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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아침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와 탐정 사무소 전체에 황금빛 줄무늬를 드리웠다.

    옷걸이에 걸린 내 정장 코트는 햇빛을 받아 노란빛을 방안에 흩뿌리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갓 내린 커피 향이 가득했다.

    익숙하지만 아침에 활력을 더해주는 향기였다.

    고요한 아침과 대조를 이루는 시끄러운 TV 소리를 들으면, 평소대로의 탐정 사무소 아침인 것이 물씬 느껴졌다.

    내가 앉은 흔들의자에서는 편안한 리듬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손에 든 신문지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신문에는 얼마 전에 일어났던 ‘트리니티 제3 연구소’ 사건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도대체 아귀는 왜 관악구로 향했는가?>

    <기준이 강화된 오브젝트 라이선스, 아직도 세계 기준에 못 미쳐.>

    신문의 페이지를 넘기자, 회색 사신에 대해 분석한 기사가 양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또, 이런 기사가 실렸군.

    요즘 들어서 회색 사신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기사들이 많이 보였다.

    온라인,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오브젝트 라이선스가 없는 불법 인터넷 신문들이 심했다.

    어떤 곳은 이게 언론사인지, 회색 사신 팬클럽인지 구별이 안 되는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별다른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매우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런 경솔하고 위험해 보이는 기사들이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니.

    하지만 내 감에 따르면 회색 사신을 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될수록 한국이 안전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선배! 저희 왔어요!”

    후배 1호가 탐정 사무소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길쭉한 가방에서 커다란 망치를 꺼내며 해맑게 웃는 후배 1호.

    그리고 그 뒤편에서 후배 2호와 후배 3호가 들어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황금 뿔이 길게 돋아난 후배 2호와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후배 3호는 각자 자리에 앉았다.

    후배 3호는 여전히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걸 보니 남동생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후배 2호 쪽이었다.

    어렸을 때만 성장하는 황금뿔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는데,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다.

    뭐, 짐작 가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후배 2호 쪽에서 말해주기 전에는 언급하지 않는 쪽이 좋겠지.

    데스크 업무를 담당하는 후배 3호가 컴퓨터로 뭔가를 확인하더니 말을 걸었다.

    “탐정 선배. 의뢰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자세한 사항은 휴대전화에 보내뒀어요.”

    딩동.

    알림 소리와 함께 후배 3호가 보내온 의뢰 개요가 도착했다.

    <검은 녹 증후군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종 사건 조사 의뢰.>

    흐음, 검은 녹 증후군이면 황금뿔처럼 오브젝트가 돋아나는 병의 일종이었다.

    황금 뿔이 주변 사람의 호감을 끌어내서 문제가 된다면, 검은 녹은 반대로 혐오를 끌어내서 문제가 되는 증후군이었다.

    황금 뿔 증후군을 대상으로 한 실종이라면 납치겠지만 이번 사건의 대상은 검은 녹 증후군이었다.

    검은 녹 증후군이 납치 대상이 되는 사례는 거의 없으니, 살인 사건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어.

    맡아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포기해야겠군.

    “지금은 검은 녀석의 아가씨를 구하기 위한 의뢰를 수행 중이니까, 포기해야겠지.”

    “아, 역시 그런가요?”

    후배 3호는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후배 2호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그거, 제가 할게요!”

    후배 2호는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의뢰, 보수도 상당하고 오브젝트 병에 걸린 사람을 대상으로 납치, 실종이라니! 왠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요.”

    후배 2호는 보기 드물게 살짝 상기된 표정이었다.

    뭐, 황금뿔 증후군도 납치, 실종이 빈번하지만, 검은 녹이랑은 조금 방향성이 다르단 말이지….

    “이 의뢰, 아마도 검은 녹 증후군에 걸린 사람이 의뢰인일 확률이 높을 텐데? 괜찮겠어?”

    “네!”

    밝은 표정으로 답하는 후배 2호.

    전혀 모르는 것 같은 해맑은 표정이었지만, 후배 1호도 아니니까 믿어줘야겠지.

    검은 녹은 혐오 받는 오브젝트.

    반대로 황금 뿔은 애호 받는 오브젝트.

    두 가지 오브젝트 증후군 모두 실종 사건이 많긴 하지만, 결코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보긴 힘들 텐데.

    특히, 검은 녹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황금 뿔 증후군에 걸린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황금 뿔과 검은 녹은 정부 지원부터 꽤 차이가 나니까,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쉬웠다.

    살인 사건인 데다가, 검은 녹 관련이니 분명히 위험하겠지.

    하지만 이성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후배 2호의 가슴팍에 숨은 존재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해봐. 의뢰인 대할 때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네!”

    후배 2호는 후배 3호의 자리로 찾아가서 의뢰 내용을 가져가더니 자신의 도구들을 챙겨서 탐정 사무소를 나가버렸다.

    후배 2호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도 코트를 챙겨서 일어났다.

    “그럼 슬슬 우리도 나가보자고.”

    후배 1호와 나는 후배 3호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소를 나섰다.

    ***

    천천히 좌우로 살랑살랑.

    사신이를 뒤에서 껴안으면 머리 위의 안테나가 살랑살랑 사람을 유혹했다.

    냠.

    입으로 안테나를 물면 안테나가 버둥거리다가, 입 밖으로 도망가 버린다.

    앗, 자기가 먼저 유혹했으면서 도망가 버렸어.

    살짝 소란스러운 사신이의 격리실.

    피아노를 치는 황금 사신들을 바라보며, 사신이의 말랑말랑한 뱃살을 만지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아, 행복해.

    원래라면 이런 행복한 시간이 사라질 뻔한 위기가 왔었지만, 잘 해결되었다.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해서 그런지, 사신이가 격리실에서 탈출한 사소한 사건이 터진 덕분이었다.

    사신이가 격리실 탈출하는 건 일상적인 일인데, 오브젝트 협회가 볼 때는 아니었나 보다.

    결국 사신이를 자극할 우려가 있는 민간 공개는 당분간 금지되었다.

    오늘은 무슨 변덕인지, 사신이는 파란 도마뱀을 잡아서 자기 격리실에 있는 피아노 위에 던져두고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멋진 연주였다.

    그 연주에 자극받았는지, 황금 사신이들도 피아노 위로 올라와서 파란 도마뱀이랑 팔짱을 끼고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음악은 조금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좀 더 귀엽고 활기찬 소리가 되었다.

    황금 사신이도 귀여워!

    하지만 꿈같은 시간에는 언제나 끝이 오기 마련.

    무서운 김중뢰 선배가 격리실 문을 두들겼다.

    김중뢰 선배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회색 사신 정기 보고서.>

    아 맞다.

    지난달에 협회로 제출해야 했는데, 까먹고 있었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격리실을 나섰지만, 선배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히잉.

    **

    버려진 도시 한가운데 황량하고 섬뜩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폐허에는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텅 빈 거리 위에서 말 없는 파수꾼처럼 늘어서 있었다.

    하늘은 왠지 칙칙하고 흐린 회색을 띠고 있어서, 폐허에 우울함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 인적 없는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배회하고 있었다.

    옷이 너덜너덜한 추레한 몰골의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오랜 고통으로 일그러져, 푹 꺼진 뺨과 움푹 패인 눈동자로 초췌해 보였다.

    손에는 처참한 몰골의 들개 한 마리가 들려 있었고, 양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폐허 속을 정처 없이 걸으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일관성이 없고, 기억과 단편적인 생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하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는 등 이 남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명백해 보였다.

    어느새 천장과 벽이 꽤 온전하고, 생활감이 남아 있는 폐허에 도착한 남자는 개의 사체를 손가락으로 후벼파서 폐허의 벽에 문질러 발랐다.

    너무 세게 문질러서 손끝에서 피가 터져 나와 너덜너덜해져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혼돈과 광기에 젖어있던 눈동자에 천천히 지성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욱신거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또, 이런 짓을.”

    콘크리트 벽에는 피로 물든 둥근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스스로 그린 문양이 분명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을 놓아버리는 남자는 죽지 못해서 살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때,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이 폐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불청객의 등장에 잔뜩 긴장으로 하고 돌아보니, 그곳에는 램프를 잔뜩 가지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녹이 슨 길쭉한 철근을 들이밀며 경계하는 초췌한 남자를 향해서 램프의 남자가 말했다.

    [이런 안타깝게도 꽤 힘들어 보이는군요.]

    얼굴을 노려보려고 해도, 초점이 맞지 않는 수상한 남자.

    오브젝트임이 분명한 남자를 보고 초췌한 남자는 철근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넌 뭐야? 당장 저리 꺼져!”

    초췌한 남자는 하루에 몇 시간 안 되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저런 수상한 남자에게 할애할 생각이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램프의 남자는 살짝 웃는 것 같더니 말했다.

    [저로 말하자면 계약의 오브젝트. 좀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표현을 하자면, 계약의 악마라고 불러주시죠.]

    [정신병을 낫게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와 계약을 하나 하는 게 어떠신지요.]

    초췌한 남자에게 악마의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절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냄새도 같이 났지만 말이다.

    ***

    귀찮게 달라붙던 예린이가 김중뢰에게 끌려가자, 격리실은 황금 사신과 파란 도마뱀의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찼다.

    파란 도마뱀이 현란한 발놀림으로 피아노를 두들기자, 황금 사신도 그것을 따라서 발을 놀렸다.

    하지만 제대로 따라 할 수는 없어서, 황금 사신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요즘 검은 펭귄 텔레포트로 기묘한 감각을 느껴서, 시간이 빌 때마다 그 감각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이 기묘한 감각의 원인은 황금 사신이었는데, 뭔가가 달랐다. 

    집 나간 불량아 황금 사신이라서 그런 건가? 

    다른 황금 사신처럼 미니 사신 정원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녀석이었다.

    애착 인간이 얼마나 좋길래 계속 들러붙어 있는 건지 좀 궁금하기는 했다.

    심심할 때 찾아가볼까?

    ***

    후배 2호가 탐정 사무소를 나서자, 그녀의 가슴팍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앗, 지금 나오면 안 돼!”

    그녀의 가슴팍에서 황금 사신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후배 2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누르자, 쓰다듬는 줄 아는 건지 헤실헤실 웃는 황금 사신.

    그 황금 사신에게는 특이하게 황금색 뿔이 돋아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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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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