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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창난금호였는가. 내 그리 안 봤거늘.”

         

       자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덤덤한 안타까움이 서린 목소리였다.

         

       “왕야, 말씀만 하십쇼. 당장이라도 그 낯짝 두꺼운 사기꾼 새끼를 왕야 앞에 꿇려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저 말고 여기 견연 노인네들께서요. 전투는 제 전문이 아니잖습니까.”

         

       “아직은 되었다. 그이도 뭔가 사정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니더냐. 추궁은 상세한 전후를 알고서 해도 늦지 않는 것이니. 누구나 미처 말하지 못한 사정 하나는 품고 있지 않겠느냐.”

         

       “어쩜. 왕야께선 너무 무르십니다. 본래 배신자는 갈가리 찢어 본을 보여야 하는 법인데.”

         

       그리 말하는 연 파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꼬리를 가진 세 개의 혼불이 눈동자 안에 깃들어 천천히 회전하는 모양이었다.

       청이 보았다면 와, 시공! 폭풍! 하는 영문 모를 소리로 감탄을 참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그리고 청이 아닌 무림인이라면 다른 이유로 경악할 것이다.

       삼십년 전 연성파를 철저히 멸문시키고 모습을 감춘 전륜마녀의 전륜안이었으니.

       천하십대마공 중 하나인 전륜마겁의 특징이다.

         

       “되었느니라. 그 치를 처음 받아주었을 때, 제 본성이 사기꾼이라 언제까지고 참을 수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고가 대답하기를 그러하면 머물다 그때 떠나라 하였으니.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 생각한 모양이지.”

         

       “왕야……. 어쩜 마음이 이리 고우신지.”

         

       연 파가 훌쩍거리며 눈가를 훔쳤다.

         

       본래 중원의 은원은 넓고 깊은 대양과 같아, 칼을 차고 나아가다 보면 깊숙이 잠기고 만다.

         

       그렇게 가라앉아 세상을 보면, 물 밖에서 본 창대한 아름다움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

       어둡고 축축한 심해의 황량한 풍경이 비친다.

       무림의 은원이란 그저 원한의 축적이기에.

         

       은혜는 누군가의 원한이 된다.

       사람은 본래 은혜를 쉽게 잊고 원한만 단단히 새기는 생물이었다.

       종래에 남는 것은 원한뿐이니, 무림인이 결국 닿게 되는 장소가 질척하게 몸을 휘감는 원한의 늪 속이었다.

         

       그러니 무림에 뜻을 잃어 누군가는 심산유곡 외진 곳에 처박히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칼을 버리고 평범한 장삼이사의 삶을 연기하기도 하나 그 끝은 씁쓸하여 뒷맛이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아주 운 좋은 일부는 세상에 절망한 때에 좋은 사람을 만나 구원을 받기도 한다.

         

       덕현친왕이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세상에 질린, 원한을 감당할 수 없었던, 누명에 쫓겨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혹은 진짜 마두였던 자들을 기꺼이 가족으로 받아 울타리 안에 들인 위인이다.

         

       자유가 쓰게 웃었다.

         

       “마음이 고운 사람이 제 가족들 안위만을 걱정해 이 사태를 보고만 있다더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다 개중 어린 목소리가 물었다.

         

       “그러면, 이제 슬슬 옥체를 보전하셔야지요?”

         

       왕부 내에 쥐새끼도 잡았겠다, 슬슬 당가에서 떠날 때도 되지 않았냐는 채근이었다.

         

       자유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하다, 결국 결심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

         

         

       간밤에 견 노가 들러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팽초려가 떠났다.

         

       “팽 소저도 떠나세요?”

         

       “어쩔 수 없잖니. 하북팽가의 장녀가 역모에 휘말려서야 어르신들 볼 낯이 없지.”

         

       하북팽가는 하북에 있다.

       또 하북에는 북경이 있다.

         

       마교가 발호하면 제일 가까운 곤륜파가 박살이 나듯, 황실이 칼을 들면 제일 가까운 팽가가 크게 피를 본다.

       그러니 팽가는 절대로 관부와 척질 일은 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대도는 선물로 줄 터이니 가지고 계속 정진하려무나.”

         

       “음. 할아범이 들고 다닐 수 있으려나.”

         

       최리옹은 화경의 고수지만, 아예 성질이 다른 불가의 신공으로 갈아치우는 탓에 아예 단전을 비우고 처음부터 쌓아나가는 중이었다.

         

       청도 대마두에게 대정선공을 전해도 되는가 큰 고민을 했지만, 할아범에게 특별히 수발을 들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한 이후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정선공의 정신 보호 성능을 직접 체험한 청이었으니 할아범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치매끼 있는 최리옹이 회까닥 돌아버리면 어떡해.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할아범의 인상이 점점 자애로운 부처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살도 조금씩 붙기 시작해서 눈 퀭한 해골이던 예전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 중얼거림에 팽초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는 네가 들려무나. 힘도 장사면서.”

         

       “아니, 그러면 내가 떠넘기는 것 같잖아요. 할아범이 뺏어가는 거거든요?”

         

       “그래.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던데?”

         

       “나 편하라고 들어주는데 내가 불편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러니까 내가 편해야 할아범도 보람이 있지.”

         

       그에 최리옹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그렇게 서문청은 지옥참마도(3호)를 획득했다!

         

       팽초려가 그 모습에 재차 웃음을 터뜨리고는 뒤이어 말했다.

         

       “난아 그 아이가 꽤 충격을 받은 것 같던데. 기왕 남기로 했으면 좀 챙겨주도록 하렴. 무림이 무정함을 아직 깨닫지 못했나 봐. 난아에게는 무림이 너무나 친절하기만 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

         

       청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팽초려가 손으로 제 얼굴 앞을 몇 번 부채질하듯 파닥거리는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미련 한 점 없는 가뿐한 태도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배웅을 마치고 돌아가니, 객청 마루에 걸터앉은 당난아가 할 일 없이 다리만 흔들고 있는 꼴이었다.

       

       “오늘은 진료 안 봐?”

         

       “환자가 없어…….”

       

       당난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가의원에도 환자가 뚝 끊겼다.

       정말로 중병에 걸렸거나 사경에 처한 이들이나 몇 명 들르지, 혹여 역모에 연루되느니 그냥 아프고 말겠다는 사람들의 심보였다.

       

       그렇게 축 처진 어깨로 발만 앞뒤로 흔들다가, 지나가듯이 툭 던져 물었다.

            

       “언니는. 가셨어?”

         

       “가문이 걸린 일이라니까 팽 소저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응.”

       

       우리도 가문이 걸렸는데, 하는 웅얼거림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다가 재차 물어오기를.

       

       “그럼 너는? 넌 안 가? 신녀문 제자잖아.”

         

       “어차피 외문제자거든? 이름도 없지롱.”

         

       청은 신녀문 명부에 적을 올리지 않았다.   

       서문수린의 따뜻한 배려다.

         

       제자 마음대로 가는 길에 혹여라도 신녀문이 걸리거든, 언제라도 파문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라고.

       어차피 적도 없는 외문제자 하나 파문해봐야 변할 것이 호칭뿐이니.

       그것도 신녀문 제자 박탈이지 기명제자 노릇 때려치우라는 것이 아니니 그냥 저지르라고.

         

       “그리고 이 서문청 의리 빼면 시체라고 할 수 있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니까.”

         

       사실 의리를 안 빼도 시체 비슷하기는 하다.

       하지만 청은 몰랐다. 이에 대해 아는 이라고는 세상에 하나 저세상에 하나 해서 둘 뿐이었으니까.

         

       “뭐야, 그게.”

       

       당난아가 그러면서도 새물새물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는 폴짝 뛰어 땅 위로 섰다.

         

       “뭐. 사나이도 못 되는 것들이 널렸는데. 흥. 질풍지경초라더니. 다시 봤어.”

         

       질풍지경초는 ‘바람이 불어야 풀이 질김을 안다’는 뜻으로, 서양 속담에는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라는 뜻과 대충 비슷했다.

       인간 황제 중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최고의 성군 광무제가 군벌 시절 어려울 때 홀로 남아 자리를 지켜준 왕패에게 한 찬사였다.

       이후 광무제 역시 왕패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천하에 제일가는 대제후로 만들어 주었다고.

         

       같은 뜻으로 우정에 쓰는 말인 노요지마력 대신, 굳이 수하의 지조와 절개를 말하는 질풍지경초를 쓰는 것이 악녀의 오만함 당난아답다고 하겠지만.

         

       청은 어차피 몰라서 아무 생각이 없다.

         

       “다시 본다고 뭐 있나.”

         

       “그…… 우리, 암기 보러 안 갈래?”

         

       “갑자기?”

         

       “어, 있지, 음. 그러니까. 아. 그래. 저번에 침통도 손으로 막았지? 뭐가 위험한 줄을 모르니 그딴 짓을 하는 거 아냐. 이럴 때 봐 두면 혹시 나중에라도 뭐가 위험한지 알지.”

         

       과연, 한의사다운 논리적인 설득이었다.

       청은 개소리에 능하고 논리에 약하기 때문에 결국 그 얇은 귀가 팔라당 뒤집히고 말았다.

       게다가 생존에 관련된 문제기도 하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당장 가자.”

         

       그리하여 당가의 비전 창고가 활짝 열렸다.

         

       사실, 암기란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위력이 마구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외인은 커녕 유출을 대비해 방계조차 일정 성취에 도달하지 못하면 드나들 수 없는 당가의 정수인 것이다.

         

       그 창고를 고착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홀라당 공개해 버렸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악녀만이 할 수 있는 패륜적인 우정 쌓기였다.

         

       이 사실을 당문의 어르신들이 알게 된다면?

         

       아아 친구라면 어쩔 수 없지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난아가 친구 없는 건 이미 모두가 알아 우려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당난아의 주도면밀한 심계가 증명되는 것이며 천하의 악녀로서 이름을 떨치기에 과연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덕분에 청은 제대로 안계를 넓혔다.

         

       청은 세상에 그리도 많은 암기가 존재하는지 몰랐다.

       해봐야 표창이나 그때 그 죽통이나 되겠거니 했더니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본 것들만 벌써, 사와 사와 사, 침과 침통, 망과 질려, 소적. 시와 전, 적, 소, 그리고 온갖 모양을 한 투척 암기들까지……

         

       당난아가 신이 나서 설명을 해 주었다.

         

       사砂는 모래, 보통 독에 절여놓아 특수한 공법이나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향해 뿌린다.

         

       “눈코입에 들어가는 게 제일 좋지만, 고수는 막아내거든? 그러니까 머리카락에 뿌리는 게 제일 효과가 좋아.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독모래는 잘 안 빠지거든. 게다가 독기 때문에 탈모를 일으킬 수도 있고. 히힛.”

         

       너무나 끔찍한 소리에 청이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악녀 같았다.

         

       사梭는 실을 매단 추, 독에 절인 실로 덫을 놓을 수도 있고 그냥 유성추처럼 던져서 몸에 닿게 만들 수도 있었다.

       청이 이 대목에서 몸을 떨었다.

       실 진짜 싫다…….

         

       사射는 화살, 접이식이나 혹은 현악기 등으로 위장한 특수한 활로 쏘아 맞추는 암기였다.

         

       침이야 다들 아는 그 침이며, 침통은 보통 침을 발사하는 기관장치를 말했다.

         

       망은 그물이다.

       청이 이 대목에서 다시 몸을 떨었다.

       그물도 진짜 싫다…….

         

       질려는 바닥에 깔아 발바닥을 노리는 암기들의 총칭이었다.

       간단한 삼발이 형태에서부터 다양한 모양을 하며 개중에는 못 올라온 평평한 것들도 있어 청의 고향 물건을 떠올리게 했다.

       애들이 조립하고 어른은 수집하는 그 완구의 탈을 쓴 발바닥 지뢰처럼 생겼으니.

         

       시는 활로 쏘는 화살이며 특별한 것들이라면 백린 황린 적린을 바른 화시나 요란한 소리를 내는 적시 따위가 있었다.

         

       전은 현으로 튕겨서 쏘지 않는 화살로 보통은 적이라 하는 피리 모양 장대를 불어서 민다고.

         

       소笑는 웃음 소 자를 쓰지만, 암기로는 입 안에 넣는 주머니를 말했다.

       안에 채워둔 독을 넓게 뿌리거나 물총새처럼 멀리 뱉거나 하는 데에 쓴다고.

       눈썹을 보고 조준하면 좋다면서, 눈썹이 흠뻑 젖으면 눈을 감아도 독이 눈꺼풀 안쪽으로 파고든다는 설명과 함께.

         

       그리고는 온갖 모양의 암기들이 펼쳐졌다.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창인데, 여기 두 개 따로 회전하는 무게추를 달아서 그 궤적이 파도처럼 너울거리는데, 일단 살에 박히면 이렇게, 이렇게, 이런 식으로 파고들어서……”

         

       당난아가 손동작으로 암기 파고드는 장면을 묘사했다.

         

       본래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법이다.

       태양처럼 해맑은 사천제일미 당난아는 평소와 다르게 천진하고 무구한 청순함이 넘쳤다.

         

       청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독이랑 암기 살에 파고드는 걸 말하면서 해맑으니까 좀 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어제 너무 피곤하다 싶더니 자고 일어나니 몸살이네요. 돌겠넹…

    +다행이 병원이 영업하네요 영양제 맞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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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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