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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3

        

         묵묵히 주변을 둘러본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아 요철 하나 없이 완벽한 평면을 이루는 바닥이 주는 기묘한 안정감.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이 선사하는 해방감, 홀로 떠들어본다 한들 본질적으로 깨지지 않는 고요.

         원시적인 자연과도, 인공적인 문명과도 한참 동떨어진 공허한 풍경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게 칠흑 같은 어둠속에 파묻혀 있어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만 나지 않았다면, 어비스 다이브를 쓸 수 있는 해커들 사이에서는 나름 명상 핫 플레이스로도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싶다.

         

         빡빡하고 바쁜 도시 생활에서의 일탈 같은 느낌으로.

         

         ……그럴 리가 없나? 뇌가 자극에 절여진 현대인들인데.

         

         “…….”

         

         고개를 턴다. 딴생각은 살금살금 구석으로 치워버린 후, 애써 움직인 목적을 이루고자 작업을 개시.

         

         존재하지 않던 기관과 근육을 움직이듯, 몸에 돋아난 새로운 팔다리를 조작하듯. 의식을 뻗어서 수면 아래를 휘젓는다.

         

         이것도 전기를 방출하는 것처럼 다 요령이다 요령. 반복할수록 숙달되고, 숙달되면…… 아무튼 더 부드럽고 빠르게 발동할 수 있는 스킬.

         

         예전에, 관문 실험실에서 파라다이스 쪽 인력이랑 한 판 붙었을 때의 전황을 상기해보면 적의 수와 가용 메모리가 많아질 경우 이 상태에서도 꽤 만만치 않은 난전이 벌어진다는 걸 실감했으니… 이것도 날 잡고 훈련을 하긴 해야지.

         

         “음….”

         

         헌데 낮은 침음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지게차나 포크레인 마냥 현장의 중장비 역할을 수행해주는 데이터덩어리들까지 총 동원해서 바다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없다. 딱히 뭐가 없다. 아예 아무것도 없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없다.

         

         그냥 평범하게 연결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권한과 지각 능력을 가진 공간이기에 이 전파망이 연결된 기기들의 DB를 거의 이 잡듯 뒤질 수 있는데도 특별하게 걸리는 물건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기분 나쁜 유령 같은 친구를 다짜고짜 밖으로 쫓아내는 게 아니라, 붙잡고 아무 정보라도 좀 캐낼 걸 그랬다.

         

         여기는 대체 뭘 위한 네트워크였길래 이렇게 텅텅 비었냐고.

         

         보통은 내가 먼저 자리잡고 있는 와중, 적들이 나중에 들어오는 구도다보니… 내가 침입자고 저쪽이 아는 게 더 많은 선객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했다.

         

         멀리 차버리고 나서야 제로가 상기해줘서 아차! 했지. ……시발!

         

         – …슬슬 다음 네트워크로 이동하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여기가 오직 그 의식체를 위한 세계였다면 언제든지 폐쇄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

         

         “미친. 그럴 수도 있구나…?!”

         

         깜짝 놀랄 정도로 좋은 지적이었다.

         

         그야 24시간 열려 있어야 하는 도시 공용망이나 연구시설 네트워크가 아니라 무작위로 잡히는 곳에 들어온 셈이니 당연. 더군다나 멋대로 들어온 내가 원주민을 퇴거시키기까지 했으니 더욱 합당한 가설이었다.

         

         정보 좀 빼돌려보겠다고 떠돌다 퇴로가 단선되는 건 사양하겠다.

         미아가 되는 걸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결국 자의식의 근원이 되는 뇌에서 멀어진 채 방치되면 머지않아 죽는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될 테니…까…?

         

         “…어라.”

         

         잠깐 자가당착으로 인해 뇌정지가 왔다.

         

         여기서 사이버 엔지니어링 이론을 홀로 공부하거나 게임의 설정을 달달 외울 때는 당연하게 여겼는데, 차원을 넘어서도 옛 기억과 자아의 일부를 보존하는데 성공한 나는 저 이론의 살아있는 반증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로 어깨 맞대고 지내는 기업끼리도 기술 격차가 심하게 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초월적 존재도 있는 만큼 무작정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 아샤님? –

         

         “아, 미안. 전파 목록 좀 재정렬해 줄래? 이번에는… 신호 강도를 토대로 해서 조금 목적지를 정확하게 집어보자.”

         

         가만히 있는 내가 불안했는지 재촉해오는 제로를 진정시켰다.

         경계에 집중해 달라고 일부러 부탁까지 했는데도 이렇게 보조 활동에 열을 올리다니.

         가상 공간으로 한정하면 아직까지 실패를 겪어본 적 없는 게 나이거늘. 잔걱정이 태산 같았다. 뭐, 그렇다고 준다는 도움마저 마다할 건 아니었다.

         

         실제였다면 촤라락! 하는 효과음이 났을 법하게, 책자가 펼쳐지듯 전파 목록이 눈앞에 나열된다.

         

         여기가 얼마나 깊은 지하인지는 몰라도. 한 번 수신했다 하면 수백 수천 종류의 네트워크가 튀어나와 소비자를 괴롭히는 지상과는 달리 상당히 절제된, 손으로 세고도 남을 라인업이 표시되었다.

         

         여기서 이제… 아까 유용하게 썼던 도시 공용망은 볼일이 끝났으니 제외.

         

         또 지나치게 강도가 세고 공격성이 높은 이 놈은 아마 위쪽부터 깔려 있던 그 유해 전파. 블랙마켓이나 레오나르 경이 준비한 녀석이겠지만 의도가 불순한 전파이니 후순위로 미루자.

         

         그렇다면 남은 건, 수상할 정도로 신호 교환이 활발하고 발생지도 광장 내부로 특정할 만큼 가까운 마지막 선택지.

         바로 앞에서 희대의 금고풀이 쇼가 진행되고 있을 텐데 구태여 나처럼 딴짓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것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건 사실 질문이 안 된다. 지금부터 직접 알아보면 그만이니까.

         

         지직…!!

         

         

         부유감이 전신을 감싸고 곧바로 몸이 튕겨져 날아갔다.

         한 네트워크에서 다른 네트워크로 정신이 흘러 들어간다. 마음을 먹으면 그대로 환경이 개변한다는 점은 극에 이른 자각몽과도 통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 전능감만은 언젠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 잊지 못하리라.

         

         까드득…!

         

         “아! 야이씨……!!”

         

         시원하게 들이박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신없이 체공하던 도중, 난데없이 몸에 얽혀 드는 그물로 인해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 조류가 항공기에 부딪치는 사고)를 겪어서 엔진 꺼진 비행기 마냥 급제동을 했으니.

         

         진짜 대놓고 파괴 공작이나 침략이 목적이었다면 그대로 뚫고 날아가도 괜찮았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사가 일순위니까, 경계에 펼쳐진 방화벽이 거슬린다고 부숴버려서야 완전히 본말전도다.

         

         우선은 손으로 그물을 더듬어서 안에 들은 데이터와 이걸 구성하는 코드들을 받아들인다.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고정된 텍스쳐와 모델을 출력해주는 기업의 증강 현실과 달리 내가 만들어낸 심상 세계는 순전히 사용자의 인식을 따라간다.

         

         남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질 때마다 ‘자료 = 책, 책이 많으니까 서재나 도서관.’ 같은 논리에 따라 풍경이 결정되는 것도 내 무의식 탓.

         이 깊은 정보의 바다도 굳이 따지자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심상의 연장선이었기에, 이런 장애물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방화벽이라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게 뭔가?

         나 같은 경우에는… 그 운영 체제의 익숙한 빨간 벽돌담 아이콘과 각종 영상 매체의 영향이 강했는지 동물 우리나 전기 철조망이 연상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날아서 넘어간다고 심상의 주체인 내가 믿는 와중이었기에, 이런 새 잡는 그물의 형상을 취해 앞을 가로막은 셈이다.

         

         “…데이터 쪼가리 주제에 아주 건방져.”

         

         대충 견적은 나왔다. 괜찮다. 오히려 아까 그 유령 친구가 머물던 네트워크에 펼쳐진 그물망-방화벽-이 훨씬 더 촘촘하고 억세서 위험한 물건이었다.

         

         진짜 거기는 뭘 위한 네트워크였던 거일까?

         

         아무튼, 그렇다고 구멍을 억지로 벌리고 틈을 만들어서 넘어간다는 건 아니다. 그러면 현실처럼 지문이 찍히듯 아주 선명한 흔적이 남는다. …반대로 말하면 완전히 박살내 버려도 후처리만 깔끔하게 할 수 있다면 전혀 괜찮다는 거지만.

         

         …꿀렁.

         

         고요하던 호수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손바닥이 맞닿은 그물의 일부가 흔들리며 검은색으로 물들어간다.

         항상 내 작업의 은밀성을 보장해주던 전매특허, 나라는 정보 뭉치 자체를 통과시켜도 문제없는 데이터로 오인하게 만드는 위장 신호를 흘려 넣는다.

         

         전체를 구성하는 논리(Logic)나 골조(Structure)까지 손댈 필요도 없다.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면 그만이니까.

         

         심지어 제로와의 통신선을 유지한다는 조건이 없었다면 망의 일부를 감염시키지 않고 나 자신만 벽을 투과하듯이 넘어갈 수도 있었고.

         

         “좋아…!”

         

         그렇게 방화벽을 무사히 통과해서 어디의 누군가가 열심히 구축해 놓은 전산망에 허락도 없이 내디디는데 성공.

         

         사과? 미안하지만 그런 건 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더 실례되는 행동을 해야 하는데 벌써 고개 숙여서야 쓰나.

         

         “자… 자, 거기 날개 달린 편지 봉투(Email)들. 도망가지 말고 얌전히 내 앞을 거친 다음 송신되라…?”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갑자기 중력이라도 생긴 것처럼 압력이 가해진다.

         원주인이 현재도 바쁘게 통신을 하고 있는지, 허공을 날아다니는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끌어내려서 내용을 복사한 후 해방하기 시작했다.

         

         개인정보 보호? 안타깝게도 상식이 부족한 시민이라 전 그런 거 모릅니다. 꼬우면 공공기관이나 기업에 직통 문의하십쇼.

         

       

       

         [ …요청에 따라, 용병들을 자극해 경쟁 구도는 확실하게 형성. ]

         [ 허나 선발된 담당자의 느슨한 설명과 그에 반비례한 부추김, 하필 후순위 참가자였던 제미니 노드의 격렬한 반응도 합쳐져 원래 시험 내용이 망각되고 지나치게 과열됨. ]

         [ 현재는 금고 내부에 있던 흔적 자료나 메타데이터가 온전한지도 판단하기 어려움. ]

         [ ……따라서 이는 온전히 블랙마켓 측의 인선 미스로 인한 결과이며, 우리는 계약 내용에 따라 성실히 작업을 수행했기에 책임지기 힘듬을 명확히 밝히는 바…. ]

         

       

       

         “어우, 이게 다 뭐야.”

         

         그나저나 내용이 어지럽다. 괜히 내 머리까지 아파진다.

         

         바이러스를 풀었던 게 일부러였다는 건 잘 알겠는데… 원래 시험? 내부 흔적 자료? 그냥 라비린스급 금고를 뚫고 들어가는 게 끝이 아니었나?

         

         레오나르 경… 댁, 얼마나 일을 대충했길래 시발 내부에서 이런 얘기가 나도는 건데요?!

         이러니까 원작에서도 골칫거리 취급당하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안 되겠다. 따로 함정이나 음모가 있던 게 아니고, 단순히 경쟁을 붙이는 게 목표였다는 걸 안 시점에서 만족하려고 했는데 따로 실력 모자란 해커 팀을 고용해서라도 더 우수한 인재를 찾으려는 게 누구인지 얼굴 좀 봐야겠다.

         

         뿌려 대는 크레딧 양을 보면 꽤 상류층 같은데, 어쩌면 나도 아는 원작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려울 건 없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그대~로 통신을 따라가면 의뢰주가 있을 스카이 박스로 연결될 테고, 거기서 아무 카메라나 신원 데이터를 훔쳐보면 호기심 해결 완료…!

         

         – 방해해서 죄송하나, 그만 일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엥…? 왜?”

         

         또 한차례 크게 도약해서 네트워크 경계를 넘어가려던 찰나, 제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기에 급하게 이동을 멈췄다.

         으레 하던 충고나 보고였다면 움직이면서 들었겠지만… 일어나야 한다고? 우째서?

         

         – 방금 막 168번이 기권했습니다. 아니면 아예 번호가 불린 순간에 재차 통신을 드릴 테니, 그때 다이브를 종료하시겠습니까? –

         

         ……벌써?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컴퓨터 그만하고 나와서 밥 먹어라(아님)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 눌러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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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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