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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3

       수확제가 끝나고, 아직 해가 뜨기엔 이른 새벽.

       

       소미레는 여러 행사를 마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황궁 외곽에 있는 탑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아오! 이 할머니는 왜 이런 곳에 사는 거야!”

       

       현재 소미레는 제국의 성녀이자 황태자비. 수확제와 연말인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녀 체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높은 탑을 오르는 이유.

       

       ‘프란체 데카르트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잖아…!’

       

       소미레는 프란체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걸 초월 마법사가 도와주기로 한 것이고.

       

       ‘그 할머니가 제대로만 했어도…….’

       

       탑의 계단을 오르며 온갖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다리는 아프고, 숨은 가빠지고, 프란체 때문에 잠도 못잘 정도로 짜증나고.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얼마나 계단을 올라섰을까? 프란체는 아래를 바라봤다.

       

       “…아직도 3층밖에 못 올라왔어?”

       

       아직도 20층은 더 올라가야 한다. 겉으로 보면 높이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월 마법사가 왜곡 마법을 써둔 탓에 내부는 훨씬 넓고 크다.

       

       참다 못한 소미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할머니! 지금 나 온 거 알고 있잖아! 빨리 올려다 줘!”

       

       수확제 때문에 순례를 나가서 몸도 피곤한데, 여러 귀족과 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까지 상대하느라 마음까지 지친 상태다.

       

       이대로 계단을 끝까지 올라버리면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할머니!!”

       

       좀 더 애타게 소리치자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퍼지더니 소미레의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단번에 최상층으로 올라온 것이다.

       

       “할머니!”

       

       초월 마법사는 “킬킬킬.” 웃으며 땀으로 흠뻑 젖은 소미레를 바라봤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감? 노인네도 잘 시간은 줘야지.”

       “할머니 잠 안 자도 되는 거 알고 있어. 시간 자체를 초월했으니까.”

       

       초월 마법사는 단순히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존재.

       

       무한 회귀, 무한 환생을 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킬킬, 쓸데없는 소릴.”

       

       초월 마법사는 웃었다. 다만, 얼굴은 정색 그 자체였다. 소미레는 순간 몸이 경직됐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하는 법. 초월 마법사는 소미레가 프란체를 죽이는 거에 협력해주기로 했다.

       

       “…할머니. 내가 찾아온 이유는 알 거 아니야.”

       

       우웅…! 초월 마법사는 마력을 움직여 널브러진 연구 물품과 마법서들을 단번에 정리했다. 시간을 되돌리며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낸 것이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푹신한 소파가 두 개 만들어졌으며,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와 쌉싸름한 홍차까지 준비되었다.

       

       ‘이 할머니는 신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소미레도 신성 한정이라지만 마법사. 이런 게 가능하려면 말도 안 되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소름 돋는 할머니야.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나를 이 꼴로 만들 수 있었겠지.’

       

       이렇게 된 이유가 모두 초월 마법사 때문이다. 제딴에는 처음 쓰는 초월 마법이라 실수했다고 하는데, 용서할 수가 있어야지.

       

       “킬킬, 그래서 왜 찾아왔는감? 아직 시간은 남았을 터인데.”

       

       소미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몰라서 물어?”

       

       이 할머니는 참 능구렁이 같으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다. 뭐, 이건 인생 경험이 많았어야 알지.

       

       “킬킬,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인감? 빨리 말혀. 내 바쁘니까.”

       

       하아, 소미레는 고개를 휘젓곤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체 데카르트. 결국엔 공작가의 주인까지 됐고, 제국의 사치품 사업을 독점해 대부호가 된 것도 모자라 페델리안 사자 패를 받았어. 여기서 마탑이라는 걸 건설해서 대륙 각지에 퍼진 마법사들을 다 모으더라?”

       

       그녀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다 못해 뚫어버렸다. 이젠 황실도, 페르시아 공작가도 넘보지 못할 만큼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프란체의 세력은 앞으로도 점점 커질 터.

       

       ‘그나마 다행인 게 진 바렌베르크가 곧 떠날 때라는 거지만.’

       

       이게 가장 안심이다. 만약 진 바렌베르크를 끝까지 데리고 있었다면 죽이기는커녕 근처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킬킬, 상관없어. 네가 한 번만 제대로 움직이면 모든 게 해결되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황실도 견제할 수 없는 걸 내가 어떻게……”

       

       초월 마법사는 소미레의 말을 끊어내고 손바닥 위로 마력을 모았다. 후우웅! 거센 돌풍이 생기며 주변을 난타했다.

       

       기껏 정리한 책장과 마도구들이 박살 나고 침구마저 부서졌다. 시간이 다시 되돌아가 금세 정리되었다.

       

       “자, 이거 받으라.”

       

       초월 마법사가 만들어낸 건 다름아닌 단검 한 자루.

       

       “이게 뭔데?”

       “네 목적을 이뤄줄 수 있는 물건.”

       

       얼떨떨하게 단검을 받아든 소미레는 유심히 검날을 살폈다.

       

       불길하고 응축된 마력이 가득하다. 모양은 또 왜 이런지 지그재그로 꺾여있다.

       

       “이거로 뭘 하라고?”

       “그걸 그 여자 심장에 찔러넣어.”

       “아니, 이 단검이 뭔데?”

       “그거로 죽여야 돌아갈 수 있어.”

       

       소미레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그냥 죽이면 되는 거 아니었어?”

       

       초월 마법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나쁜 미소를 지었다. 자글자글한 주름.

       

       “킬킬, 모종의 마법이 걸려있어서 그게 아니면 여기서 돌아갈 수 없어.”

       

       맙소사. 어째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 알려준단 말인가? 소미레는 발끈하며 물었다.

       

       “그런 걸 왜 이제 알려주는 거야!”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킬킬.”

       

       이 망할 노인네.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지 않나. 이 거지 같은 세계에 영원히 갇힐 수도 있었다.

       

       “킬킬, 아무튼 그 단검을 사용하면 돌아갈 수 있을겨. 인과율을 부수고 그 여자한테 새겨진 마법을 끊어내는 단검이니.”

       

       소미레는 조용히 단검의 칼자루를 매만졌다. 매끄러운 촉감. 날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짝만 베여도 피가 철철 흘러나올 것 같다.

       

       검 끝은 창밖에 반사되어 별처럼 빛났고, 안에 담긴 불길한 마력이 일렁여 보는 사람의 닭살을 돋게 만든다.

       

       “이거면 돌아갈 수 있는 거지?”

       “그래, 킬킬.”

       “좋아, 이제 어쩌면 되는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킬킬.”

       

       소미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끝까지 도와주기로 했잖아! 고작 이거 하나 줘놓고 무슨…!”

       “그건 평범한 단검이 아니여. 고생 좀 했다고? 킬킬. 이 정도면 끝까지 도와준 거지.”

       

       확실히. 이 단검이 내뿜는 위용은 그 어떤 마력보다 정제되어있다.

       

       “좋아. 이걸 그 여자 심장에 찔러 넣는다고 쳐. 그 과정은 어떻게 하는데? 지금 그 여자의 힘은 너무 압도적이잖아…….”

       

       단번에 축 늘어진 소미레.

       

       여러 조사를 한 결과, 그 여자의 주위에는 황실 기사단장 급의 소드 마스터가 두 명이나 있다. 아무리 진 바렌베르크가 떠난다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킬킬. 단둘이 독대할 기회를 만들어서 기습을 시도하든가, 모종의 방법을 사용해서 데카르트의 권위를 떨어트리든가.”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 가능하겠나.

       

       ‘그 여자는 나를 경계하고 있어.’

       

       프란체와 소미레의 첫 만남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건 맞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내 목적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진 바렌베르크. 아마도 그가 알려준 것이리라. 그는 처음부터 소미레를 극도로 경계했으니.

       

       ‘그 망할 것은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구나.’

       

       이 망할 노인네, 초월 마법사도 이 이상으로 도와줄 거 같진 않고. 소미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여기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이거 검집은 없어?”

       “킬킬, 그 단검의 날은 그 여자에게만 통하는지라 다른 사람한테는 통하지 않어.”

       “그래? 그럼 더 편리하겠네. 그럼 이제 할머니는 나 안 도와주는 거지?”

       

       초월 마법사는 “킬킬, 인제 끝이여.”하며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나를 이제 밖으로 내보내줘. 계단 내려가는 것도 일이란 말이야.”

       “그 정도는 쉽게 들어줄 수 있지, 킬킬. 돌아가고 싶으면 잘 해보라구.”

       

       딱! 초월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소미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초월 마법사는 창밖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바라봤다.

         

       “저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 잘못이니 기회는 줘야겠지.”

       

       별 하나 뜨지 않은 새까만 하늘. 초월 마법사의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붉은 눈동자가 훤히 빛났다.

       

       “그런데 정말 예상대로 동기화를 피하려 도망칠 줄이야. 그러라고 노예 각인을 풀어준 게 아닌데, 쯧쯧.”

         

       허나 계획에 차질은 없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법이니.

         

       “킬킬, 계약을 이행할 때가 되었다, 진 바렌베르크. 정해진 운명을 바꿔라.”

       

       

       * * *

       

       

       수확제 다음날.

       

       프란체는 황홀했던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아…….”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하는 꿈. 자신이 이처럼 행복할 수 있다니, 현실 같지가 않았다.

       

       “윽.”

       

       별안간 지끈거리는 머리.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숙취가 제대로 와버렸다.

       

       ‘이렇게 마신 적은 없었는데.’

       

       프란체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종을 흔들었다.

       

       딸랑-

       

       곧장 문이 열리며 헬레나가 들어왔다.

       

       “공작님, 잘 주무셨나요?”

       “잠은 잘 잔 거 같은데…….”

       

       눈썹을 한없이 좁힌 채 이마를 문지르는 프란체.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아. 머리가 아프네.”

       “아, 그럼 숙취에 좋은 음료를 준비할게요.”

       “그래, 부탁해.”

       

       잠시 기다리자 헬레나는 음료와 함께 미지근한 물이 담긴 대야 그리고 수건을 가져왔다.

       

       헬레나가 숙취에 좋은 음료를 따라주는 사이, 프란체는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테이블에 앉았다.

       

       “후우.”

       

       여전히 머리는 지끈거리지만 속은 가라앉았다.

       

       “헬레나, 오늘 업무는 어떻게 되니?”

       “조금 있다가 집사장님을 만나셔야 해요.”

       

       그래, 공작령의 업무를 분담해줄 사람을 뽑아야 했다.

       

       ‘영토가 없는 아카데미 출신 남작이나 자작을 알아봐야겠네.’

       

       공작령의 일을 맡아주기에 충분할 터. 거기에 흑마법을 사용한 ‘자백의 저주’로 그 사람의 내면마저 볼 수 있으니 제대로 된 사람을 뽑을 수 있을 거다.

       

       “흐음.”

       

       근데 뭔가 이상하다. 원래 항상 이 시간이라면 진이 있어야 할 터인데…….

       

       “헬레나, 진은 어디에 갔니? 항상 오던 시간인데 안 보이는구나.”

       “진 님이요? 제가 일어나고선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어제 일이 부끄러웠던 걸까? 진은 생각보다 숫기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프란체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모처럼이니 내가 손수 찾아가 봐야겠구나.”

       

       진의 숙소는 처음 가본다. 항상 그가 먼저 찾아왔기에 가볼 일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무슨 일이 있다면 집사장이 부르러 갔었으니.

       

       “가자꾸나.”

       “네.”

       

       프란체와 헬레나는 공작저의 연무장을 지나 기사단의 숙소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온기라곤 느낄 수 없다. 하긴, 기사단을 전부 다 해임했으니.

       

       “진의 숙소는 어디니?”

       “음…….”

       

       헬레나는 집사장에게 받은 기사단 숙소 배치도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엔 진 님이 머무시는 방이 없다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프란체가 물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살고 있다는 거야?”

       

       그러던 그때. 덜컥. 한 숙소의 문이 열리며 케일이 나왔다.

       

       “공작이군.”

       “케일.”

       “여기엔 무슨 일이지?”

       “진을 찾으러 왔어.”

       “…….”

       

       일순 케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은 어디서 살고 있니? 기사단 숙소에 없는 게 이상한데.”

       

       케일은 입술을 머금더니 고개를 휘젓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따라오쇼.”

       

       뭔가 수상쩍은 그의 태도에 의문이 든 프란체였지만,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기사단 숙소 옆의 창고. 어찌나 허름한지 사람이 살 거라곤 볼 수 없었다.

       

       “…여기에 진이 살고 있다고?”

       

       프란체의 얼굴이 한없이 구겨졌다. 분명 이전 집사장, 그 망할 노인네가 진을 차별한 것이겠지.

       

       “아무튼, 나는 이만 가보지.”

       

       케일은 프란체의 얼굴을 확인하곤 서둘러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갔다.

       

       “헬레나, 들어가자.”

       “네.”

       

       프란체와 헬레나는 창고만도 못한 건물로 들어왔다. 곳곳에 먼지가 푹푹 쌓여있고,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허름한 나무 문 하나가 나왔다.

       

       “정말 여기에 살고 있었다고…?”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다면 분명 자신에게 말을 했을 텐데…….

       

       덜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른 핏자국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외에는 침구와 이불. 그리고 책상 하나가 있었다.

       

       도저히 프란체의 직속 호위기사가 사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충격도 잠시. 바로 보이는 책상 위에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 하나가 놓여 있다.

       

       “응?”

       

       아무래도 진이 남겨둔 듯하다. 프란체는 곧장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란체에게…?’

       

       곧장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확인한 프란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껏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진의 이별 통보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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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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