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4

        누군가가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볼 것이다. 그리고 시민정신이 투철하다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려 하겠지.

       

        “언니, 죄송하지만 오늘은 같이 하교하지 못할 것 같아요.”

       

        로즈마리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 로즈마리는 공녀라는 신분도 잊어버린 채 뛰쳐나갔다. 주책맞은 발걸음이었다.

       

        “공녀님이 왜 저러시지?”

        “나랑 싸우다가 지쳐서 술 마시러 간 걸 거야.”

        “프레이, 그건 아닌 것 같아.”

       

        보나 마나 이 일을 동료들에게 알리러 간 거겠지.

       

        순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하더라도 마왕령까지 가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내 추측이 맞다면 당장 몇 시간은 스코프로 관음을 당할 일이 없을 것이다.

       

        호기였다. 지금 안 움직이면 그건 등신이다.

       

        “너희 둘도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 있어. 나는 선생님이랑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올 때 캔맥주!”

        “프레이, 기숙사에서는 음주 금지잖아.”

        “…진짜?” 

       

        프레이는 로테에게 포댓자루처럼 업혀서 돌아갔다. 복도 너머로 내려달라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이제 남은 건 교양관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가서 두 가지를 확인하는 일뿐.

       

        하나는 헤를라인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나를 교양관 지하로 부른 건지 알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멜이 그 장소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버멜이 그곳에도 없다면…. 뭐.

       

        [뭘 어떻게 하시게요?]

       

        나중에 찾아내서 조져버려야지.

       

        […….]

       

        양장본과 알맹이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교양관에 도착한 뒤였다.

       

        지하실로 들어가자 탁하고 습한 공기가 코를 찌른다.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약속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려 했다.

       

        – 철컥

       

        시발 뭔데. 왜 잠겨 있는 건데.

       

        “여기가 아닌가?”

       

        내 스스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금안족의 기억력은 타 종족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마당인데 내 머리가 금붕어만도 못할 리 없잖아.

       

        응? 없잖아.

       

        누군가가 안에서 도의적으로 잠근 건가 싶어서 문을 두들겨 보았다. 똑똑똑.

       

        똑똑똑.

       

        똑똑. 

       

        똑.

       

        쾅쾅쾅!

       

        – 누구세요…?

        “여세요.”

        – 아니, 누구시냐니까요?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다. 여자인 것 같은데, 우리 또래는 아닌 모양이네.

       

        목소리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진다. 내가 너무 겁박을 줬나?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주인님, 요새 어디 불편하세요? 왜 가끔가다 예민하게 구시는지….]

       

        “흐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왼손에 스태프를 쥐고 있었다. 손으로 점잖게 노크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됐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아서 그런 건가? 나는 픽 웃으며 캘리퍼스를 아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1학년 학부생인 에테르입니다. 헤를라인 선생님의 소개로….”

        – 그러면 암호를 대 주세요.

       

        암호?

       

        그런 건 없었는데.

       

        “암호 같은 건 못 들었는데요.”

        – 아뇨. 분명히 있습니다.

        “…계륵?”

        – 틀렸습니다.

        “문 부수고 들어가도 돼요?”

       

        마지막 물음에 당황이라도 한 건지 안쪽에서 리틀리버 날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잠잠해지기를 잠시, 문 너머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 실례했습니다. 암호는 괜찮으니까, 알고 있는 지역명을 세 곳 말해주시겠어요?

       

        뜬금없는 말에 잠깐 사고가 느릿해졌다. 그러나 곧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서울, 부산, 대전. 국내 대도시 세 곳을 생각나는 족족 나열했다. 그러자 열려라 참깨라도 외친 것처럼 철문이 뒤로 젖혀졌다.

       

        안에서 나온 남자의 얼굴을 보고 스태프를 다시 꺼냈다.

       

        “아, 잠깐…….”

       

        여기 있었구만.

       

       

        ** 

       

       

        요새 들어 분노조절장애가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막 대놓고 화내거나 그러는 건 아닌데, 정신을 차려 보면 꼭 누구 머리를 스태프로 찍고 있더라.

       

        “잠깐만! 내가 다 해명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것 좀 치워!”

       

        대뇌를 거치지 않고 휘두른 스태프가 버멜의 머리 위로 직행했다. 버멜은 세계수 가지처럼 생긴 스태프로 내 스태프를 막아냈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진짜 좆망겜…!”

       

        그래, 그랬지. 이거 보통 쉬운 게임이 아니라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을 뺐다. 버멜은 설악산이라도 오른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설명해 보자. 왜 학교도 자퇴하고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지.”

       

        우리 둘은 지하실 안쪽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중간에 내 기행을 본 몇몇 ‘동업자’가 경계했지만 버멜의 설득으로 잘 마무리됐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녀석을 위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던져주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얼굴을 닦으며 버멜은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 설명이랄 것도 없었다. 단 한 줄로 모든 게 이해됐으니까.

       

        “방학 동안에 로즈마리가 날 죽이려고 했어.”

        “…뭔 짓을 했길래.”

        “헤를라인 선생님을 북방에 못 가게 열 차례 넘게 막았거든? 그러더니 날 황궁으로 초대한 거야.”

       

        와. 그건 조금 무서운데.

       

        “거기서 연회를 벌였는데….”

        “했는데?”

        “그 녀석이 음식에 독을 타 놨어.”

        “뭔 독인데.”

        “…베릴륨.”

        “허, 참나.”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이거 완전 강아지한테 초콜릿 쥐여준 꼴이로군.

       

        “어디 그뿐이야?”

       

        이어지는 동향인의 자초지총.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세어보니 그곳에서만 5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어떻게든 자연사나 의문사로 만들려고 한 노력이 보이는 수법들이다. 언니언니 거리며 촐랑촐랑 쫓아다니던 그 로즈마리가 맞나 싶었다.

       

        “동족 입장에서 보면 귀여운 애일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이나 엘프 앞에서는 그냥 괴물이야. 나라 셋을 한순간에 몰락시키고 드워프를 몰살한 군단장이라고….”

       

        버멜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1. 자퇴하지 않았으면 로즈마리 손에 바로 죽었다.

        2. 그렇다고 틸레트를 바로 떠나려니 나 때문에 안 된다.

       

        “미리 못 알려준 거 정말 미안해. 다음부터는 말할 테니까…. 제발 여기 있어 줘.”

       

        이건 뭐 화낼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야 뒤통수를 맞더라도 기분만 찝찝하고 끝이겠지. 하지만 버멜은 뒤통수를 맞는 즉시 여신 앞에서 탭댄스를 추어야 하는 몸이다.

       

        이러한 차이점이 여유를 부리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만 안일해서 그에게 화를 내는 걸지도 모른다.

       

        금안족의 몸이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니 최대한 인간처럼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여기 사람들에게 앙금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오늘 회의는 아르가나 공작이 주도할 거야. 그때까지 30분 정도 있어.”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우리는 안젤리카 때문에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건 당연히 아카샤에 관한 것이다. 로즈마리가 서 보라고 재촉한 거울에서 그 녀석 모습이 비친 것도 그렇고. 어째 여러모로 불길한 녀석이다.

       

        그러나.

       

        “아카샤라고? 그런 애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퍽퍽한 감자를 먹은 것처럼 목이 턱 막혔다.

       

        “여름방학 때 처음 봤다고 헀지?”

        “응.”

        “그러면 여신이 만든 더미 데이터일지도 몰라. 원래라면 네가 그 시점에 여길 떠났어야 했거든.”

        “…….”

       

        내가 자퇴 안 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말인가.

       

        “진짜 좆망겜이네.”

        “내 말 맞다니까.”

       

        복사 버그야 뭐야.

       

        그 뒤로 몇 가지 계획을 창안하고 수정하니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여기서 나눴던 대화 중 가장 유의미했던 건 로즈마리가 남긴 거울에 관한 정체였다.

       

        “그건 ‘내면의 거울’이야.”

        “내면의 거울?”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게 해 주는 거울이라고 해야 하나…. 네 안의 원래 주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다가가는 건 좋지 않을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버멜. 그와 동시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버멜은 황망한 눈동자로 허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진한 날숨을 내뱉는다.

       

        “아직까진 괜찮네.”

         

        구체적으로 뭐가 괜찮다는 건진 몰라도 지레짐작은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내 최고혈압이 180mmHg를 넘어서는 순간 세계가 멸망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다들 모였나? 그럼 시작하도록 하세.”

       

        때마침 기품 있는 정복을 차려입고 지하실로 들어오는 사람들. 일부는 일면식이 있는 자들이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역모의 주모자인 아르가나 공작. 그는 학생회 선도부장인 샤디엘 아르가나의 부친이다.

       

        그 뒤로 로베스피에르 이사장이나 헤를라인 선생님 등이 뒤따른다. 그들 중 누군가가 나와 버멜을 향해 검지를 겨누었다.

       

        “저 아이들은 누구인가?”

        “저번에도 보셨는데 그새 잊으셨습니까? 에테르 양과 버멜 호르데 군입니다.”

        “흐음.”

       

        성게 같은 턱수염을 지닌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버멜과 나를 한 번씩 훑어본다.

       

        “엘프는 그저께 봐서 알겠군. 이 계집은 뭐 하는 녀석이지?”

        “금안족 소녀를 모르십니까?”

        “알다마다. 여긴 뭐 하러 왔냐는 말이야.”

       

        [뭐에요, 이 사람. 재수 없어.]

       

        랩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인간군상이다. 이런 사람 대처법은 따로 있지.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알아서 떨어져나간다.

       

        심지어 이러고 있으면 변호를 해 주는 사람이 더러 나타나기도 하고.

       

        “뭐 하러 오기는요. 이 소녀가 플레어를 개발한 친구라는 걸 모르십니까? 이번 공모에서 기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

        “플레어? 아, 그렇지. 하스펠트의 공을 빼앗아 갔다는 게 이 소녀던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들 알면서 왜 시치미를 떼나? 하스펠트 가문에서 연구하던 걸 하루 아침에 도둑질한 년이 있다던데!”

       

        한 대 쳐버릴까.

       

        …라고 생각하던 사이 버멜이 나를 잡아끌었다.

       

        ‘지금 죽이면 안 돼.’

       

        얘는 또 뭐라는 거야.

       

        아니. 솔직히 후려칠 생각은 있었어도 피떡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생각은 안 했거든? 내가 아무리 속세에서 뒤통수를 많이 까였어도 그 정도로 인심이 박하진 않아요. 공과 사는 구분한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귓속말에 나는 입매를 비틀고 말았다.

       

        ‘로즈마리의 수하야. 널 일부러 자극하는 거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

       

        오우.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