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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2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에서 성녀를 활용한 정화 전략을 실패한 일이 없었다.

   

   성녀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사기급이었거든.

   

   오죽하면 고인물들이 성녀를 파티에 끼우면 재미가 없다면서 일부러 거르고 다녔을까.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초기의 성녀로 어디까지 정화가 가능한지 알고 있는 나는 지금 이 순간 페이비가 실패를 했음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페이비가 겨우 여기서 넘어질 만한 사람은 아닌데 말야.

   

   그러니까 이건 변수다.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 변수.

   

   여태까지 나를 지겹도록 괴롭혀 온 변수.

   

   하지만 여태까지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워낙 기상천외한 것들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

   

   이 정도 변수라면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그렇잖아?

   

   이번에는 그저 날먹을 못하게 됐을 뿐이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퀘스트를 클리어 못해서 좆 될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고.

   

   다른 NPC와의 관계가 뒤틀려서 평판이 망한 것도 아니지.

   

   심지어 지금의 내가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변수다.

   

   당황할 이유가 없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마력탄들을 방패로 막아낸 나는 용언을 외는 용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할배에게 물음을 던졌다.

   

   ‘할아버지! 뭐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건 날먹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의 문제다.

   

   단순히 페이비가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라면 다시 기도를 끝마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니까.

   

   <믿음이 부족했던 것 같구나.>

   ‘네?’

   

   신성마법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다.

   

   자신의 기도문을 외움으로써 기적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내가 신성마법을 다루기 편했던 이유도 이거다.

   

   나는 이 세상의 바깥에서 온 사람이니까.

   

   신성마법을 사용하면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그를 의심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페이비가 기적을 의심했다고요?’

   <실패의 양상을 보면 그래 보이는 구나.>

   

   페이비가 기적을 의심했다. 아르마디를 의심했다.

   

   자신이 용의 원혼을 정화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 말이 가져다 준 충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저번에 할배는 말했다.

   

   페이비가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나는 페이비라면 그를 당연히 극복하리라 생각했다.

   

   게임에서 그랬으니까.

   

   그녀는 그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그 끝에 웃음을 지어보이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는 나의 멍청한 착각이었다.

   

   페이비는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을 의심했다.

   

   기적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 성녀께서 이런 꼴이 되다니.

   

   대체 그녀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하. 게임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닥치니까 머리가 좀 하얘지네.

   

   생각을 해보자.

   

   지금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도마뱀을 박살내는 건 그리 어렵 잖은 일이다.

   

   날먹이 안 되면 정석으로 가면 되는 거니까.

   

   지난번에 저 도마뱀을 사냥하기 위해 알새틴을 경유해 사들였던 여러 도구들은 여전히 인벤토리에서 잠자고 있다.

   

   기회 날 때마다 그걸 던지면서 떨어질 때 극딜 몇 번 넣으면 잡는 건 충분히 가능할 걸?

   

   그렇지만 그럼 안 될 것 같아. 페이비가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이런 상황에서 자기 없이 저 골렘 도마뱀을 사냥해봐.

   

   자기는 아무것도 한 거 없이 보상만 받는 민폐덩어리라고 생각할 거 아냐.

   

   내가 아는 페이비라면 자존감이 땅을 파고서 들어갈 인간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페이비라면 실패를 했을리가 없거든?!

   

   그러니까 생각을 고쳐먹어야 해.

   

   지금 여기 있는 페이비는 내가 아는 NPC가 아냐.

   

   현실의 페이비야.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고.

   

   제일 좋은 방법은 그거지.

   

   자기가 직접 극복을 하게 만드는 것.

   

   페이비가 다시금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워 주는 거.

   

   지금 페이비의 자존감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진짜 시련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곤란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정석적인 방법보다 더 어렵고 고된 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야 해.

   

   뭐. 어때. 나 같은 고인물한테 이건 별 일도 아니야.

   

   나크라드한테 개박살 날 때보다 상황이 좋은데 포기할 이유가 없지.

   

   새로운 컨텐츠가 생겼다고 생각 하자고.

   

   이야. 현실 온라인이 확실히 업데이트가 빠르긴 하네.

   

   근데 운영자님.

   

   건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좀 유저 편의적으로 업뎃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러다가 아주 유저들이 배 터져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요?!

   

   헛소리는 이쯤하고.

   

   자아.

   

   어떤 식으로 해볼까.

   

   고민의 끝은 빠르게 정해졌다.

   

   내 방식은 하나지.

   

   메스가키 식으로.

   

   “쫄보 성녀!♡”

   

   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에 서투르다.

   

   자신감을 심어주는 걸 잘하지도 못한다.

   

   의욕을 끌어올리는 방식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단 하나 잘하는 것이 있다.

   

   상대를 열 받게 만드는 거.

   

   “실패한 거에요?!♡ 풋♡ 허접 주신의 성녀답네요!♡ 어쩜 주신이나 성녀나 똑같은지!♡ 허접 주신의 교리는 민폐를 끼치라는 건가보네요!♡”

   “아니에요!”

   

   내게 도발 당한 페이비가 소리를 내질렀다.

   

   시뻘개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는 페이비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까지는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아르마디에 대한 도발은 견딜 수 없는 거겠지.

   

   “아니라고요?♡ 제가 보기엔 그래 보이는데요?♡ 허접♡ 쫄보♡ 도움 되는 거 하나 없는 민폐덩어리♡”

   “정정하세요! 전 몰라도 아르마디께선 결코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마법을 피하고 막아내면서 시간을 끌다 보니 용이 입을 다물고 다시 날개를 펼쳤다.

   

   조금 쉴 시간이 주어진 후에 다시 패턴이 이어지겠지.

   

   저 용이 얌전히 있을 동안에 결론을 내자.

   

   언제 어그로가 튈지 모르는 데 페이비랑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순 없거든.

   

   “그럼 증명해봐요♡ 허접 주신의 허접 성녀가 아니란 걸 말이에요♡”

   

   증명이라는 단어에 페이비가 멈칫했다.

   

   화를 내는 와중에도 말을 멈출 정도면 진짜 자신이 없나 보네.

   

   저러니까 기도에 실패하지.

   

   “못하죠?♡ 자신 없죠?♡ 그쵸?♡ 쫄보 성녀인 걸 어쩌겠어요♡”

   “전…”

   “성녀가 이 꼴인데 신은 어떨지♡ 엄청난 쫄보겠죠♡ 악신의 앞에 서는 게 무서워서 침묵을 지키는 쓰레기지 않을까요?♡”

   “시끄러워요! 루시 알른! 하면 되잖아요!”

   

   그래. 그거야.

   

   자신감이 없다면 이렇게 만들어서 채워주면 되지.

   

   아. 이건 자신감보다는 악이나 깡 쪽인가?

   

   뭐 어때.

   

   둘 다 비슷한 거 아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잖아.

   

   페이비 쪽에서 고개를 떼고서 아가리를 벌리려는 용을 바라본다.

   

   그럼 이제 고인물의 보스 농락 시간인가?

   

   “거기♡ 돌뱀대가리♡ 뇌도 없고 눈도 없나 보네♡ 어떻게 상처 하나를 못 낼 수가 있지?♡ 진짜 완전 허접♡ 쓰레기♡ 이딴 게 보스라니 아카데미 교수들도 생각이 모자라네♡”

   

   *

   

   저런. 저런 사람이 아르마디의 사도 일리가 없어요!

   

   그 신의 간택을 받았다는 자가 감히 신을 모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알른 영애가 많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전혀 아니에요!

   

   그녀는 교회에서 난동을 피우던 때와 달라진 게 없어요!

   

   감히 아르마디께 허. 허. 그거라고 부르다니!

   

   페이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금 전 페이비는 정화의 기도를 올리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신성이 부족했다거나 원혼이 지닌 격이 드높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페이비가 기적이 일어날 것을 의심했기에 정화의 기도는 중간에 무너져 내렸다.

   

   여태까지 페이비는 단 한 번도 아르마디께서 기적을 일으켜주리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신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신께서 정한 성녀인 자신은 기적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해야만 하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페이비는 자신의 마음속에 차오른 의심에 너무도 허약했다.

   

   그를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균열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기도가 실패한 후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검은 감정이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와 준 파티원들에 대한 죄책감.

   

   자신을 향한 실망.

   

   자신이 성녀라는 직함에 걸맞는 사람인지에 대한 의심.

   

   그 모든 것들이 뭉쳐 질척한 검은색을 만들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으로 페이비가 무너져 내려가던 그 때에 루시가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녈 도발했다.

   

   주신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자신을 모욕하는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신을 욕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던 페이비는 살아오면서 이랬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화를 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증명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됐다.

   

   그렇지만 페이비는 조금도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붉은 빛으로 마음이 물든 그녀는 그저 앞을 바라 볼 뿐이었다.

   

   해내야 해요.

   

   반드시.

   

   정화의 기도에 성공해서 루시 알른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해요!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에 오만방자해져 버린 저 사람이 신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해야 한다고요!

   

   페이비는 속으로 그리 외치면서 두 손을 끌어 모았다.

   

   허나 그 순간 페이비의 머릿속에 의심이 스쳤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방금 전에도 실패했잖아요.

   

   이번이라고 다를 거라 자신할 수 있어요?

   

   붉은 색으로 물들었던 마음을 조금씩 검은 색이 좀 먹기 시작한다.

   

   학습된 좌절은 너무도 쉽게 사람은 나락으로 밀어트려 버리니.

   

   끌어 모은 두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씩 약해져가던 그 때에.

   

   “민폐 성녀!♡ 아직이에요?♡ 무능한데다 느려터졌네요!♡ 허접 주신처럼요!♡”

   

   까득.

   

   다시금 그녀의 마음이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래요. 이건 제가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르마디의 이름에 모욕을 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거에요!

   

   재차 손가락에 힘을 더한 페이비는 눈을 감은 채 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그는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능숙했다.

   

   정화의 기도는 이전부터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 왔던 기도이니.

   

   오래 전부터 외워오던 기도에 어색함이 있을 리가.

   

   ‘죽은 자가 대지에 남은 이유는…’

   

   페이비는 루시의 코를 눌러주겠다는 일념으로 기도를 외우면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올까말까 싶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을 농락하며 웃는 모습을.

   

   “어딜 노리는 거야?♡ 귀신이라도 있는 거야?♡ 꺄악!♡ 무서워라♡”

   

   어떻게 한 손으로 자신을 짓뭉갤 수 있는 거대한 용을 상대로 저럴 수 있는 거죠?

   

   저 사람에게 겁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요?

   

   그 모습을 보며 페이비는 이를 꾹 물었다.

   

   용을 상대로도 저러는 분인데 제가 한 번 더 실패를 한다면 그 때 어떤 식으로 나올 지는 뻔하죠.

   

   그러니까 절대로 실패해선 안 돼요.

   

   실패할 수 없어요.

   

   아르마디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걸 제가 증명해내고 말 거에요!

   

   마음의 망설임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페이비가 기도를 외우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용이 불꽃을 내뿜기를 멈추었을 무렵에 페이비는 기도를 완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알른 영애!”

   

   지켜봐요.

   

   이게 바로 당신이 무시한 아르마디의 기적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좌절보다 분노가 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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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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