소의 크기는 손톱보다 작은 크기였다. 연구소 내부를 훤히 내려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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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밖으로 빠져나갔구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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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표정이 확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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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제 탈출만 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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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출 직전에 마검으로 연구소를 무너뜨리기까지 하면 모든 일이 퍼펙트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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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밝은 표정으로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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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줘서 고마워. 이제 다들 여기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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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나서 방방 뛸 거라고 생각했던 정령들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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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돼요, 어머니가 아직 여기 계셔요. ]
    [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
    [ 엄마를 구할 때까지.. 우린 떠나지 않을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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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그제야 정령의 어머니를 붙잡아뒀다던 죽어버린 조수들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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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와서 얘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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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 고민하다가 결심을 내린 듯 시무룩한 정령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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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도와줄게. 너희 어머니가 어디 갇혀계신 줄 알아?”
    [ …! 응! 알고 있어! ]
    [ 우리의 힘이 약해지는 기분 나쁜 돌로 만들어진 방! ]
    [ 엄마가 울고 있어… 도와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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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이 전부 달라서 그런지 부탁하는 말투도 전부 달랐다. 귀여운 정령들의 모습에 슬며시 웃어 보인 후 기사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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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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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다정한 리안의 표정에 기사는 당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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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 모습은 전부 연기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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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을 떠올리게 만들던 위압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채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귀공자만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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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묘하게 불편하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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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각하의 핏줄을 이으신 분이 그럴 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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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한 감정이 씻겨지고 남은 공간에는 부푼 기대와 호감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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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님께선 정령들과 함께 먼저 밖으로 나가주시겠어요?”
    “예? 제가 기사인 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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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기사인 모습을 숨기기 위해 옷차림도 용병이나 다를 바 없었고, 지금은 검조차도 차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리안이 ‘기사’인걸 바로 눈치채자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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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씁… 실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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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으로 기사님이라고 부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말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싶어 리안이 머리를 빠르게 굴리려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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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훗, 그 정도야 간단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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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검은 뻐기듯이 기사에게서 보이는 여러 특징들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리안은 곧바로 마검의 말을 따라서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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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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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전보다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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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핏줄은 숨길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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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의 착각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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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혼자서 몸을 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기사님과 정령들까지 챙기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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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말을 조리 있게 하던 정령을 가리킨 후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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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이를 뺀 나머지 정령과 먼저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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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같아선 리안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고 싶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리안이 그보다 강한데다가 그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다. 짐만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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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리안은 무기라도 하나 들려 보내자는 생각에 한쪽에 마련된 서류 책상과 실험대를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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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용으로 보관하던 마도구와 검 한 자루를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검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날이 무뎌져 있었다. 없는 것보단 나았기에 기사는 검과 마도구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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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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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만한 물건이 없나 책장을 살펴보다가 꽂혀있던 책을 꺼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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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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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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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비상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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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 출구 벽 쪽에는 친절하게 안내까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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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통로 끝이 밖으로 나가는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가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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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로 빠져나가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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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개그 필터의 힘도 있었지만, 정령들이 시도 때도 없이 리안의 머리 위에 축복을 쏟아낸 덕분도 있었다. 네 잎 클로버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행운의 축복이 쌓이고 쌓여 큰 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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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바로 정령의 어머니를 찾아야 하니, 기사님은 이곳을 통해 빠져나가 주세요.”
    “예, 부디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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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는 제 주군에게 명령을 받은 것처럼 절도있게 인사를 건넨 후 수십의 정령들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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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이 저렇게 많으니 밖으로 나가는 데는 별문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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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시선을 돌려 제 어깨에 앉아있는 정령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령이 눈치 빠르게 날아올라 앞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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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쪽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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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정령의 뒤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지나자 고풍스러운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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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 안에 계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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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방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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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하지만… ]
    “이 안은 정령의 힘이 약해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 ..알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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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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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약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제가 막을게요. ]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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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부탁 없이 기다려달라고 하면 괴로워할 것 같아 정령의 말에 긍정한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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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풍스러운 문 만큼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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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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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문을 닫은 후 정령의 어머니를 찾고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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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기 있군. 꽤 재미있는 짓을 해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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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검이 칼날 끝으로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쪽을 가리켰다. 리안은 곧바로 창문가로 다가가 커튼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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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촤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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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끄아아아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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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튼을 치우자 귓가가 멍할 정도로 날 선 비명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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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대한 크기를 가진 여성체 정령이 몸을 뒤틀며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은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었다. 리안은 곧바로 저 정령이 정령의 어머니라는 걸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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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르간도아!’
    [ 후훗, 깔끔하게 잘라주지. ]
    ‘정령은 베면 안 돼!’
    [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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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럽게 내려선 검 끝이 사냥에 나선 포식자의 송곳니처럼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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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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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유리와 유리 단면을 문지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창문이 수십갈래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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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게 조각난 창문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리안과 마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령의 몸과 바닥을 고정하고 있는 쇠사슬까지 연속적으로 베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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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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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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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단단했는지 마검이 사슬을 베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마검이 푸화악! 하고 기운을 내뿜었다. 리안은 옷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마검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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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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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검이 호통치는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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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사슬이 창문처럼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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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륵, 촤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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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사슬 아랫부분이 조각나자 정령의 몸에 박혀있던 쇠사슬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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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하하! 이게 이 몸의 실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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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호탕하게 웃는 마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정령의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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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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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끝나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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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일, 죽일 거야! 전부, 전부 죽일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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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고문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정령의 어머니가 날뛰기 시작했다. 이성을 놓은 그녀는 인간을 모두 적으로 간주했고, 눈앞에 있는 리안 또한 적으로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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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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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마검처럼 뿜어내며 허공에 떠오른 정령의 어머니를 보며 목소리를 작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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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망, 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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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정령의 어머니…자애로운 만큼 마음도 넓은…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정령은 순수하다. 그렇기에 더욱 잔혹하다. 마치 아이들의 순수함이 잔혹한 것처럼.

리안은 모자이크 처리된 조수들을 외면한 채 얼빠진 표정으로 쓰러져있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유리 벽은 전부 없어진 상태였지만 기사를 억압하고 있는 밧줄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리안이 그의 앞에 주저앉아 마검을 단검 형태로 바꾸어 몸을 꽁꽁 묶고 있는 밧줄에 가져다 대자 기사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기사의 시선이 리안의 새하얀 머리카락과 영롱한 금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투두둑.

제압하고 있는 대상의 마력을 잡아먹는 밧줄 형태의 마도구가 허무하게 잘려 나갔다. 발목에 묶여있는 줄까지 풀어내자 기사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 꺄르르! ]

[ 인간 고마워! ]

[ 헤헤헤. ]

조수에게 한껏 복수하고 돌아온 정령 일부가 리안의 어깨나 머리카락 근처를 날아다녔다. 몇몇 정령은 간지럽게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순수한 만큼 거칠게 장난을 치는 정령답지 않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예, 예!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정중한 목소리에 기사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시간 묶여있던 탓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돌아온 마력 덕분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왜 여기에 잡혀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령들과 함께 내보내는 게 좋겠어.’

기사가 강하긴 하지만 검과 갑옷까지 전부 뺏긴 상태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짐이 될지도 모르는 그를 데리고 다니는 것보단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령들을 데리고 밖으로 대피시키는 게 나았다.

‘그래야 무너뜨리기도 쉬울 테고.’

개그 세계 주민다운 가치관과 다크 판타지의 잔인한 경험이 섞이니 파격적인 생각이 쉽게 떠올랐다.

“혹시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여…아니, 남자 보신 적 있나요?”

“아, 크흠. 아뇨 저는 잡…히자마자 이곳으로 끌려와서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리안이 침울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끙,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하는데. 한 명 정도는 살려두라고 할 걸 그랬나?’

리안은 모자이크 처리된 조수를 흘긋 바라보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미 끝난 일을 붙잡고 있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다시 노아를 찾아 떠나고자 기사에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주려는 순간.

[ 나 봤어! 갈색 머리 녹색 눈 가진 인간! ]

[ 나는 빨간 고양이 봤어 ]

[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야! ]

[ 아냐 인간이야! ]

제스와 노아를 봤다는 말에 리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어디서 봤는데? 이 근처에 있어?”

[ 으응, 아니! 쩌어기 멀리 있어! ]

[ 이렇게 막 뻥 뚫려있는 대로 가고 있어! ]

알아들을 수 없는 두루뭉술한 말에 리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머니’라는 말을 뱉었던 성숙한 정신을 가진 정령이 리안에게 다가왔다.

[ 인간들은 숲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

“그게.. 여기서 보여?”

[ 우리는 자연의 일부라서 가까운 거리라면 전부 볼 수 있어요. ]

드넓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정령들에게 연구소의 크기는 손톱보다 작은 크기였다. 연구소 내부를 훤히 내려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들 밖으로 빠져나갔구나! 다행이다!’

리안의 표정이 확 풀렸다.

‘그럼 이제 탈출만 하면 되겠네.’

탈출 직전에 마검으로 연구소를 무너뜨리기까지 하면 모든 일이 퍼펙트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리안은 밝은 표정으로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제 다들 여기서 나가자!”

신나서 방방 뛸 거라고 생각했던 정령들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 안돼요, 어머니가 아직 여기 계셔요. ]

[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

[ 엄마를 구할 때까지.. 우린 떠나지 않을거야. ]

리안은 그제야 정령의 어머니를 붙잡아뒀다던 죽어버린 조수들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와서 얘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순 없어.’

리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 고민하다가 결심을 내린 듯 시무룩한 정령에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너희 어머니가 어디 갇혀계신 줄 알아?”

[ …! 응! 알고 있어! ]

[ 우리의 힘이 약해지는 기분 나쁜 돌로 만들어진 방! ]

[ 엄마가 울고 있어… 도와줘… ]

성격이 전부 달라서 그런지 부탁하는 말투도 전부 달랐다. 귀여운 정령들의 모습에 슬며시 웃어 보인 후 기사를 돌아보았다.

“아.”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다정한 리안의 표정에 기사는 당황하고 말았다.

‘처음 그 모습은 전부 연기였단 말인가?’

공작을 떠올리게 만들던 위압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채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귀공자만이 그곳에 있었다.

기사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묘하게 불편하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역시 각하의 핏줄을 이으신 분이 그럴 리 없지.’

불편한 감정이 씻겨지고 남은 공간에는 부푼 기대와 호감이 가득 차올랐다.

“기사님께선 정령들과 함께 먼저 밖으로 나가주시겠어요?”

“예? 제가 기사인 건 어떻게…”

제국의 기사인 모습을 숨기기 위해 옷차림도 용병이나 다를 바 없었고, 지금은 검조차도 차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리안이 ‘기사’인걸 바로 눈치채자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아,씁… 실수했다…’

속으로 기사님이라고 부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말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싶어 리안이 머리를 빠르게 굴리려던 그때.

[ 훗, 그 정도야 간단하지 -… ]

‘…!’

마검은 뻐기듯이 기사에게서 보이는 여러 특징들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리안은 곧바로 마검의 말을 따라서 뱉어냈다.

“아…”

기사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전보다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역시 핏줄은 숨길 수가 없구나!’

기사의 착각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저 혼자서 몸을 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기사님과 정령들까지 챙기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

리안은 말을 조리 있게 하던 정령을 가리킨 후 말을 이었다.

“이 아이를 뺀 나머지 정령과 먼저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리안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고 싶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리안이 그보다 강한데다가 그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다. 짐만 될 뿐이었다.

이후 리안은 무기라도 하나 들려 보내자는 생각에 한쪽에 마련된 서류 책상과 실험대를 뒤적거렸다.

비상용으로 보관하던 마도구와 검 한 자루를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검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날이 무뎌져 있었다. 없는 것보단 나았기에 기사는 검과 마도구를 챙겼다.

“응?”

쓸만한 물건이 없나 책장을 살펴보다가 꽂혀있던 책을 꺼내니.

드르르륵.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오! 비상 출구!’

비상 출구 벽 쪽에는 친절하게 안내까지 적혀있었다.

정확히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통로 끝이 밖으로 나가는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가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여기로 빠져나가면 되겠네요!”

이는 개그 필터의 힘도 있었지만, 정령들이 시도 때도 없이 리안의 머리 위에 축복을 쏟아낸 덕분도 있었다. 네 잎 클로버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행운의 축복이 쌓이고 쌓여 큰 힘이 된 것이다.

“저는 바로 정령의 어머니를 찾아야 하니, 기사님은 이곳을 통해 빠져나가 주세요.”

“예, 부디 조심하십시오.”

기사는 제 주군에게 명령을 받은 것처럼 절도있게 인사를 건넨 후 수십의 정령들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령이 저렇게 많으니 밖으로 나가는 데는 별문제 없겠지.’

리안은 시선을 돌려 제 어깨에 앉아있는 정령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령이 눈치 빠르게 날아올라 앞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 이쪽이에요. ]

리안은 정령의 뒤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지나자 고풍스러운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여기 안에 계세요. ]

정령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방문을 바라보았다.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하지만… ]

“이 안은 정령의 힘이 약해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 ..알겠어요. ]

정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 만약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제가 막을게요. ]

“부탁할게.”

아무런 부탁 없이 기다려달라고 하면 괴로워할 것 같아 정령의 말에 긍정한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문 만큼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탁.

조용히 문을 닫은 후 정령의 어머니를 찾고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 있군. 꽤 재미있는 짓을 해놨어. ]

마검이 칼날 끝으로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쪽을 가리켰다. 리안은 곧바로 창문가로 다가가 커튼을 치웠다.

촤르륵.

“…!”

[ 끄아아아악! ]

커튼을 치우자 귓가가 멍할 정도로 날 선 비명이 들려왔다.

거대한 크기를 가진 여성체 정령이 몸을 뒤틀며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은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었다. 리안은 곧바로 저 정령이 정령의 어머니라는 걸 눈치챘다.

‘가르간도아!’

[ 후훗, 깔끔하게 잘라주지. ]

‘정령은 베면 안 돼!’

[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부드럽게 내려선 검 끝이 사냥에 나선 포식자의 송곳니처럼 휘둘러졌다.

키잉 -..

마치 유리와 유리 단면을 문지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창문이 수십갈래로 나뉘었다.

작게 조각난 창문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리안과 마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령의 몸과 바닥을 고정하고 있는 쇠사슬까지 연속적으로 베어냈다.

팅!

“…!”

[ 익..! ]

생각보다 단단했는지 마검이 사슬을 베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마검이 푸화악! 하고 기운을 내뿜었다. 리안은 옷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마검을 바라보았다.

[ 감히! ]

마검이 호통치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창문처럼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졌다.

스륵, 촤르륵!

쇠사슬 아랫부분이 조각나자 정령의 몸에 박혀있던 쇠사슬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 흐하하! 이게 이 몸의 실력이다! ]

리안은 호탕하게 웃는 마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정령의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괜찮으 -…”

말이 끝나기도 전에.

[ 죽일, 죽일 거야! 전부, 전부 죽일 거야! ]

긴 고문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정령의 어머니가 날뛰기 시작했다. 이성을 놓은 그녀는 인간을 모두 적으로 간주했고, 눈앞에 있는 리안 또한 적으로 인지했다.

“어어…”

리안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마검처럼 뿜어내며 허공에 떠오른 정령의 어머니를 보며 목소리를 작게 떨었다.

“뭔가…망, 한 거 같은데..”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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