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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3

   타닥, 다라라락-

     

   빛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바닥.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얼마간 퍼졌을까.

   의식을 잃었던 하링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링, 언제까지 자려는 거야? 밥 다 식어.」

     

   하링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오래전 자신의 오빠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해주던 말이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던 오빠는 늘 그렇게 다정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하염없이 다정했다.

     

   아침 식사하며 오빠와 떠들고, 훈련하러 가는 여느 때와 같던 날.

   하링은 아직도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햇빛 아래 빛나는 라그렌 가문의 지붕 위.

     

   핏빛 같은 긴 장발을 지닌 한 남자가 붉은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손을 한차례 흔들던 그 모습을 말이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군가하고 멍하니 보던 하링의 눈에 비춘 건 그자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늘은 황색으로 번졌다.

   침식종들이 대거 치솟아 오르며 라그렌 가문의 일대가 세계 침식으로 뒤바뀐 것이었다.

     

   치솟아 오른 침식종들이 라그렌 가문의 식솔들을 습격하고, 라그렌 가문의 기사들과 여러 이들이 침식종과 필사적으로 맞섰다.

     

   독왕과 가문의 기사단이 있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독왕과 기사단은 모종의 이유로 원정을 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라그렌 가문은 그야말로 가장 외부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아직 어린 하링이 벌어진 사태에 멍하니 있던 그때.

     

   「하링!」

     

   하링을 발견한 그녀의 오빠가 하링을 붙잡고 달렸다.

   그녀의 오빠는 하링을 지키고자 필사적이었다.

     

   타고 나기를 몸이 약했던 오빠.

   그 탓에 별다른 무위를 이룩하지 못했지만, 독에 관해서만큼은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그다.

     

   그러니 그는 침식종을 피하고자 하링을 데리고, 고약한 독향이 짙어 냄새를 맡기 힘든 독방에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여기라면 침식종도 질색하며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하링이 한 가지 실수하고 말았다.

     

   「꺅?!」

     

   독방으로 향하던 도중 그 근처에 있던 침식종이 하인의 머리를 뜯어 먹는 모습을 보고 무심코 비명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 비명은 침식종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그녀의 오빠는 즉시 하링을 독방의 안쪽에 밀어 넣고, 침식종을 향해 독약을 던졌다.

     

   「그리에엑!」

     

   그러자 분노한 침식종은 반쯤 녹아내린 머리와 함께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 놈을 보며 그녀의 오빠는 독방의 문을 바깥에서 걸어 잠갔다.

     

   「오빠!」

   「하링아, 우리 숨바꼭질 놀이할 때 숫자 세기 놀이 자주 했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남은 독약을 꺼내 쥐었다.

     

   「숫자를 계속 세. 하링이 너가 아는 숫자까지 계속. 그전까지는 누가 불러도 절대로 밖에 나와서는 안 돼. 알겠지?」

   「오빠, 오빠! 안 돼 아링 오빠, 안 돼!」

     

   그 순간 침식종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링은 바깥에서 들리는 참혹한 소리에 몸을 벌벌 떨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해야 7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사고는 오빠의 말을 듣는 것밖에 없었다.

     

   「1, 2, 3…….」

     

   그러니 그녀는 계속 숫자를 셌다.

   숨바꼭질을 잘하던 하링은 아링과 숨바꼭질할 때 아링이 그녀를 찾지 못할 때를 대비해 숫자를 다 세어도 자신이 찾지 못한다면 나와 달라고 했던 거였다.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녀는 꾹 참고 오빠의 말대로 숫자를 계속 세었다.

     

   그리고 숫자를 세고, 또 세었을 때.

   어느샌가 바깥에서 소리가 줄어들다 이내 점차 사라졌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그녀가 어느새 모든 숫자를 다 세었을 때였다.

   하링이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 앞에 다가섰다.

     

   그러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링.」

     

   끊기듯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하링은 즉시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바깥에서 그녀의 오빠는 잠긴 문을 꽉 잡고 있었다.

     

   「널 구하, 려고 한 게 아니야. 내가 살려다가 이렇게 된 거야. 그러니 넌 아무 잘못 없어. 알, 겠지.」

     

   마지막까지 자상한 오빠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누가 봐도 자신의 실수 때문임에도 그는 어떻게든 하링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그렇게 말하였다.

     

   하링은 그 앞에 흐느껴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뒤, 하링은 그 자리에 탈진하듯 기절했다.

   그녀가 발견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아링의 시체는 하체와 상체가 분리되어 있었다.

   침식종의 손톱에 찢어발겨진 탓이었다.

     

   그리고 라그렌 가문의 보물이라던 독혈전(毒血典)이라는 책 한 권이 없어졌다.

   그 이유가 세계 침식자 탓인지 혹은 침식종 탓에 훼손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소식을 들은 황제가 직접 황위 기사단까지 부랴부랴 보내며 라그렌 가문을 도왔기에 망정이었지.

   자칫했다간 라그렌 가문의 뿌리가 뽑힐 뻔했던 대사건.

     

   그때 제국에게 빚을 진 독왕은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황가와 귀족파 사이에 중립적 성향을 취하던 라그렌이 황가로 확실히 돌아선 것이었다.

     

   그것이 라그렌 가문이 황가에 진 빚이었다.

     

   ‘오빠.’

     

   눈을 질끈 감은 하링이 서서히 눈을 떴다.

   오랜만에 다시 떠오른 기억 탓에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녀의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세계 침식으로 인해 오빠와 같은 허망한 죽음이 더 이상 없었으면 했고.

   다른 하나는 라그렌 가문과 오빠를 죽인 세계 침식자를 찾아내 복수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세계 침식을 막기 위해 영웅을 육성하겠다던 라헬른 아카데미에 그녀도 선뜻 입학했다.

     

   하지만 그런 라헬른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하링과는 달라 보였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입학생들은 세계 침식을 막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권 다툼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녀는 하루 만에 그들에게 질려 버렸다.

     

   그들과 그다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오빠가 헛된 죽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이었으니까.

     

   그러나 딱 한 명.

   이번에 실습 임무를 같이 나오게 된 동갑내기 소년은 달랐다.

     

   「난 여기 시답잖은 권력 놀음하자고 온 거 아니다.」

     

   카란디스와 메리를 보며 내뱉은 크라슈의 말이었다.

     

   「세계 침식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늘어 가고 있고, 나는 만약의 사태를 막으려고 라헬른 아카데미로 와서 배우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크라슈에게 시선이 닿았다.

     

   발하임 크라슈.

   그 유명한 발하임 가문의 직계.

     

   과연 명문가라고 해야 할까.

   마음가짐 자체가 훌륭한 이였다.

     

   내심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을 때.

   어쩌다 보니 크라슈와 하링은 같은 조가 되었다.

     

   크라슈는 강했다.

   무려 밤의 신의 힘을 담아낸 피조물을 상대로 승리했고, 지시 또한 확실하며 발 빨랐다.

     

   게다가 그는 겉으로는 틈을 드러내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속내는 치밀하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했다.

     

   한 번의 실수가 목숨을 앗아가는 곳이 세계 침식이다.

   그는 그런 세계 침식을 무척이나 많이 경험을 해본 것 같았다.

     

   마음속, 일부분 살짝 동경심이 들었다.

   또래 중 자신만큼이나 세계 침식을 상대로 진지하게 임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내심 안도했다.

     

   그러던 그에게.

   자신이 방심해서 그가 침식종에게 납치당하게 하고 말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하링은 아직도 가슴이 섬찟했다.

     

   세계 침식 속에서 저질렀던 자신의 실수로 결국 오빠가 죽어야만 했던 그 안일함과 방심이 가장 싫었던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크라슈를 무심코 자꾸만 오빠로 겹쳐 보고 말았다.

     

   나이는 같지만 묘하게 또래 같지 않은 탓도 있었던 모양이다.

     

   “윽.”

     

   하링이 배에서 오는 통증에 자기 배를 감쌌다.

   그러곤 그제야 아까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뇌가 신체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걸어두는 리미트를 강제로 푸는 백청단을 먹은 뒤.

   그녀는 데카라비아의 턱에 비수를 박아 넣었었다.

     

   그 뒤에 데카라비아가 날린 일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한 뒤 그녀는 정신을 잃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거기에는 등을 보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마지막 순간 흐릿한 기억이 스쳐 갔다.

   중간에 아주 잠시 돌아왔던 의식 속 그가 자신을 안은 채 추락하고 있던 모습이 말이다.

     

   곧장 다시 의식이 끊긴 탓에 기억이 애매했지만, 그때가 떠오르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크라슈가 추락하던 자신을 구해준 것이었다.

     

   당황한 그녀는 왜인지 힘이 쭉 빠지는 느낌과 함께 그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나 무리했던 크라슈다.

     

   그런 그가 그 높이에서 자신을 받아내 추락까지 했다면 절대 멀쩡할 리가 없었다.

     

   “크라슈.”

     

   그를 부르며 하링이 어깨를 손으로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윽!”

     

   그녀는 그에게 닿은 손이 순간 불타는 줄 알았다.

   놀란 그녀가 크라슈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크라슈의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일어났, 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빨갛게 익은 그의 얼굴을 본 그녀의 눈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숨을 내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크라슈는 적호단의 여파를 겪은 상태로도 무리하게 힘을 끌어 썼다.

   그 결과 몸 내부가 그야말로 진탕이 났다.

     

   그런 와중 추락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또 무리했다.

   추락사를 면하기 위해 그가 이제는 남지도 않았던 힘을 또 쥐어 짜냈을 거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크라슈는 그 대가로 지금 몸이 불덩이와 같았다.

     

   적호단의 여파는 그의 몸이 약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부를 불로 전부 지져 버리는 듯한 통증을 그에게 줄 뿐이었다.

     

   “나를, 나를 왜 구했어. 안 구했다면 이렇게까지는…….”

     

   당황한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그러자 크라슈는 그녀를 잠시 보다가 눈을 감았다.

     

   “너 구, 하려고 한 거 아니야.”

     

   하링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죽은 오빠가 했던 그 말을 크라슈가 똑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러니까 얌전, 히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하링의 입술은 꾹 깨물어졌다.

     

   그사이, 하링이 일어난 걸로 됐다는 듯 크라슈는 고개를 떨구었다.

   적호단의 여파를 감내하기 위함이었다.

     

   하링이 그런 크라슈의 뒤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그가 적호단의 여파가 다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이 상태인 크라슈는 오히려 옆에서 무언가 해주는 것이 더더욱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날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

   그 사실이 무척이나 자신을 무기력하게 느끼게 했다.

     

   “…….”

   

   

   

   

     

   그녀는 독주머니를 꽉 끌어안았다.

   그 독주머니는 다름 아닌 당시에 오빠인 아링이 침식종과 맞서며 사용했던 유품이었다.

     

   기다리는 거라면 자신 있다.

   몇 번이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죽지 말아줘.’

     

   그녀의 마음속.

   오늘을 깊이 새긴 채.

     

   하링은 크라슈가 무사히 눈 뜨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신은 정말 영영 망가지고 말 것 같았으니까.

     

     

   * * *

     

     

   적호단의 여파가 유지되는 동안.

   크라슈는 눈을 감고, 그 여파를 오롯이 견뎌내고 있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크라슈는 적호단의 여파 자체에는 별 타격이 없었다.

     

   그야, 매일 같이 몸속을 지지는 게 크라슈니까 말이다.

     

   몸 내부가 불타는 여파쯤이야.

   매일 같이 멸화침식을 통해 속을 지지고 볶는 크라슈에게 별거 없었다.

     

   그러니 적호단의 여파는 크라슈에게 문제가 안 됐다.

     

   단지, 크라슈는 오히려 이참에 몸에 남은 적호단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적호단은 라그렌 가문의 비술로 만들어진 독약이다.

     

   몸이 타는 듯한 고통은 둘째 치고, 그 효력은 확실하게 흡수할만했다.

     

   독도 잘 쓰면 약이다.

   그러니 크라슈는 이 기회에 냉큼 적호단을 삼키고 있던 거다.

     

   [ 미친놈, 또라이 같은 놈, 제정신 덜 박힌 놈. ]

     

   크림슨가든이 자꾸 욕을 하는 덕분에 집중이 깨지긴 했지만.

   어쨌든 크라슈는 적호단을 쭉쭉 흡수해 나갔다.

     

   아까 말했듯 독도 잘 쓰면 약이라는 것처럼.

     

   크라슈는 무리를 한 탓에 가동조차 힘들었던 몸이 오히려 한결 나아짐을 느꼈다.

   돌아가서 제대로 휴식하며 치료받아야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그러기를 한참.

   얼마 안 가 적호단을 전부 흡수했을 때 크라슈가 눈을 떴다.

     

   몸 전신에 땀이 흠뻑 젖고, 얼굴이 화끈거리긴 했지만 괜찮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적호단 덕인지 오러의 양이 이전보다 조금 더 늘었다.

     

   ‘이거 좋네.’

     

   적호단의 여파를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효력이 있을 줄이야.

   다음에 기회 되면 하링에게 몇 개 더 얻어먹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하링.”

     

   크라슈가 그녀를 부르자마자 화들짝 놀란 그녀가 크라슈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크라슈를 보던 하링은 이내 망가져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다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몸은? 아픈 곳은?”

     

   갑작스럽게 그녀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왔다.

   그 얼굴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라 크라슈는 조금 당황했다.

     

   얘가 왜 이러지.

     

   “부축해줄까, 아니면 업을까.”

     

   이번에는 진심인 것 같았다.

   크라슈는 뒤늦게 그녀가 자신을 구한 걸 신경 쓰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 구하려다 이렇게 된 건 아니다. 신경 쓸 거 없어.”

     

   마지막 순간에는 몸이 먼저 움직이긴 했지만.

     

   하링의 인비저블과 독은 추후의 일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크라슈도 선뜻 추락하던 그녀를 감쌌다.

     

   여기서 죽기에는 그녀가 앞으로 해줄 일이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크라슈는 알지 못했다.

   그 말이 더더욱 하링에게 깊숙하게 파고든다는 것을 말이다.

     

   하링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이내 대답했다.

     

   “알겠어.”

     

   그러나 대답한 것에 비해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했다.

     

   ‘그러고 보니 라그렌 가문이 은혜를 상당히 중요시했던 거 같은데.’

     

   독왕이 황가의 명으로 하덴하르츠를 멸문시킨 것도 전부 황가에 진 빚 때문에 행해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하링, 이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크라슈는 동시에 아까 전 하링이 보였던 이상 행동도 떠올렸다.

   유달리 자신을 살리는 것에 집착하던 그녀다.

     

   ‘아까 보니 무언가 자신 대신 희생한 이에게 과도하게 신경 쓰는 트라우마도 있는 모양이고.’

     

   거기에 가문에 규율까지 얽매였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크라슈는 그녀에게 진 빚을 빨리 청산 시켜주기로 했다.

     

   그럼 한결 편안해하겠지.

     

   “신경 쓰이면 돌아가서 독 관련으로 연구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좀 도와줘. 그거면 된다.”

     

   크라슈는 저주와 독을 관련지어 연구하고픈 게 있었다.

     

   독 연구란 말에 그녀의 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 빠른 크라슈라도 그녀의 속사정을 모르는 이상 그 부분에 관해서까지 알 수 없었다.

     

   하링은 이내 양 주먹을 꾹 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 알았어.”

     

   눈에 무엇이든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좋은 일이겠거니 싶었다.

     

   “그것보다 이제 돌아가자.”

     

   적호단 덕분에 조금은 원기가 회복된 몸이다.

   크라슈는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아래까지 내려온 만큼 올라가는 길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크라슈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크라슈의 제 육감에 기척이 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둑한 위에서 나무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크라슈에게 한 인물이 보였다.

     

   “크라슈, 하링!”

     

   오래전 함정에 추락한 자신을 버리고 갔던 아닉스가 아닌.

   목천도식을 운용하는 게 한계임에도 자신들을 구하고자 내려온 아닉스 말이다.

     

   크라슈가 아주 짧게 웃음을 삼켰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참, 모를 일이다.

     

     

   * * *

     

     

   임무를 마치고, 유적을 빠져나왔을 때쯤.

   어느새 하늘 위 여명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유적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모래와 함께 감추었다.

   또 밤이 될 때까지 자기 모습을 줄곧 숨기고 있겠지.

     

   “괜찮아?”

     

   하링이 묻자 크라슈는 팔을 가볍게 붕붕 휘둘러 보였다.

     

   “멀쩡해.”

   [ 허세 부리긴. ]

     

   크림슨가든의 핀잔이 들려오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으면 멀쩡하다는 게 자신의 지론이었으니까.

     

   그러는 크라슈의 시선이 아닉스에게 닿았다.

   크라슈와 눈이 마주친 아닉스는 평소와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은 예전에는 크라슈가 질색하던 웃음이었다.

   가짜 같은 웃음이라고 크라슈가 늘 평하던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색안경이었나.’

     

   처음, 유적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크라슈는 아닉스의 웃음을 가짜라 여겼다.

   녀석은 쌍아단 일원을 자신의 패라고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결국 배신당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에워쌌었다.

     

   그러나 아닉스의 진심을 엿본 지금.

   크라슈는 그제야 자기 색안경이 완전히 벗겨졌음을 깨달았다.

     

   “고생했다. 네 덕에 살았어.”

     

   그리고 툭 던진 크라슈의 말을 듣고, 아닉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다시금 웃었다.

     

   “크라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어.”

   “나도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마음 한편이 후련해졌다.

     

   크라슈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펜달을 통해 회귀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우고.

   이번에는 아닉스를 통해 사람은 사소한 계기로도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어쩌면 이 배움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발목 잡을 수도 있었다.

   머릿속에 반드시 빼앗겠다는 스킬들을 두고, 크라슈는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내가 혼자서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면 아서 녀석도 혼자 막을 수 있었을 거다.’

     

   세계 침식이 최흉으로 번질 때.

   세계 각지가 엉망이 된다.

     

   아서는 한 개의 최흉을 막을 수 있을지언정 다른 최흉을 동시에 막을 수 없다.

   그리고 그건 크라슈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크라슈는 지금껏 여러 관계를 쌓아 올린 것이었다.

     

   ‘창공의 세대를 바로 잡는다.’

     

   어딘가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멸망을 막아낼 단 하나의 길로가 보인 것이다.

     

   ‘나는 그 맨 앞에 선다.’

     

   비가 쏟아지고, 모래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꿋꿋하게 가장 앞에서 견뎌내는 것이 자신의 역할.

   창공의 세대는 그 뒤를 따라 하늘 높이 날아올라 기어코 멸망을 막을 것이다.

     

   크라슈의 눈이 밝게 빛났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리는 크라슈의 눈동자는 마치, 별과 같이 밝았다.

     

   천추성(天樞星).

   엘핀이 말한 길잡이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크라슈다운 생각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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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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