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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3

       *

         

         

         언젠가 회고했듯이, 크라실로프엔 겨울을 제외한 계절이 없다.

         

         조금 덜 추운 겨울, 따듯한 겨울, 추운 겨울, 얼어 뒤질 겨울만 존재한다.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동치하면 얼추 비슷한 뜻이다.

         

         따라서 대학의 방학은 지구와는 다른 개념으로 실시된다.

         

         대한민국 기준으로 여름 방학이란, 날이 너무 더워질 땐 집에서 쉬어라.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크라실로프 기준으로 여름 방학이란, 날이 그나마 버틸 만 하니 가족들이랑 좀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

         

         그러므로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부터 내린 가을비를 기준으로, 크라실로프는 다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크라실로프의 가을은 일주일이다.)

         

         

         “와 날씨 진짜 미쳤다. 인간들은 어떻게 이런 날씨에 바깥에 돌아다니지?”

         “이 나라는 시간이 좀 빨리 감기나? 왜 벌써 겨울이지?”

         “우리 가문 하녀들이 그러던데, 빨래를 널면 두 시간 후에 얼어버린다고.”

         

         

         라는 식의 한탄이 교정 곳곳에서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외국 귀족 자제들과 엘프들이다.

         

         칼리온, 틸레스와 기타 소국의 귀족들은 따듯한 나라에서 올라온 이들이다. (이보다 각박한 기후의 국가는 지난 전쟁에 모두 멸망했다. 크라실로프가 북방의 방벽인 이유가 그것이다.)

         

         

         “후후, 모르는 건가? 이것은… ‘가을’이다.”

         “아, 청명하군. 태닝이라도 하고 싶어질 정도야.”

         “빙결 주문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 있나? 날이 너무 더워서 얼린 보드카를 좀 마시고 싶은데.”

         “샤베트 팝니다! 요즘 같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딱! 딸기맛 포도맛 레몬맛이 있어요!”

         

         

         이 시기 외국인 1학년생들을 바라보는 크라실로프 시민들의 반응은 대개 이랬다. 이런 기묘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코트를 꽁꽁 동여매고 다니는 학생들을 향해 야유하곤 했다.

         

         비가 내리고, 빗물이 새벽에 얼어붙고, 언제나 흐릿한 먹구름이 머리 위에 도사리는.

         

         이 스산한 가을에, 한 학생이 교정 외곽 벤치에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다. 퀭해진 눈으로 입을 딱딱거리며, 이따금씩 자신의 팔다리를 주무르곤 한다.

         

         아니, 한 학생이 아니었다.

         

         

         “팔, 내 팔이 움직인다…. 그런가, 이게 ‘신경’인가….”

         “신경 접속 성공, 말살 모드 실행.”

         “어떻게 사람들은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없어…. 그 모든 혈관, 모든 관절, 모든 근육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흔들어 대는 거지?”

         “국립은행 예금계좌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거라면 얼마든지…!! 제발 이제 그만…!!”

         

         

         행색은 달라도 행동은 비슷한 이들이 벤치를 차지하고 웅크린 채 음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최근 교정에 종종 출몰하는 괴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원 1학년이라는 점, 그리고….

         

         

         “대체 뭘 가르치길래 저런….”

         “예레모프 증후군 환자가 또 늘어났군. 어제 수업에서 뭘 했다고 했지?”

         “오른팔 신경을 약물로 마비시키고 마력으로 움직여보라고 했다던데.”

         “…미친놈.”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의 수업을 둘 이상 듣고 있는 학생들이란 점이었다.

         

         예레모프 증후군 환자(ESP : Ефёмов Syndrome Patient)라고 불리는 이 학생-환자군(群)을 처음 마주한 다른 학부생들은 오싹한 감각 속에 수강신청을 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에 감사해야 했다.

         

         

         “히이이익—!! 저 창문…! 창문에…!!”

         

         

         한 학생이 창가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는 머리를 움켜쥐며 허물어졌다. 늘어진 침엽수 잎들은 언뜻 보면 수염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자벨은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얘들아. 다들 모여.”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의 폭주를 막아낼 최후의 병기를 뽑아야 했다. 이 이상 ESP를 양산할 수는 없다.

         

         광기가 전염되는 음산한 9월의 성 얀스크 대학 교정에서, 이자벨은 마침내 용사 파티를 소집했다.

         

         

         “오늘 저녁은 우리집에서 먹는다.”

         “으웩—.”

         

         

         용사 파티의 마법사, 엘피헤라는 귀를 축 늘어트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왜용? 뭔데 그래?”

         “스튜와 리조또.”

         “맛있겠는데요! 맥주도 있죠?”

         “입을 행구려면 맥주보단 조금 더 향이 강한 게 필요할거야…. 레몬 소다 같은 거….”

         

         

         축제 당시 ‘그 음식’을 겪어본 적 없는 룬디스는 조용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튜와 리조또, 그것을 유진은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이라고 불렀다. 두부 김치는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제외해야 했다. (페타 치즈는 김치와 먹어선 안 된다.)

         

       

       

       

       

       Side ep. 겨울은 김장의 계절 (크라실로프는 언제나 겨울)

       

       

       

         

         

         때는 축제 이후부터 토너먼트 기간까지의 몇 주간.

         

         이자벨은 지난 축제 기간동안 괴식을 판매하려 시도하고 엄청난 적자를 갱신한 뒤 침몰한 ‘미슐렝 파인다이닝’의 셰프들을 초빙했다.

         

         유리와 유진, 그리고 오스왈드는 이 판타지 주민의 용기에 감탄하며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우리가 몇 달간 알아낸 비밀 레시피를 무료로 착취해 가려 하시다니….”

         “이게 전근대 러시아 평균 인성인가?”

         “틸레스는 프랑스에 가까운데, 엘랑 인성이라고 해주시면 좋겠어요.”

         

         

         각 학부에서 반쯤 내놓은 이 세 미치광이들은 괴상한 소리를 하곤 싱글벙글 웃으며 문화 전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이따금씩 ‘스팸을 김치에 싸서 드셔보세요.’ 같은 뜻 모를 말을 하며.

         

         그 날 이후 이자벨의 부엌에선 지독한 악취가 끊이지 않았다. 담당 하녀들은 서글픈 표정으로 밤마다 알코올 소독을 시도해야 했다. (그녀들은 대형 괴수 잔해물 수거반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말을 전했다.)

         

         작업을 시작한지 며칠이 지난 후, 이자벨은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이걸 맛있다고 먹는 나라가 있었다고…? 마족인가?”

         “예…?”

         “아니, 하긴. 아저씨는 전쟁 시절부터 마족령에서 복무하셨다니까 뭐어…. 입맛이 다소… 다소 그렇게 변할 수는 있어도, 너흰 뭔데? 대체 뭔데 이런 걸 먹어?”

         “김치를… 모욕해?”

         

         

         세 사람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이자벨은 이 괴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가 좋아하니까 뭐, 어떻게 좋은 점이 있다고 쳐봐요. 솔직히 아저씨 입맛이란 게 좋을 걸 찾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평소에 이반이 먹는 것을 보면, 퀴퀴한 악취가 나는 기름덩이 벽돌을 마력 두른 치악력으로 으적으적 씹어 삼키지 않던가.

         

         이자벨이 보기에 그건 일종의… 전쟁 시절 습관이다. (사실이다.) 전쟁의 참담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식문화라 볼 법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이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니.

         

         엘피헤라가 주저없이 개밥이라고 부르는 그 벽돌을 제외하고, 따듯하고 정 넘치는 진짜 ‘음식’이란 것을 꼭 먹이고 싶다.

         

         그 첫 단추가 이 썩은-야채 시리즈다. 이미 부패한 식재료를 신선한 야채에 섞어서 다시 부패시키는 괴악한 매커니즘의 요리들.

         

         이걸 요리라고 불러야 할지 연금 실험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연금술은 부엌에서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도 당신들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생각을 해봐요. 틸레스에 크라실로프 요리가 없겠어요? 아니면 크라실로프에 틸레스 요리가 없겠어요?”

         “…어…?”

         “음식이란 건 원래 그쪽 나라 식문화에 맞춰 개량해나가는 거라구요. 그건 상식이잖아.”

         “세상에….”

         “엘랑 사람이 문화의 상대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이자벨은 이반이 이런 미치광이들을 대체 왜 한 자리에 모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광인에겐 광인을 끌어모으는 마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한 사람의 광인을 밝고 건강한 정도(正道)로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용사다.

         

         용사는 가장 강력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고로 용사란, 가장 용감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므로.

         

         이자벨은 열차테러 이후 단 한 순간도 진정한 의미의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는 드로안식 삭힌 청어를 얹은 썩은 양배추를 집게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김치’라는 요리의 핵심은 이거에요. 채소를 염장하고, 숙성시킨 해산물과 고추, 마늘로 양념을 하고, 며칠간 푹 삭히는 게 기본이란 뜻이죠.”

         “어…. 그런데요?”

         “이걸 베이스로 크라실로프 요리와 접목시킵니다. 하여간 이 사람들 살면서 요리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 같잖아.”

         

         

         광인들이 일제히 움찔거렸다.

         

         유진과 오스왈드는 살며 해본 요리라고 해봐야 라면이 전부인 평범한 한국인 남성이었고, 이 세계에선 고위 귀족이다. 요리는 종을 울리면 하녀가 대령하는 것이 아니던가.

         

         유리는 지구 시점으론 게임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슬프게도 이 직업군의 사람들에겐 요리라는 사치스런 취미를 향유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크라실로프에선 요리를 해먹을 돈이 없었다. (그녀는 고아였다. 바실리샤 고아원을 제외한다면 크라실로프의 고아들은 빈민가에 모여 산다.)

         

         그런 이들을 훑어보던 전근대 판타지 주민은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귀족들이란.”

         “세상에….”

         “내가… 귀족…?”

         

         

         반면 이자벨은 틸레스 왕궁의 천덕꾸러기. 용사의 위상이 드높아지기 전엔 볼모였고, 용사가 마왕을 죽인 뒤엔 용사의 안전장치였으며, 용사가 은거한 뒤엔 식충이 취급을 받았다.

         

         왕궁 인근의 저택에서, 전속 하녀조차 믿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그녀는 평민인 어머니에게 요리를 직접 배울 기회가 충분했다.

         

         현대인이 이세계 주민에게 한심하고 나태한 귀족 취급을 받는 상황에, 세 광인은 착란에 휩싸였다.

         

         

         “일단 엔초비는 빼요. 이건 냄새가 너무 지독하잖아. 대신 씰드(сёльдь : 크라실로프식 절인 청어)를 쓰죠.”

         “저희도 청어절임은 써봤어요! 씰드는 너무 간이 약하고, 청어를 쓸거라면 차라리 슈르스트….”

         “그 미친 드로안 썩은 생선 말하는 거라면 닥쳐요.”

         “네….”

         

         

         이자벨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청어젓이 담긴 유리 단지를 노려보았다. 저 지옥 가장 깊은 곳에서 기어올라온 젓갈은, 한 번 개봉하면 이주일간 악취가 부엌에서 빠지지도 않는다.

         

         

         “간은 다른 걸로 맞추면 돼요. 애초에 아저씨는 크라실로프 사람이잖아. 간이 센 걸 먹겠어요?”

         “아앗….”

         

         

         한국인인데…? 아니, 한국에서 20년 살고 여기서 30년 살았으면 크라실로프 사람 맞나? 근데 또 20년은 마족령에서 보냈으니까… 마족으로 쳐야 되나?

         

         이반의 국적을 따지던 유진은 혼란에 빠졌다.

         

         

         “자, 그럼 기본 재료는 준비했고, 스튜부터 시작하죠.”

         “그건 그냥 물 붓고 끓이면 되는 게…?”

         “하아….”

         

         

         찬란한 요리 문화를 꽃피운 틸레스 사람으로서, 이자벨은 이 한심한 크라실로프 귀족과 마찬가지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칼리온 엘프를 바라보았다.

         

         칼리온 녀석들은 디저트만 잘 만들지 애초에 요리 문화에선 영 발전이 없다. 귀쟁이들이 자랑스럽게 내어 놓는 요리라고 해봐야 정어리 파이가 전부 아니던가. (아니다.)

         

         반면 틸레스는 문화예술의 강대국이었으므로, 이 멍청한 음알못들에게 음식이란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했다.

         

         

         “잘 봐요. 크라실로프 하면 가장 흔한 스튜를 베이스로 잡고 거기에 이 썩힌 채소를 섞을 거에요. 보르쉬(소시지를 넣는 사워크림 스튜)부터 시작하죠.”

         

         

         문화의 상대성과 외국 문화에 대한 넓은 포용력, 그리고 심지어 창의력까지 갖춘 전근대 이세계인 앞에서, 21세기 국수주의자들은 조용히 침몰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마침내 방학이 끝난 이 시점. 이자벨은 더 이상 요리 연구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완성했다.

         

         먹을 수 있을 수준까지 악취를 억제한 크라실로프-마족령식(아니다.) 퓨전 요리를.

         

         

         “먹을 만… 하잖아?!”

         “이게 문화 승리고 이게 국뽕이지.”

         “제발 닥쳐요 여러분. 저까지 부끄러워지잖아.”

         

         

         광인들은 전율했다. 이게 용사의 딸, 그 재능의 편린이란 말인가. 하면서.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페타 치즈와 볶은 양배추 김치를 먹은 이반은 미각을 차단해야 했다.

    EP 12. 아카데미 축제의 상식들 (4)

    이자벨은 김치 제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치를 물에 끓이면 김치찌개라는 말을 듣고, 이자벨은 삼인방의 평가를 소폭 하향조절했다.

    EP 12. 아카데미 축제의 상식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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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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